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네마테라피5화] 자전거 탄 소년 - 문제아동을 바라보는 교사의 관점
※ 스포주의
이번에 다룰 영화는 다르덴 형제의 작품 자전거 탄 소년 입니다.
"가장 사랑이 필요한 아이는, 언제나 가장 사랑스럽지 않은 방식으로 사랑을 요청한다"
-러셀 바클리-
다르덴 형제는 이미 예술 영화의 거장으로 알려져 있기도 하고,
사실 이 영화는 제가 시네마테라피 글 연재를 시작할 때 가장 먼저 떠올렸던 영화였습니다만,
영화가 주는 울림이 매우 깊은 데다 관객에게 던지는 메시지가 적지 않았기 때문에 글로 표현하는 데 시간이 걸렸습니다.
여러 관점으로 이 영화를 바라볼 수 있을 것입니다.
저는 이 영화를 교사들이 문제를 가진 아이들을 위해서 무엇을 할 수 있을까 에 대해 고민하며 보았습니다.
개인적으로 제가 꼽는 최고의 성장 영화입니다.
#1
영화의 초반을 보면 사뭇 정신 없습니다.
한 아이(시릴)가 전화기를 들고 서 있습니다.
이 아이는 차마 전화기를 내려 놓지 못합니다. 없어진 번호라는 안내 메시지를 믿을 수 없습니다.
아빠가 시릴의 연락을 거부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시릴은 아빠와 잠시 소식이 끊겼을 뿐이라고 믿고 싶어합니다.
이 아이는 어른들(보육원 교사)을 피해 도망다니고, 저항하는 걸로 봐선 누군가에 대한 마음이 닫혀 있는 것이 틀림 없습니다. 어른들의 힘만으로는 이 아이의 마음을 진정시킬 수는 없는 듯 합니다. 영화를 보다보면 이 아이가 왜 그런 행동을 하는 지 알 수 있습니다.
시릴은 보육원 교사를 피해 도망다니고, 안잡히기 위해 우연히 한 사람에게 매달리게 되는데 그 사람이 바로 여자 주인공인 사만다입니다. 사람과의 인연은 찰나의 순간에 의해 규정되기도 합니다. 사만다는 시릴이 눈에 밟혔는지, 주말 위탁모가 되기로 결심합니다. 아이랑 주말마다 함께 살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시릴에게 있어서 사만다는 아버지를 제외하고 최초로 마음을 연 상대입니다.
#2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릴은 아빠를 만나길 끊임없이 원합니다.
그러던 중 시릴은 아버지가 유일하게 남긴 자전거를 도둑맞습니다. 시릴에게 있어서 자전거는 아빠의 분신과도 같은 것입니다. 그래서 상심이 더욱 깊어집니다.
시릴은 사만다의 도움으로 잃어버린 자전거를 찾게 됩니다. 하지만 자전거를 누가 훔쳐간 것이 아니었습니다.
다름 아닌 아빠가 그 자전거를 다른 사람에게 판 것입니다. 아빠가 자전거를 판 사실에 시릴은 상심하게 되지만 그래도 믿을 수 없습니다.
결국 아빠의 새 주소를 찾아낸 사만다는 시릴의 아빠와 연락을 해 만나기로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빠는 약속 장소에 나오지 않습니다. 시릴은 이 사실을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이 영화의 전반부에서 시릴은 끊임없이 뛰어다닙니다. 버려지고 싶지 않고 싶은 심리가 반영된 것일까요.
이렇게 뛰어 다니면 언젠가 아빠에게 다다를 수 있다고 생각하는 시릴을 보니 마음이 짠합니다.
마침내 아빠가 더 이상 자신을 만나길 원치 않는다는 것을 알게되고, 자신이 버려졌다고 느끼자 자해를 하게 됩니다. 아빠를 더 이상 만날 수 없는 좌절은 분노로 바뀌게 되고, 그 분노가 향할 곳이 딱히 없어 자신에게 향하는 것입니다. 이 모습을 보면서도 사만다는 시릴을 품습니다. 피 한방울 섞이지 않은 남의 아이를, 그것도 결핍이 많은 아이를 품는다는 건 절대 쉽지 않은 일입니다. 사만다는 사랑으로 시릴을 덮습니다.
시릴은 사만다의 차 뒷자리가 아닌 조수석에 탑승하는데, 이 장면은 마치 시릴이 사만다의 동반자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게 합니다.
(시릴이 사만다의 조수석에 탑승하는 장면은 영화 속에서 여러번 등장합니다.)
이러한 사랑으로 시릴은 사만다를 엄마처럼 잘 따르면서 살게 되지만, 이는 얼마 못가게 됩니다.
바로 동네 형들 때문입니다. 시릴은 나쁜 형들에게 쉽게 매혹당합니다.
아빠의 빈자리가 주는 결핍을 사만다가 미처 다 매꾸지 못한 탓일까요.
사실 형들이 시릴에게 잘해주는 이유는 따로 있습니다. 자신들의 범죄 계획에 시릴을 이용하려는 목적입니다. 지나가는 행인을 일명 '뻑치기' 하여 돈을 훔치려는 계획인데, 시릴은 아버지가 자기에게 돈을 가져다 주면 자기를 받아줄 거라고 생각하였는지 가족의 품으로 돌아가고자 하는 간절한 마음으로 범죄를 저지릅니다.
사만다는 시릴을 나쁜 길에서 벗어나오게끔 하기 위해 노력해보지만, 마음처럼 잘 되지 않습니다. 오히려 시릴은 사만다에게 반항하며 거부하기 시작합니다. 사만다의 품으로부터 벗어나려는 시릴, 혼자 남겨진 사만다의 장면... 사랑으로 감싸주는 것이 생각보다 쉽지만은 않습니다.
결국 범죄에 가담하게 되는 시릴...
세상에 완전 범죄가 없듯이, 시릴의 범죄 행위는 발각되게 됩니다. 하지만 사만다는 어김없이 이번 일도 모든 책임을 지며 해결합니다. 여기까지 이른 것을 보니 시릴에 대한 사만다의 사랑은 거의 절대적인 것에 가까운 듯합니다. 사실 사만다가 시릴을 조건없이 돌봐준 것 자체가 기적이라 할 수 있습니다. 애인과 헤어지면서까지 사만다는 시릴을 이해하려 합니다. 낳았다고 다 부모는 아닌가 봅니다.
그 후 사만다는 시릴과 행복한 시간을 보냅니다.
시릴과 사만다가 서로 자전거를 바꾸어 타고 있는 장면, 이 영화의 손꼽히는 명장면입니다.
이 영화의 카메라가 가장 따뜻한 시선으로 바라보고 있는 장면이기도 합니다.
#3
이제 영화의 흐름이 시릴과 사만다가 행복한 일들만 남은 것처럼 보이지만...
우리네 인생이 그렇게 순조롭지만은 않습니다.
시릴은 마트에서 심부름을 하고 있는데, 자신이 범죄의 대상으로 삼았던 소년을 만나게 됩니다. 이 소년의 아버지는 시릴을 용서해 주었지만, 정작 피해 당사자는 아직 시릴을 용서하지 못한 것 같습니다. 당시 범행의 피해자는 시릴을 쫓게 되고, 시릴은 이를 피해 나무 위로 피신하려고 하자 돌멩이를 던집니다. 곧, 시릴도 나무에서 떨어지고 맙니다. 막상 이런 상황이 닥치자 돌멩이를 던진 이 아이는 겁에 질려 자신의 아버지를 부르게 됩니다.
이 때 아버지는 아들로 하여금 피해입지 않게 하기 위해 알리바이를 만들어 내려고 합니다.
"만약에 아이가 죽었으면, 그 아이가 욕을 해서 쫓아갔다고 할거야. 도망치려다 나무에 올라갔다가 떨어졌다고 하면 돼."
지극히 차갑고도 잔인한 현실을 담아낸 대사였습니다. 이 장면에서 이토록 연민의 정을 느낄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무엇이었을까요?
다름 아닌 시릴이 그토록 집착했던 부자지간의 모습과 대비되는 시릴의 모습이 그 이유입니다. 그것은 시릴이 노력해서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도움을 받을 수 있는 아버지가 시릴에게는 없습니다.
하지만 그 순간 갑자기 시릴은 일어납니다.
마치 아무일 없었다는 듯 자전거를 타고 나가는 것으로 영화는 마무리 됩니다.
이 장면을 보니 왠지 모르게 가슴이 시립니다. 그냥 아픕니다.
이 아이의 앞일이 걱정이 되면서도 한편으로는 왠지 모르게 자기 인생을 잘 살아갈 것 같은 느낌도 받게 됩니다.
아이가 화면 밖으로 사라지는 장면이 한없이 밝게 느껴집니다.
끊임없이 이 영화의 시선은 마지막 순간까지도 시릴을 연민의 감정으로 바라보게 만듭니다.
마치 우리가 따뜻한 마음을 담아 시릴을 바라보고 있는 듯 합니다.
그 시선에는 시릴이 잘 되기를 간절히 바라는 마음이 담겨있는 것 같으면서도 한편으로는 잘 지낼테니 걱정 말라는 것 같기도 합니다.
이 영화에서는 다르덴 형제의 기존 필모그래피와 달리 BGM(베토벤 협주곡 5번, <황제> 2악장)이 4번이나 쓰였습니다.
다르덴 형제의 인터뷰에 따르면 시릴이 위로가 필요한 순간에 넣었다고 합니다.
이 영화의 마지막 장면,
즉 시릴이 쓰러졌다 일어나는 순간 베토벤 협주곡 <황제>가 흘러나옵니다.
앞으로 자기 인생을 잘 살아갈 것 같은 시릴이겠지만
가장 위로가 필요한 순간으로 느껴집니다.
영화 속에서 흘러나오는 음악이 진심어린 위로를 대신 전해주고 있는 듯합니다.
저는 영화가 끝났음에도 불구하고 쉽게 자리에서 일어날 수 없었습니다. 제가 지도하였던 한 제자가 '시릴'의 모습과 꼭 닮았습니다. 이 글을 읽고 있는 선생님 학급에도 시릴과 비슷한 아이가 존재할 것입니다. 이 아이는 선생님 눈에 참 밟히는 아이이지만, 동시에 선생님을 몹시도 힘들게 하기도 합니다. 이 아이를 위해 조건없이 사랑을 베풀기도 하지만 정확히 말하면 그 사랑은 조건 없는 사랑이 아닌, 어쩌면 "내가 이렇게 너에게 주었기 때문에 너는 변해야만 해" 라는 시각으로 이 아이를 바라보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이 강압적인 태도는 아이로 하여금 반감을 가져오게 하여 행동 변화가 수정되기는 커녕 악화될 가능성이 높습니다.
하지만 이 영화 속 '사만다'는 결코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기다렸습니다. 그저 이 아이를 위해 할 수 있는 것을 묵묵히 했을 뿐입니다. 결국 본인에게 닥쳐온 시련이 자신이 감당할 수 없는 범위에 이르자 '사만다'에게 마음의 시선이 향하게 되고 나를 향한 '사만다'의 진심을 결국 알게 됩니다. 그리고 결국 '시릴'은 마지막 장면에서 이전과 달라진 모습을 보여주게 됨으로써 우리에게 깊은 여운을 가져다 줍니다.
이 영화에서 '시릴'이 왜 문제행동을 일으키는지에 대해 고민해 본 적이 있으신지요. 이 아이는 처음부터 문제아였을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시릴은 '사랑'을 받기 위해 몸부림을 쳤던 것입니다. 사랑하는 아빠로부터 '사랑'을 받지 못했기 때문에 마음 속 결핍을 채울 수 없었던 것입니다. 어쩌면 그가 일으킨 문제 행동은 그만의 생존 방식입니다. 바로 '사랑'을 얻기 위한 극단적인 행동이었지요. 물론 그 행동 자체를 옹호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시릴'에게 진정으로 필요했던 것은 '사랑'이었던 것입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동안 수많은 역경과 고난을 딛습니다. 이 영화 속 시릴에게 주어진 현실 역시 너무도 메말라 있습니다.
이 영화를 본 관객들이라면 도대체 시릴을 왜 받아주었냐고 끊임없이 질문을 할 것입니다.
그것에 대한 답은 영화의 엔딩이 대신 해주고 있습니다.
시릴에게 사만다의 사랑 없이 혼자 이 세상에 외롭게 남겨졌다면,
절대로 스스로 일어설 수 없었을 것입니다.
누군가에게 선함을 베푸는 것은 결국 자신의 삶을 풍요롭게 만들기도 합니다.
분명 사만다도 시릴과 함께 성장의 기쁨을 맛보았을 것입니다.
어느 누구도 혼자서는 해낼 수 없기 때문입니다.
선생님 주변엔 참 많은 '시릴'이 존재할 것입니다.
우리는 때때로 '사만다'와 같은 역할을 해야만 할 때가 많습니다.
때론 우리의 진심이 수많은 '시릴'들에게 전달이 되지 않아 힘들고 낙심할 때가 있을 것입니다.
지금 당장 변화가 눈에 보이지 않을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우리가 '시릴'을 포기하지 않을 때, 아이들도 나를 거친 세상으로부터 구원해주는 우리를 돌아볼 것입니다.
저 역시 어린시절 탈선할 수 있었던 수많은 상황 속에서 잘 버틸 수 있었던 이유는
주변의 끊임없는 관심과 사랑 덕분이었다고 확신합니다. 특히 저를 낳아 주신 부모님께 감사드리며!
이제 주인공 시릴은 자신에게 사랑을 줄 수 있는 사람을 향해 페달을 밟기를 소망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