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Q, 지금부터 Q 번외편] 6. 선생님, 옆 반은 라면 파티 한대요!
“선생님, 옆 반은 라면 파티 한대요!”
아침부터 교실이 웅성거린다. 옆반에서 오늘 라면 파티를 하기로 한 모양이다. 그걸 알게 된 시원이가 부러워서 소리친 것이다. 나는 짐짓 모른척 하며 대답했다.
“그래?”
“네, 완전 부러워요!”
여기까지만 이야기를 하면 아름답다. 감정과 생각은 자연스러운 것이고, 교실은 표현의 자유가 존재하는 공간이니까. 하지만 꼭 한 발 더 나아가는 녀석들이 있다.
“와, 진짜 부럽다.”
“우리는 왜 안 해요?”
“이건 차별이에요!”
차별이라는 낱말까지 나왔다. 공격적인 단어는 교사의 감정에 진동을 만들어낸다.
“차별? 어째서 차별이라고 생각하니?”
“음…… 우리 반은 안 하니까요.”
피식 웃음이 나왔다. 욱할 수도 있는 상황이었다. 하지만 웃음이 나왔다. 다년 간 너무나도 익숙한 장면이었기 때문이었다. 어쩜 학생들은 매년 이렇게 비슷한지 모르겠다. 옛날 생각이 떠올랐다.
지금도 그렇지만 학생들의 비교하는 말을 듣는 건 유쾌하지 않은 경험이다. 특히 열정만 가득했던 신규 시절에는 더 했던 것 같다. 다른 반은 뭐를 했다더라, 부럽다는 말만 들려도 발끈했었다. 그럴 때면
“그래? 그럼 그 반으로 가. 선생님이 보내줄게.”
혹은
“야, 넌 왜 너한테 유리한 것만 이야기 하냐? 옆반은 단원 평가를 매주 보고 오답 노트도 쓰잖아. 그럼 그것도 똑같이 해야지. 안 그래? 그렇게 할 거지?”
라고 유치하게 공격했다. 틀린 말이 아니기에 학생은 입을 다물었지만 얼굴에는 무안함과 아쉬움, 약간의 섭섭함이 드러났다.
왜 그랬을까? 비교를 싫어하는 나의 성격 때문이었을까? 몇 년이 지나서야 이유를 알 수 있었다.
‘욕심’
학생들 탓이 아니었다. 나의 욕심 때문이었다. 학생들에게 최선을 다하는 삶을 살아 왔다고 자부했다. 학생들은 좋아했고 열광했다. 내가 들이는 노력의 크기 만큼 성취감도 높아져 갔다. 즉, ‘나의 노력 = 학생의 만족’이라는 등식이 생긴 것이었다. 그런 나에게 학생들의 비교는 나에 대한 불만족, 불만으로 받아들여졌고, 이는 곧 나의 노력에 대한 부정으로 해석된 것이었다.
‘내가 얼마나 노력했는데 다른 반의 조그만 부분을 부러워 해?’
라는 배신감이 생겼다. 본디 분노라는 감정은 공정하지 못하다고 느낄 때 발동한다. 나는 학생들의 말이 공정하지 못하다고 느꼈고 분노했다. 결국, 학생들을 완벽하게 만족시키는 교사가 되고 싶었던 나의 욕심 때문에 화를 낸 것이었다.
이것은 열정적인 부모의 모습과 닮았다. 자녀에게 본인이 생각하는 최선을 다하고 모든 것을 바친다. 그리고 자녀의 이상적인 미래까지 결정해주고 이끌어준다. 그 결과가 나타날 때 쯤 자녀는 본인이 원하는 삶에 대한 고민을 털어놓는다. 이에 부모는 자녀의 생각을 인정하지 못하고 본인의 노력에 대한 배신으로 받아들인다. 그동안의 시간과 노력이 부정당하는 느낌이다. 결국 큰 좌절과 상처를 남긴 채 진작에 했어야 할 중요한 과제를 강요 당한다. 바로 ‘과제 분리’다.
학생은 얼마든지 다른 반을 부러워 할 수 있다. 우리 반이 불만족스러워서가 아니다. 그저 눈 앞의 것이 부러울 뿐이다. 마치 당장 탐나는 장난감 때문에 집에 있는 비싼 블럭을 잊어버리는 아이과 같다. 그리고 감정은 자유롭다. 즉, 옆 반이 부럽다는 감정은 학생의 과제인 것이다. 하지만 교사는 굳이 이걸 자신의 과제로 가져 온다. 학생이 느끼고 책임져야 할 불편함을 뺏어와서 화를 내고 섭섭해한다. 그럴 필요가 전혀 없는데 말이다. 학생과의 과제 분리가 이루어지는 순간, 학생의 부러움은 섭섭함의 대상이 아닌 공감의 대상이 된다.
‘아이고, 저걸 부러워 하다니. 힘들고 많이 아쉬운가보네.’
우리는 모짜르트에 대한 질투심에 괴로워하는 살리에르를 보며 섭섭해하거나 화를 내지 않는다. 그저 ‘안됐다.’라고 공감할 뿐이다. 하지만 고가의 핸드백을 받은 친구를 부러워하는 아내를 보면 발끈한다. 그 부러움을 핸드백을 사주지 않은 나에 대한 공격이나 평가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아내의 과제를 가져 온 것이다. 타인의 과제는 언제나 괴로움만 준다. 그래서 수양이 깊은 선인들은 ‘비우라’고 끊임 없이 이야기한 것일지도 모른다.
우리 반은 라면 파티를 안해서 차별이라고 말한 녀석에게 나는 차분하게 말했다.
“옆 반이 라면 파티를 한다니까 엄청 부러운가보네.”
“네, 부러워요.”
“그럴 수 있겠다. 선생님도 선생님이 하고 싶은 걸 다른 사람이 하는 걸 보면 부러울 때가 있거든. 하지만 각 반 마다 색깔이 있고 특색이 있는 거니까 지금은 할 수 없어.”
“아… 왜요…”
“우리 반만의 특색이 있는 거니까.”
“그럼 지금은 할 수 없는 거면, 다음에는 해요?”
“글쎄?^^ 앗, 시원이가 옆 반을 부러워 하니까 갑자기 힘이 빠져서 그런 걸 못하겠는데…… 어떡하지…...:”
“앗, 아니에요. 취소에요, 취소! 우리 반이 훨씬 좋아요!”
“그래? 오옷, 힘이 나고 있다!”
그렇게 한바탕 웃고 넘어갔다. 그래서 라면 파티는? 물론 학기말에 기회가 있다. 썸머힐 데이가 있으니 말이다. 하지만 말해주지 않았다. 궁금해하라는 소심한 복수라고 할까?
*관련 글 : 교사여, 학생의 과제를 분리하라
https://www.educolla.kr/bbs/board.php?bo_table=Author_DoDaeyeong&wr_id=42&page=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