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괄량이 선생되다 9. 안 먹는다니깐요?
왜 교장선생님은 잔반통 옆을 지키고 있는가
다른 할 일이 없는건가
왜 잔반통 정승을 자처하는가
왜 그는 하고 많은 것 중에 '잔반'에 꽂혔는가
나는 왜 그로인해 이토록 고통받아야하는가
왜 나에겐 원치 않는 것을 거절할 자유가 주어지지 않는가
먹고 싶지 않은 것을 먹지 않을 수 있는 날, 그 날은. 올 것인가,
그 날이 오면, 그 날이, 오면.
오이무침이 덩그러니 남겨진 식판을 내려다본다. 먹기 싫은 것도 다 받으라는 선생님도 밉고 식판을 빼보려는 내 힘에 한 손으로 맞서며 나머지 한 손으로 오이무침을 올리고야 마는 배식 아줌마도 밉다. 어른들은 나를 괴롭히지 못해 안달이 난 게 틀림없다. 내가 오이무침을 먹으면 세상이 달라지나, 오이무침을 버리면 버려진 오이무침이 괴물이 되어 지구를 망하게라도 한단 말인가. 환경 생각해서 애초에 안 받겠다는 데 이걸 굳이 왜, 왜, 왜. 내 식판에, 왜.
냄새도 향도 식감마저도 역한 오이무침과 나머지 잔반을 입 안 가득 담는다. 헛구역질이 올라온다. 입을 앙 다물고 젓가락, 숟가락과 함께 식판을 들어 잔반통으로 향한다. 교장선생님께 목례를 한다(소리를 내어 인사할 수 없다. 입안에 담아둔 오이무침이 쏟아져 나올테니). 교장선생님은 내 표정엔 관심이 없다. 그의 시선은 오로지 잔반없는 식판으로 향한다. 그의 얼굴에 만족감이 떠오른다. 깻잎과 나머지 잔반을 가득 담은 입에 욕지거리가 차오른다. 입 안에 담긴 오이무침과 깻잎절임의 양념이 어쩔 수 없이 목 안으로 몇 방울 넘어갈 때, 몸은 강한 구역질을 올려보내며 저항한다. 거의 비어있어 교장선생님을 만족시킨 식판을 기계적으로 잔반통에 기울였다 내려놓자마자 화장실을 향해 전속력으로 내달린다. 입 안 용량이 한계에 다다를 즈음 변기 뚜껑을 들어올리고 모든 것을 뱉어낸다. 이어서 올라오는 헛구역질을 몇 번 하면 그제서야 그 날의 식사가, 그 날의 악몽이 마무리된다.
왜인지는 아직도 모르겠다. 초등학교 5-6학년 그즈음, 교장선생님은 매일 급식시간마다 잔반통 옆을 지키셨다. 그 해에 콩 짚기 젓가락 인증제가 있었던 기억으로 말미암아 급식 관련 연구학교라도 했던걸까? 모르겠다. 일개 초등학생이 그럴 걸 알리가. 매일의 급식시간이 고역이었던 것만 알겠다. 나는 낯선 음식에 대한 거부감이 아주 컸고 편식도 심한 아이였다. 채소류는 거의 입에 대지 않고 고기랑 밥, 후식만 먹었다. 이건 유전인지 삼남매가 다 비슷하게 입맛이 까다로웠다. 가정교육을 제대로 못 받았다는 생각을 하고 있으시다면 아서주셔라. 선생님들께 모범적이라 칭찬 많이 받고 자랐으며, 숱한 시도에도 삼남매의 식사 고집에 채소부분만 포기한 것이었으니 가정교육 문제는 아니고 취향 문제다.
예나 지금이나 먹기 싫은 건 죽어도 못 먹는다. 식판고문 받던 기억이 강렬해서인지 누가 이건 왜 안 먹냐고 내 식사에 고나리짓하려 할때면 짜증이 치밀어 오른다. 먹든 말든 니 앞 일이나 신경 쓰라고 하고 싶다. 그런 순간엔 성격이 괴팍해졌다. 식판고문의 부작용이다.
결국 교장 선생님이 잔반통 지키며 강요했을 때 억지로 입 안에 담았다 게워냈던 거의 모든 반찬들은 크면서 자연스럽게 먹게 되었다. 급식 고문은 말 그대로 고문이었지 내겐 교육적 효과가 전혀 없었던 것이다. 물론 지금까지도 절대 입에 안 대는 것들이 있다. 피클, 오이무침, 깻잎절임 그런 것들. 근데 못 먹는 음식이 있음 또 어떤가. 기호 확실해 보이는 게 꽤 매력적이지 않은가.
상상력이 부족한 나는 내 경험을 바탕으로 아이들을 지도하기 때문에 급식 지도를 따로 안 한다. 대신 환경을 위해 먹기 싫은 건 받지 말고 먹고 싶은 만큼만 받아 먹으라고 누누히 말할 뿐이다. 나에게 너무나 간절했던 식사의 자유를 아이들에게 주면서 위안 받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글의 요점은 딱히 없다. 그냥 편식하고 급식 지도 안하는 선생님으로써 한 번쯤 항변해보고 싶었다.
부족한 글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다음 편은 말괄량이 선생되다 10. 어려도 사랑은 뜨겁게 입니다
봄날 같은 나날 보내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