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괄량이 선생되다 12. 엄마, 나 임고 안 볼래
"착한 딸, 공부 잘하는 딸로 지금껏 얼마나 열심히 살았어. 여자는 교사가 최고라는 어른들 말 따라 집 앞 교대 가서 학점에 벌벌떨고, 임용고시 떨어지면 부모님 얼굴 어떻게 보나 싶어 지난 4년간 공부를 얼마나 열심히 했어.
근데 나는. 아직 선생이 되고 싶지 않아. 아니 될 수 없어. 난 세상에 대해서도 나에 대해서도 아는 게 하나도 없어. 한 번도 내 삶을 살아본 적이 없는데 어떻게 남의 삶을 이끌어 낼 수 있어.
나한텐 시간이 필요해. 5년. 딱 5년이야. 지금껏 해왔던 착한 학생, 착한 딸 그런 거 다 벗고 내가 원하는 것 그거 하나에만 초점을 둔 시간을 살아야겠어. 그러고 난 다시 지금의 길로 돌아올거야. 그래서 꽤 멋진 목소리를 내는 선생이 될거야."
임용을 준비하는 내 모습은 강박적이었다. 식사하는 시간이 아까워 점심과 저녁은 오후 3시쯤 한 번의 식사로 퉁쳤고, 매일 아침 7시에 집을 나서 집에 돌아오면 밤 12시가 넘어 있었다. 오고가는 시간이 아까워 교육과정을 녹음해서 귀에 꽂고 다녔다. '떨어지면 어떡하지'하는 불안은 나를 채찍질했고 나는 두 시야를 가려 앞만 보게 만든 경주마처럼 달리고 있었다. 발굽이 시리고 숨이 가빠도 저 결승선만 통과하면 될 일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경주마가 멈춰섰다. 그리곤 스스로에게 물었다.
"나는 어딜 향해 달리고 있었지? 왜 달리던 거야? 이 길이 내가 정말 원했던 게 맞긴 해?"
임용고시 책을 덮었다. 그리고 생각했다. 생각은 꼬리에 꼬리를 물고 늘어졌다. 하루, 이틀, 사흘, 나흘.
그러다 안개 속 같던 모든 것이 선명해졌다.
'나는 아직 선생이 되고 싶지 않아. 아니 될 수 없어. 난 세상에 대해서도 나에 대해서도 아는 게 하나도 없어. 한 번도 내 삶을 살아본 적이 없는데 어떻게 남의 삶을 이끌어 낼 수 있어. 나한텐 시간이 필요해. 5년. 딱 5년이야. 지금껏 해왔던 착한 학생, 착한 딸 그런 거 다 벗고 내가 원하는 것 그거 하나에만 초점을 둔 시간을 살아야겠어. 그러고 난 다시 지금의 길로 돌아올거야. 그래서 꽤 멋진 목소리를 내는 선생이 될거야.'
초점을 잃어 흐리멍텅하던 눈동자에 총기가 돌았다. 종이 하나를 꺼냈다. 거기에 앞으로의 5년 계획을 적어내려갔다.
1.호주로 워킹홀리데이를 떠난다.
2.2년간 열심히 일하며 돈을 모은다.
3.2년 혹은 그 이상 기약없는 배낭여행을 한다.
4.그리고 돌아와 임용고시를 본다.
그 길로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집으로 향했다. '살면서 처음으로 짜 본 나의 인생계획이잖아. 자기 삶을 자기가 설계하는 것! 그게 어른이잖아. 이제서야 난 어른이 된 거야. 지금껏 장학금 받고 공부만 하면서 말 잘 듣던 딸이 처음으로 내민 인생계획이야. 부모님도 분명 이해해주실 거야.' 그러나 나의 기대는 완전히 땅바닥에 뭉게졌다. 대신 어머니는 화답하셨다.
"임고 안 볼거면 집구석에 들어올 생각 하지도 마!"
여차저차해서 나는 그 해 임용고시를 보게 되었고 시간은 로켓처럼 달려 지금은 어언 6년차 교사가 되었다. 호봉은 올랐지만 그만큼 씀씀이가 올라 월급에 대한 감사함을 느끼긴 어렵게 되었고, 경력이 쌓인만큼 아이들을 잘 가르치게 되었는지에 대해서는 항상 의문이 들며 허구헌 날 별의별 일로 자책하는 교사가 되었다. 쳇바퀴같은 교사의 삶이 앞으로 30년 더 이어질 걸 생각하니 갑자기 쓴 물이 올라오는 것 같다.(행복한 순간도 많지만 문맥상 생략한다)
나처럼 임고 안보고 여행 다녀올 생각하던 친구는 우리는 이미 떠나지 못할 이유들을 덕지덕지 끌어안은 채 살아간다며 떠날 수 없는 이유를 하나 하나 나열해주었다. 다달이 나가는 보험료, 연금저축, 학자금 대출, 커진 씀씀이, 보장되지 않은 미래에 대한 두려움, 그만 두면 나오지 않을 연금, 오르지 않을 호봉, 팔팔한 머리들과 붙어야 하는 임용고시의 벽. 나는 잠자코 고개를 끄덕였다. 친구는 덧붙였다.
"내가 지난 날은 후회 안하는 데, 그 때 덜컥 바로 임고 봐버린 건 후회돼. 그 때 뿐이었던 거 같애. 기회는."
내가 그 때로 돌아가면, 임용고시를 보지 않고 여행을 떠나겠다던 그 때의 나에게 한 마디만 해줄 수 있다면 말해주고 싶다.
"29살에 6년차 교사든 1년차 교사든 다를 거 없어. 29살의 내가 알아서 할테니까 나만 믿고 여행 갔다와."
지금도 나는 항상 가슴 한 구석에 기약 없는 배낭여행을 품고 산다. 교장선생님께 사직서 선물해드리고 퇴직금, 원룸 보증금, 적금 탈탈 털어 배낭 메고 떠나는 상상은 할 때마다 짜릿하다.
상상이라 짜릿한 걸까. 언젠가는 현실이 될 수도 있지 않을까. 윌터의 꿈만 현실이 되나, 모리의 꿈은?
서툰 나로 선생이 되어 좋은 점
1. 문제 일으키는 아이들에 대한 이해도가 높은 편. 이해를 잘 하니까 지도도 잘 하는 편.
2. 에듀콜라에 '말괄량이 선생되다' 주제로 쓸 게 많음. 10개 쓸라고 했는데 글감이 많아서 더 쓰는 중.
서툰 나로 선생이 되서 나쁜 점
1. 애들 중에 나보다 나은 애들이 있(많)다
서툰 글 읽어주셔서 감사해요.
다음 글은 말괄량이 선생되다 12. 나는 여전히 말괄량이 입니다.
더위 먹지 마시고 행복만 먹으세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