칠판 구석에 적었다. 글쓰기 모임을 구상할 때만 해도 그럴싸한 모집 공고문을 출력하리라 계획했는데, 원대한 계획에 비해 초라한 실행력을 갖춘 나는 결국 개학하고도 이틀이 지나서야 칠판 왼쪽 맨 위에 한 문장을 적었을 뿐이었다. 1교시 시작 전에 모임의 취지를 설명함으로써 공고문 작성에 대한 마음의 짐을 퉁쳤다.
"선생님이 너네랑 글쓰기 모임을 만드려고 하는데 말이야. 이 글쓰기 모임은 마녀가 운영하는 거라 글쓰기 숙제도 있고, '이 책 읽어와라.', '저 책 읽어와라.' 막 그럴 때도 있을 거라서 너네가 역시 '선생님은 마녀가 맞는구나.' 할 거야. 그래도 이 모임에 들어와 준다면 같이 글 쓰고 읽고 얘기하면서 몇 개의 추억이 생길 거라 기대하고. 예산 같은 거 배정받을 수도 있는데, 그러면 간식도 좀 먹여줄 순 있고. 아무튼 그래. 같이 하고 싶다면 여기 이름을 적어주면 돼."
내가 마녀가 된 계기를 잠깐 설명하자면, 아이들의 거센 저항에도 불구하고 주 1회 받아쓰기 시험을 끝까지 밀어붙혔고, 왜 받아쓰기를 해야 하는지 모르겠다는 아이들의 항변에 "너네 괴롭히려고. 나는 마녀니까."라는 드립을 쳤다가 지금껏 마녀가 되었다.
나보다 스케줄이 빽빽한 요즘 아이들이다 보니 5명만 들어와도 성공이라 생각했다. 며칠 동안 몇 개의 이름이 써졌다가 지워졌고 11개의 이름이 칠판에 남았다.
첫 모임은 9월 1일 수요일 수업 끝나고로 잡았다. 그런데 하필 그날 교장선생님이 새로 부임하셨고, 내가 갑자기 해야 할 업무가 생겨 일주일을 미뤘다. 9월 8일 수요일엔 한 아이를 긴급하게 생활 지도하느라 또 일주일을 미뤘다. 이주가 지난 9월 15일 수요일이 되어서야 비로소 우리의 첫 번째 글쓰기 모임이 성사되었다.
우선 모임의 이름부터 정하기로 했다. '마녀 고양이와 쥐들' '마녀와 고양이들이 글쓰기 모임' '귀요미들이 쓴다' 같은 후보들이 나왔고 다수결로 '마녀와 고양이들의 글쓰기 모임', 줄여서 '마고글'이 우리의 모임 이름이 되었다. 마고글, 마구 글을 쓴다는 느낌도 나서 마음에 쏙 들었다.
나는 사절지 두 장을 바닥에 내려놓고 아이들을 둘러앉혔다. 사절지 중앙에 큼직하게 '마고글'이라 적고, 각자 자기 앞 종이에 자기 구역을 표시하라고 했다. 앞으로 써보고 싶은 글감을 마구 적는 구역이었다. 우리는 이미 반년을 함께 해왔기에, 함께 쏟아내는 글감들이 금방 사절지를 빼곡히 채웠다.
나는 이런 걸 적었다. 채율이의 애교, 교실에 들어서면 나를 안아주러 와주는 민서, 반장이 되어서 아이들을 이끌어보려고 애를 쓰는 용준이에 대한 고마움, 짧은 원피스 입은 날 교장선생님의 동공 지진, 놀아줘 귀신(소영)의 출몰, 은서는 왜 이렇게 착할까 은서를 화나게 해 보기, 4학년 5반 아이들의 예쁜 점.
아이들이 적은 글감 중 귀엽거나 어이없는 것 몇 개를 옮겨 보자면, 선생님의 이중생활, 장난 심하게 치는 법, 선생님의 예쁨, 선생님은 왜 아이섀도를 한 색깔만 쓰지, 나는 왜 귀여운가, 학교와 집에 있을 때의 차이, 오빠의 방귀소리, 윤지의 장난 멈추는 방법, 하늘이 예뻐서 사진을 찍다가 모기에 엄청 물린 것, 선생님은 왜 장난에 속아주는가.
아이들과 글감을 나누는 데 채율이가 내게 물었다.
"선생님은 왜 이 신발만 신어요?"
나는 좀 놀랐다. 평소에 내게 큰 관심을 보이는 채율이긴 하지만 나의 신발까지 호기심을 갖고 지켜볼 줄은 몰랐다. 나는 대답했다.
"발목이 아파서 이 신발만 신고 있어. 이게 발을 잘 받쳐준다고 해서."
나는 아킬레스건염을 만성으로 앓고 있어서 투박하고 못생긴 검은색 기능성 신발을 신고 근무하고 있다. 채율이는 "아, 그렇구나." 하더니 자기 앞 글감 영역에 '선생님의 신발'이라고 적었다. 언젠가 채율이가 이 글감을 붙잡고 글 한 편을 써낸다면 그건 내게 놀라운 감동이 될 것 같았다. 서로를 이어내는 건 결국 관찰이었다.
사절지 가득 글감을 채우고 우리는 글 한 편씩을 쓰기 위해 책상 앞에 앉았다. 오늘의 글 주제는 마고글 첫 번 째 모임 후기였다. 아이들은 종이에 쓰고, 나는 텔레비전 화면을 띄어놓고 컴퓨터로 글을 썼다.
아이들은 실시간으로 중계되는 내 글을 쳐다보느라 글쓰기에 집중을 못했지만, 오늘은 첫날이니 끝까지 이렇게 시간을 보내보기로 마음먹었다. 장면 하나하나를 글로 바꿔내는 나의 방식을 아이들에게 보여주고 싶었기 때문이다.
처음 약속한 10분은 마구 쏟아지는 글자들 앞에서 부족한 시간이었고, 20분을 꼬박 쓰고 나서도 몇몇은 시간이 더 필요하다며 투덜 했다. 우리는 따끈따끈한 글을 들고 동그랗게 둘러앉아 서로의 글을 돌려 읽었다.
아이들의 글 속에는 전혀 몰랐던 마음들이 담겨 있었다. '미루고 미뤄지다 결국 오늘 마고글 글쓰기를 시작했다. 어제 설레서 그 생각만 하다 잠을 제대로 자지 못했다.' '1일, 오늘 첫 글쓰기 모임이 취소됐다... 기분이 묘했다. 8일, 글쓰기 모임이 취소됐다. 너무 우울하다. 잘 모르지만 00이가 기분이 안 좋았나 보다. 뭐, 그럴 수 있지~ 기분 안 좋은 건 모든 사람이 겪으니까! 15일 오늘은 모임이 취소되지 않았다! 모임 이름은 마고글이다... 행복한 글을 마구마구 써야지!'
아이들이 이 모임을 이렇게 기다리고 있었는지 몰랐다. 글이 아니었다면 전혀 몰랐을 마음이었다. 그 큰 아쉬움을 갖고도 어떻게 나한테 불평 한마디 안 했는지, 아이들의 조용한 배려에 너무나도 고맙고 미안했다.
누군가와 가까워지고 싶었던 마음, 글쓰기 모임 시작에 대한 설렘, 함께 시간을 보낸 것에 대한 기쁨 같은 마음들도 종이에 담겨 서로에게 전해졌다. 글을 쓰고, 돌려 읽는다는 것은 결국 서로를 애정하게 될 수밖에 없는 힘이 있다.
너의 마음을 내가 알게 되었는데, 내가 너를 미워할 방법이 있겠는가. 속절없이 이해할 수밖에.
나는 아이들에게 숙제를 내줬다. 주제는 '관찰'이었다. 오른쪽에 앉은 친구를 일주일 동안 관찰하여 글에 담아보기로 했다. 머리 끝부터 발끝까지, 자주 짓는 표정과 자주 내뱉는 말, 걸음걸이, 밥 먹을 때 입모양과 수업 시간에 주로 하는 딴짓 같은 것도. 찾아내는 대로 적어보라고 했다.
자세히 보면 이해하게 되고, 이해하면 애정하게 되니 나는 아이들이 관찰을 통해 어떤 좋은 경험을 하게 되길 기대한다. 그리고 그 관찰이 본인에게 전해졌을 때, 꽤나 특별한 감정을 느낄 수 있으리라 생각한다. 채율이가 나의 신발을 알아차렸던 것처럼 말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