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선생의 체육잡설] 우리 이제 피구는 그만합시다.
초등학교 체육수업을 대표할 수 있는 한 장면을 포착한다면 '피구 수업'보다 적절한 것은 없을 것 같습니다. 제가 초등학교 때도 피구를 참 많이 했는데 20년도 훨씬 더 지난 아직까지 수업 시간에 피구를 하는 일이 많습니다. 초등학교에서 그만큼 교사들와 학생들 모두를 만족시킬 수 있는 종목이 없다고 여겨지기 때문이겠지요. 하지만 체육수업과 관련한 국내외의 많은 학자들과 체육교사들은 체육수업에서의 피구에 대한 문제점을 지적하고 있습니다. 피구가 초등학교 체육수업으로 적합하지 않기 때문에 피해야 할 것으로 보고 있는데, 특히 미국의 체육학자인 Williams는 1990년대에 몇 차례 나누어 기고한 '체육수업에서의 수치의 전당(The physical education hall of shame)'이라는 글에서 강도 높게 비판한 바가 있습니다. 이쯤이면 체육수업에서 피구를 하는 것은 우리만의 문제가 아닌 것 같습니다.
체육수업에서의 수치의 전당에 가장 첫번째로 당당하게 이름을 올린 피구(Dodge ball)
이렇게 이야기하니 피구가 대단히 나쁜 운동인 것 처럼 말하는 것 같지요? 사실 피구 자체가 그렇게 비난 받을 종목은 아닙니다. 우리나라에서야 초등학교와 중학교에서 많이 하지만 다른 나라들의 경우 성인들도 즐기는 스포츠이고 국제 대회도 있습니다. 제가 검색해본 바로는 미국에서 피구를 주제로 만들어진 영화도 있네요. 피구는 던지기와 받기를 기본으로 하는, 전세계인이 즐기는 스포츠인 것은 분명한 것 같습니다.
개봉했었다고 한다. 그러하다.
피구는 국가대항전도 있다. 물론 초등학교에서 하는 것과 차원이 다를 것이다.
비록 피구가 전 세계가 즐기는 스포츠라고 하더라도 저는 피구를 '체육수업에 하지 말아야 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체육수업시간에 피구를 하지 말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이야기하고자 하는 것은 피구 자체의 적절성에 대한 문제가 아니라 피구를 활용하는 방법이나 피구 수업을 하는 동기와 같은 것들입니다. 저도 이와 같은 맥락에서 초등학교 체육수업에서의 피구에 대해 문제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이번 글을 통해 피구라는 프리즘으로 초등학교 체육수업의 문제점을 분광(分光)하려고 합니다.
제 개인적으로 피구는 초등학교 체육수업의 끔찍한 단면을 드러내는 상징적인 활동이라고 생각합니다. 초등학교의 체육수업에서 활용되는 피구수업은 오래도록 방치되어 온 '초등학교 체육수업에 대한 책무성' 문제를 고스란히 드러내고 있습니다. 체육수업에 대해 공부를 하고 고민하는 상당수의 현장연구자들은 피구가 나쁘게 활용되고 있음에 대해 오래 전부터 알고 있었지만 공적인 장소에서 쉽게 이야기하지 못했습니다. 왜냐하면 내 이웃의 수많은 교사들이 피구를 좋은 수업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지요. 조금만 뒤져봐도 피구 또는 변형된 피구에 대한 수업자료나 수업 후기를 쉽게 찾아볼 수 있습니다. 이쯤에서 피구가 나쁘다고 하는 것은 대단한 용기가 필요할 것 같습니다. 그래서 이번에 그 '용기'를 내 보려고 합니다.
체육수업에 대한 초등교사의 뇌구조...아마 상당수의 선생님들이 이러지 않을까 싶다.
체육수업의 책무성과 관련하여 지금 초등교사들은 엄중한 상황에 처해 있습니다. 우리의 체육수업에 대한 외부의 시각은 상당히 심각한 수준입니다. 어쩌면 우리는 얼마 지나지 않아 체육교과에 대한 수업권을 외부에 빼앗기게 될 지도 모릅니다. 이 상황에 대해서는 다른 글을 연결해 놓으니 관심이 있다면 읽어보시길 바랍니다.
잘못된 만남: 초등학교 스포츠강사 제도에 대하여 http://betterthanever123.tistory.com/167
'피구가 나쁘다'는 식의 이야기는 아마도 이 글을 읽는 많은 분들을 거북하게 할 지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처한 '엄중한 상황'을 생각하며 자성의 시간이라고 생각하시면 좋겠습니다. 그럼 피구에서 드러난 초등학교 체육수업의 고질적인 문제점을 밝혀보겠습니다.
첫째, 피구는 교육과정과 거의 무관한 수업입니다. 2009개정 3학년 체육수업을 제외하면 말이지요. 2015개정 교육과정에서부터는 대부분의 체육교과서에서 피구가 빠질 예정이니 내년부터는 피구를 한다는 것이 국가수준 교육과정과 관련없는 수업을 한다는 것과 마찬가지가 되지않을까 싶습니다. 초등학교 체육수업에서는 교육과정에 따른 수업보다는 그날그날에 맞춘 수업을 하는 경우가 상당히 많습니다. 결국 이것은 책무성의 문제입니다. 목표없는 수업에서 정당성을 찾기는 쉬운 일이 아닙니다.
둘째, 피구에서 교사가 하는 일은 대체로 세 가지입니다. '서있기', '호루라기 불기', '싸우는 아이들 중재하기'인데 저는 이 세 가지 행동이 체육수업 시간에서 주된 교사행동이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체육이 교과이고 수업 중 하나라면 아이들에게 배움이 일어나도록하는 교사의 자극이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더군다나 움직임을 익히고 체육에 대한 태도를 형성하는 것이 중요한 체육수업에서 피드백이 없다는 것은 상식적인 수준에서는 받아들여지기 힘들 것 같습니다.
셋째, 피구는 설명이 필요없는 수업입니다. 이미 많은 아이들이 잘 알고 있기 때문에 설명 없이 본 활동으로 들어갈 수 있는 내용이지요. 이런 점은 교사들에게 큰 매력 요소일 것입니다. 초등학교 체육수업에서 많은 선생님들이 설명하기를 어려워합니다. 교실이 아니고, 아이들의 집중을 얻기 어렵기 때문에 많은 설명이 필요한 신체활동을 기피하게 됩니다. 물론 설명을 할 만큼 신체활동에 대한 지식이 없어서 어려움이 있는 경우도 많을 것 같습니다. 그래서 새로운 것을 도전하지 못하고 하던 것을 반복하게 됩니다.
넷째, 피구는 교사들의 레퍼토리의 부족을 드러냅니다. 교육적 의도를 가지고 피구를 활용할 수도 있지만 대부분의 경우 무얼할지 고민하다가 하게 되는 것이 피구일 것입니다. 교사용지도서나 교과서를 보면 교육과정과 관련된 다양한 신체활동들에 대해 자세히 설명을 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대부분의 경우 잘 활용을 안합니다. 읽기에 불편해서 혹은 성공적인 수업에 대한 확신이 들지 않기 때문이 아닐까 싶습니다. 만약 신체활동에 대한 지식이 다양하다면 좀 더 여러 가지 신체활동을 가르치게 되겠지요.
다섯째, 피구는 체육을 노는 시간으로 생각하는 관점을 드러냅니다. 사실 성실하게 체육수업을 하는 선생님들이 제일 듣기 싫어하는 말이 '선생님, 우리는 왜 피구 안해요?'일 것입니다. 초등학교에서는 체육수업을 한 시간 떼우는 시간으로 여기고 피구나 놀이를 하는 경우가 많은 편입니다. 이러한 수업은 '체육을 통해 가르칠 것이 별로 없다'는 것을 교사 스스로 인정하는 것이며, 학생들에게는 잠재적으로 '체육수업을 통해 배우는 것은 없다'라는 태도를 형성하게 합니다. 체육은 노는 시간이 아니라 공부하는 시간입니다. 제 아무리 성실한 체육수업을 하려는 선생님들이라도 오래도록 피구만 해오던 아이들을 데리고 좋은 수업을 하는 것은 힘든 일입니다. 쉽게 말해서 아이들을 피구는 아이들을 '베리는' 수업입니다.
열거하자면 피구수업에서는 더 많은 문제점이 있습니다. 그러나 피구의 교육적 측면을 완전히 무시하는 것은 아닙니다. 제가 이야기하고자 하는 것은 즉흥적이며 무계획적이고 단기적인 체육수업의 단면으로서의 피구 수업의 문제점입니다. 또한, 위의 문제들은 비단 초등학교에 한정된 문제점은 아닐 것입니다. 그보다 상급학교에서도 가능한 일이지요. 그럼에도 이것을 초등학교 체육수업의 문제점이라고 이야기하는 것은 외부인의 시각으로 보았을 때 체육만을 가르치는 중등교사들에 비해 초등교사들의 체육수업이 더 문제가 있는 것으로 여겨지기 때문입니다. 여전히 운동기능이 좋아야 좋은 체육수업을 할 수 있다는 생각을 하는 사람이 많고, 교사 이외의 일반인들은 이러한 생각을 하는 경우가 대부분이지요. 이러한 상황에서 초등교사들은 외부인이 아닌 초등교사들이 체육수업을 할 자격이 있음을 증명해야 합니다. 그러한 맥락에서 한말씀 드리고 싶습니다. 피구만해서는 초등교사가 체육수업을 해야 하는 당위성을 드러내보일 수 없습니다. 우리 이제 피구는 그만합시다.
보태는 말
1. 물론 초등학교에서 체육수업을 한다는 것이, 특히 담임교사로서 체육수업을 한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는 잘 압니다. 저 역시 내부자이기 때문에 그 어려움에 대해서는 누구보다 깊게 공감을 하고 있습니다. 이 글에 이은 다음 글에서는 체육수업을 하는 어려움에 대해 이야기를 풀어볼까 합니다.
2. 나름대로 많이 순화된 표현을 쓰기 위해 노력했습니다. '매운 맛' 버전으로 읽고 싶으시면 아래 링크의 글을 읽으셔도 좋을 것 같습니다.
http://betterthanever123.tistory.com/16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