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Q , 지금부터 Q] 8. 비속어와의 전쟁 - 생각편
명확한 기준으로 알림과 고자질을 구분해보았다. 고자질만 줄어들어도 초등 교실에서는 갈등의 상당수를 줄일 수 있을 것이다. 이번에는 부정적 말하기의 또 다른 보스, 비속어에 대해 이야기해볼까 한다.
(지금부터는 정확하고 사실적인 묘사를 위해 비속어, 욕설 등이 등장할 예정이오니 임산부, 노약자 분들께서는 잠시 접어두셔도 좋습니다^^)
[비속어? 욕설? 놀림?]
○학생1 : 나의 슛을 받아라!
○학생2 : 아, 안 들어갔네. (웃으며) 뭐야, 이 새끼 슛 존나 이상하게 해~!
○학생3 : 맞아, 완전 개발이야 개발. 우리 지겠는데?
○학생1 : 야, 지는 게 내 탓은 아니지. 처음부터 완전 벨붕인데~
○학생4 : 그래도 이겨야지 병신아!
○학생5 : 아, 완전 노잼이야.
위의 상황은 초등학교 점심시간에 흔히 볼 수 있는 상황이다. 그럼 이야기를 나누기 전에 다음을 생각해보자.
1. 위의 글에서 비속어, 욕설, 놀림은 각각 무엇일까?
2. 내가 생각하는 비속어, 욕설, 놀림의 정의는?
우리는 비속어, 욕설, 놀림 등 부적절한 언어 사용 상황을 자주 접하게 된다. 특히 아무렇지 않게 사용하는 학생들을 보면 황당하기도 하고 불편함을 느끼기도 한다. 그러나 지내다 보면 이 셋은 조금씩 다른 결로 다가온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사전적 정의는 다음과 같다.
○비속어 : 겪이 낮고 속된 말
○욕설 : 남의 인격을 무시하는 모욕적인 말. 또는 남을 저주하는 말.
○놀림 : 남을 흉보거나 비웃는 짓.
이들이 주는 어감의 차이를 감지한 교사는 학급 학생들에게 이를 구별하여 인지시키려고 노력하기 시작한다. 하지만 칼날같이 명확한 기준으로 세 바구니에 분류하여 정의하고 담으려는 순간 혼돈에 빠지기 시작한다. 다음 상황을 보자.
○학생 : 병신!
○교사 : 누가 그런 나쁜 말 쓰래? 그건 욕이잖아!
○학생 : 아닌데요? 국어사전에 나오는 단어인데요? 병의 신이예요!
○교사 : 그래도 욕이야!
○학생 : 알았어요. 선생님, 그럼 병땡이라고는 해도 돼요?
교사는 거의 모든 상황에서 판관 포청천이 되어서 판결을 내려야 하는 상황에 처한다. 그러나 항상 명확한 기준으로 셋을 구분하는 것은 어렵다. 자신이 내렸던 모든 판단을 기억하지도 못할뿐더러 비속어는 위의 예처럼 얼마든지 변형, 생성,발전을 거듭하기 때문에 교사가 그 속도를 따라잡는 건 불가능하다. 다시 생각해보자. 욕설이 가장 나쁜 거고, 비속어나 놀림은 조금 덜 나쁜가? 놀림 정도야 그럴 수 있지만 욕은 용납할 수 없는가? 이런 분석적인 프레임에 빠지는 순간 교사는 이길 수 없는 싸움에 발을 들이게 된다.
[왜 쓰지 말아야 하지?]
아주 당연하다고 생각되는 질문을 하나 하고자 한다.
‘왜 욕을 하면 안 될까?’
아마 대다수의 답이 다음 중에 있을 것이라 생각한다.
‘상대방이 기분 나쁘니까.’
‘원래 나쁜 말이니까.’
‘어른들에게 혼나기 때문에.’
‘예의에 어긋나서.’
‘도덕적으로 저질이니까.’
그렇다면 다시 질문을 바꾸어 보자. 듣는 사람이 없을 때 욕을 하는 것은 나쁜가?
비속어, 욕설, 놀림 등을 교사는 흔히 ‘나쁜 말’이라고 묶어 칭한다. 이것은 위험한 프레임이다. 나쁜 말이라는 것은 도덕적 판단이 들어가 있는 것이고 그 판단의 기준은 사람마다 다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교사는 스스로 도덕성의 시금석이 되어 판단 기준을 학생들에게 하사하려 한다. 그리고 그 성경을 받들어 모시기를 종용하고 벗어나는 학생은 이단이 되는 것이다.
오해하면 안 되는 점은 무책임한 도덕적 상대주의를 주장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예의, 전통이라는 명제 하에 ‘당연히 나쁜 말’이라는 프레임에 갇히지 말기를 당부하는 것이다. 올바른 언어 사용의 가장 중요한 기준은 바로 ‘건강한 관계에 도움이 되는 말인가?’이다. 언어라는 것은 결국 관계 속에서 꽃피는 것이고 관계성을 배제한 언어 판단은 말라비틀어진 고목나무에 불과하다. 멋있을지는 몰라도 살아 숨 쉬면서 현재를 풍요롭게 하지 못한다. 그리고 그 관계성의 핵심은 바로 ‘공감’이다.
우리는 침은 뱉는다고 하지만 말은 한다고 표현한다. 말을 내뱉으면 안 된다. 왜냐하면 말이라는 것은 상대를 전제하는 것이기에 판단은 오롯이 상대의 몫이다. 내가 생각하는 정당성보다는 상대가 느끼는 말의 결이 더 중요하다. 그래야 관계를 해치지 않기 때문이다. 여기서 비속어, 욕설, 놀림 등을 하지 말아야 하는 이유가 나온다. 간단하다. 상대의 기분을 상하게 해서 관계를 해치기 때문이다. 정말 친한 친구 끼리 오랜만에 만났다고 가정해보자. 특히 남자들이라면 반가움의 표시로 욕설을 섞는 장면을 쉽게 상상할 수 있을 것이다. 그 때의 ‘이 새끼’는 서로의 관계를 해치지 않고 오히려 끈끈함의 표현으로 다가온다. 그러나 누군가에게 ‘새끼’라는 표현에 대한 생각을 묻는다면 십 중 팔 구 욕설이니 사용하지 말라고 하지 않을까? 차이는 뭘까? 바로 표현의 목적에 대한 공감대가 있느냐, 없느냐이다.
[그럼 욕을 해도 돼?]
그럼 서로 공감하고 합의가 된다면 욕을 해도 괜찮은가? 이 부분에서 교사는 굉장한 불편함에 빠지게 된다. 결론부터 이야기하면 욕은 하지 않아야 한다. 다시 말하지만 욕이라는 건 건강한 관계를 해치기 때문이다. 중요한 점은 욕이나 비속어를 구별하고 판단하는 눈을 길러주는 것이다. 그리고 공동체 속에서 그 기준에 대해 논의하고 합의하는 것이다. 간단하게 요약하면
‘욕은 하지 않는 것이 좋다. 하지만 무엇이 욕인지에 대해서는 공감이 깃들어진 합의가 있어야 한다. 그리고 그 정의는 개별 단어에 대한 판단과 분류가 아니라 합의된 기준을 통해 스스로 내려야 한다. 그 기준은 ’상대의 기분을 나쁘게 하는 가?‘이다.’
[비속어, 욕을 없앨 수 있을까?]
그렇다면 교실에서 비속어나 욕설을 뿌리 뽑을 수 있을까? 가끔 ‘우리 반에는 욕하는 애가 한 명도 없어.’라고 장담하는 분을 볼 수 있다. 과연 그럴까? 장담할 수는 없지만 가장 큰 가능성은 ‘(선생님 앞에서) 욕하는 학생이 없는 반’일 것이다.안타깝지만 교사는 욕설, 비속어와의 싸움에서 결코 승리할 수 없다. 없애기 위해 힘쓰는 순간 아킬레우스와 거북이의 레이스가 시작된다. 이유는 간단하다. 말이라는 것은 단순히 정보를 전달하는 수단이 아니라 감정을 표현하고 공동체를 결속시키며 유대감을 강화하는 종합적 예술이기 때문이다. 평생 절대 감정적으로 흥분하지 않고 평온함을 유지하는 사람을 상상할 수 있는가? 그게 불가능하다면 비속어와 욕설을 없애는 것도 불가능하다. 욕설이 주는 카타르시스나 유대감의 힘은 상상을 초월한다.
이런 안타까운 현실 앞에 교사는 무기력해진다. 그럼 교사가 할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는 것인가? 욕설이 난무하는 거친 교실을 그냥 바라 봐야 하나? 그렇지 않다. 불가능한 싸움에도 학생들을 위해 뛰어드는 무모함이 바로 교육이다. 다만 조금 더 현명하게 접근한다면 나은 효과를 기대할 수 있으리라 생각한다.
첫 번 째로 교사 자신의 욕심을 줄여야 한다. ‘우리 반은 욕을 전혀 하지 않는 완벽한 반으로 만들겠다.’는 불가능한 명제에 집착하는 순간 이미 실패한다. 이 프레임에 빠지게 되면 학생들이 하는 욕설이 곧 교사 자신의 실패로 다가오게 된다. 그러면 학생의 변화를 격려하고 기다려주지 못한 채 무결한 모습을 다그치게 되는 것이다. 여유 없는 교사의 모습은 학생의 언어생활을 더 피폐하게 하고 음지로 몰아넣을 가능성이 크다.
두 번 째는 포기하지 않고 일관되게 교육하는 것이다. 학생이 욕설이나 비속어를 사용할 때 처음에는 부드럽게 타이르다 몇 번 지나면 ‘내가 몇 번을 이야기 했어! 그 딴 식으로 이야기 할 거야?!’라고 폭발하는 경우를 어렵지 않게 접할 수 있다. 교사에게 가혹하게 들릴 수 있지만 이런 모습은 학생들에게 변덕스러움으로 다가간다. 그러면 다시 부드럽게 타이른다고 해도 학생은 ‘또 폭발할 거면서.’라는 벽을 치게 된다. 그 순간 언어 교육은 어려워진다. 그래서 어렵더라도 명확한 원칙을 가지고 일관되게 교육하고 반응해야 한다. 99번 두드릴 때까지 전혀 변화가 없는 것 같던 철벽도 한 번을 더 두드리는 순간 임계치를 넘어 산산조각 난다는 점을 잊지 말자.
세 번 째는 욕설, 비속어에 대한 교사의 터부를 드러내지 않는 것이 좋다. 흔히 상담을 하다 ‘뭐라고 욕을 했어?’라고 물었을 때 ‘씨발놈이라고 했어요.’라고 대답하면 교사가 그 단어의 언급을 피하는 경향이 크다. 왜냐하면 교사 본인이 학창 시절에 심한 욕설을 자주 사용하지 않은 모범생인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물론 다시 언급하는 것이 재교육의 부작용을 낳을 수도 있다. 하지만 교사가 발을 딛지 못하는 오염 지역을 확인하는 순간 학생들은 거기에 숨어 교사를 힘들게 할 가능성이 더 크다. 교사로서 욕을 하라는 말이 아니다. 욕 자체에 대해 알레르기성 반응을 보이거나 회피하지 말고 자연스럽게 대하기를 권유하는 것이다.
넷 째, How dare로 접근하지 말고 How come으로 접근하는 것이 좋다. 학생의 욕설에 대해 이야기 할 때 먼저 생각해 볼 것이 있다. ‘내가 지금 대화를 통해 얻고자 하는 목적이 무엇인가?’ 교사의 목적은 욕설의 부작용을 학생이 깨닫고 줄이게 하는 것이다. 도덕적 설교를 통해 채근하는 것이 아니다. ‘학생이 어떻게 그런 말을(How dare) 하니? 학생이면 학생답게 말을 해야지!’라는 반응은 욕설에 대한 지적이 아닌 학생의 자질과 품성에 대한 비난이다. 그러는 순간 교사 말의 정당성과 상관없이 학생은 반발하기 시작한다. 반면 ‘왜(How come) 그런 말을 하는 게 옳지 않을까?’라는 문제 본위의 접근을 하면 비난이 아닌 문제 해결로 진행할 수 있다. 그래서 불필요한 마찰과 충돌을 줄일 수 있다.
[불편하게 마무리하기]
위의 것들은 비소모적이고 평화롭게 욕설 문제를 대하는데 도움이 되는 생각들이다. 하지만 나는 조금 냉정하고 현실적으로 글을 마무리하려 한다. 어쩌면 조금 불편할 수도 있을 것 같다.
언어는 도구다. 도구는 그 자체로서는 좋고 나쁨이 없다. 그걸 사용하는 사람들이 의미를 부여하기에 따라 좋은 것도 되고 나쁜 것이다. 그리고 그 의미부여는 시대에 따라 장소에 따라 변한다. 그래서 언어도 생성되고 발전하고 쇠퇴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건 사회구성원들의 끊임없는 선택의 결과이다.
우리가 비속어, 욕설에 대해 할 수 있는 것도 한 가지이다. 바로 선택. 내가 이 말을 나쁜 것으로 판단할지 아니면 사용할지. 친구가 나에게 어떤 말을 했을 때 불쾌해하고 화를 낼지 덤덤하게 받아들일지. 학생들의 비속어 사용 지도에 대해서도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하나이다. 선택. 불가능하지만 세상에서 비속어를 없애기 위해 노력할지, 아니면 어쩔 수 없다고 체념할지, 아니면 변화의 씨앗을 심을지.
말은 말일 뿐이다. 말 자체와 싸워서는 이길 수 없다. 그 말을 쓰는 사람, 그리고 그 사람의 마음과 싸워야 한다. 고되고 험난한 길이지만 유일한 방법이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선택이다. 그 길을 걸을지, 파괴할지, 돌아설지.
당신은 어떤 선택을 하고 싶은가?
[N.Q 지금부터 Q]
1. 당신이 가져야 할 7가지 마음
2. 말의 힘 느끼기
3. 경청을 해야 하는 이유
4. 경청 만들어가기
5. 보들 말하기
6. 고.인.돌
7. 알림 VS 고자질
8. 비속어와의 전쟁 - 생각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