말괄량이 선생되다 6. 살고 싶지 않아요
“선생님이 기사를 하나 봤는데 말이야. 최근 5년 동안 자살한 초등학생이 스무 명이 넘는대. 혹시 사라지고 싶거나, 살고 싶지 않았거나 한 적 있는 사람 있니?”
며칠 전 초등학생의 자살 기사를 본 터라 당시 6학년 반 아이들에게 넌지시 물어봤다. 다들 걱정이라곤 하나도 없는 표정으로 다녔기에 한 두 명 손들까 생각했다. 그런데 정확히 9명이 손을 들었다. 심장이 삐끗했다. 진도가 한참이나 밀려있었지만, 한 번 열어본 상자에 무엇이 들었는지 알게 되었으면서 안 본 척 덮어놓을 순 없는 일이었다. 꼬박 이틀이 걸려 개별 상담을 했다. 어떤 아이랑은 겉핥기 얘기를 나누고, 어떤 아이랑은 좀 더 깊숙이 들어간 얘기를 나눴다. 동학년 선생님들께서 심각한 일이라도 있나 싶어 걱정스런 얼굴로 물어오셨다.
“무슨 일 생겼어요, 선생님?”
“얼마 전에 초등학생 자살 기사도 있었고 해서 저희반 아이들과 얘기 나누다보니 자살 충동을 느껴본 아이가 아홉이더라고요. 그래서 개별 상담하고 있어요. 생각보다 오래 걸리네요.”
“관심 받고 싶어서 그러는 거야, 그거.”
차가웠다. 그 대답이.
중학교 3학년 어느 날, 엄마 아빠 부부싸움이 역대급인 날이 있었다.
“이렇게는 못 살아, 이혼해!”
“그래, 누가 겁나! 이혼하자고!”
언니도 동생도 깊이 잠든 그날 밤, 나 혼자만 잠에 들지 못했다. 모두가 잠든 틈을 타 엄마가 집을 나가버리면 다신 엄마를 보지 못할 것만 같았다(근거 없는 두려움). 보초 서는 장병처럼 밤을 지켰다.
나는 이제 곧 돈 많이 들어가는 인문계 고등학교에 가야했다. 언니는 대학생, 동생은 거저 크는 초등학생이니까 당시엔 우리 집에서 나만 돈 먹는 기계였다. 엄마랑 아빠가 갈라서면, 나를 데려간다고 할 사람은 누구일까. 가뜩이나 첫째 딸은 첫째 딸이어서 귀여움 받고, 막내는 내가 달고 태어나지 못한 뭔가를 달고 태어난 귀남이라 집안 사랑을 한 몸에 받는데, 이것도 저것도 아닌데다 돈만 많이 들어가는 나는 누가 데려간다고 할까.
“얘는 당신이 데려가.”
“미쳤어? 당신이 데려가.”
상상 속에서 이미 나는 엄마도 밀고 아빠도 미는 천덕꾸러기가 되어 울고만 있었다.
어느 틈에 잠이 들었을까, 눈을 뜨니 아침이었다. 인생에서 가장 어두운 아침. 퉁퉁 부은 눈으로 학교에 갔다. 3층 창가 내 자리에 앉아 수업 시간 내내 하염없이 창 밖 만 내다봤다. ‘여기서 떨어지면 어떻게 되는 걸까.’ 하는 생각이 머리에 맴돌았다. 말 거는 친구들도 귀찮고, 학교도 집도 다 싫었다. 그저 창 밖만 바라볼 뿐이었다.
점심시간 즈음, 엄마에게 전화가 왔다.
“은진아, 밥 먹었니?”
“응. 왜 전화했어, 엄마?”
“너 눈 부어서 학교 간 게 마음에 걸려서. 어른들은 싸울 때도 있고 그런 거야. 별일 아니니까 걱정하지 말라고.”
전화를 끊고 화장실 빈 칸에 들어가 한참을 울었다. 세상 전부가 나를 밀어내다가 다시 들어와도 된다고 허락받은 기분. 어른들에겐 그저 사소한 부부간 다툼이지만, 16살 소녀에겐 세상이 무너진 슬픔이고 두려움이었다. 내가 그 때 결단력이나 용기만 있었어도 오전에 그렇게 마냥 바라보고만 있지는 않았을 수도 있었다. 쫄보라 다행이다.
아이들의 세상은 어른들의 세상과는 다르다. 어른들의 세상에서 별거 아닌 일이 아이들의 세상에선 전부의 일이 되기도 한다(반대의 경우도 있다.) 특히, 친구 문제, 부모님의 갈등 문제는 아이들에게 치명적이다. 어른들의 눈에서 별 거 아닌 일이니까 아이에게도 별 거 아니리라는 생각은 위험하다. 별 거 아닌 거라는 걸 잘 알고 있는 우리가 아이들에게 손 내밀어 강하게 붙잡아 주고 토닥토닥 등 두드려 주면 되지 않겠는가.
물론 아이들은 자살 충동을 이용하기도 한다. 친구들의 걱정을 얻기 위한 수단으로, 어른들에게 관심 받기 위한 수단으로. 그럼 까이꺼 관심주면 된다. 돈 달라고 하면 못 주는 데 관심이야 뭐, 달라는 대로 주면 되지. 또 하나, 자살을 매개로 관심 받기를 원한다는 건 지금 그 아이의 마음이 채워지지 못하고 있다는 얘기이다. 그럼 교사는 아이가 다른 긍정적인 것들로 가슴을 채워갈 수 있도록 도와주면 된다.
16살 소녀가 하염없이 창 밖만 내다보던 그 때, 그 소녀에겐 어떤 선생님이 필요했을까. 그날 설사 선생님이 “사라지고 싶었던 적 있는 사람 손 들어보세요.”라고 하셨다 해도 나는 손들지 않았을 거다. “부모님이 이혼 위기고, 나를 서로 데려가라고 떠밀지도 몰라요.”라고 말하고 싶진 않으니까. 내게 그 날 필요했던 선생님은, 허허실실 웃고 다니던 애가 세상 무너진 표정으로 창 밖만 바라보고 있다는 걸 발견해줄 선생님, “무슨 일 있니?” 따뜻한 말로 내 마음을 두드리려는 선생님, “어머님, 아이가 많이 불안해하던데 혹시 무슨 일 있나요?” 학부모님이랑 급 상담하기 부담스러워도 나의 심각한 표정을 걱정하며 행동하는 선생님이었다.
어른들 눈에 별 것도 아닌 걸로 죽고 싶어 하는 게 아이들이고, 때로는 관심 받으려고 죽고 싶어 하는 게 아이들이다. 어쨌건, 교사인 내가 할 일은 발견하고 손 내밀고 도닥이고 해결책을 찾을 때까지 함께 걸어주는 것이다. 운이 좋게 내가 발견할 수만 있다면 말이다.
교사가 수업만 잘하면 장땡이었음 좋겠는데, 참 바쁘다 바뻐.
+추가. 지금은 부모님 싸우면 그런 가보다 하고 말아요. 제가 제 돈 벌어 알아서 잘 살고 있으니깐요! 헷.
부족한 글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다음 글은 말괄량이 선생되다 6. 따돌리거나 따돌려지거나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