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3화 : 학부모 사, 사, 사... 상담?
군 시절 일정표를 보면 뭔 놈의 주간이 그렇게도 많았더랬다.
그 중 으뜸은 역시 각종 훈련 주간. OO훈련이란 이름을 단 화살표가 가로로 쫙 늘어져 세 칸 내지 다섯 칸을 점령하고 있으면 세상에 그토록 충격적이고 우울한 선이 있을까 싶은 심정이다.
그에 못지 않은 또 하나, 진지공사주간. 왜 허튼 짓이나 뭘 못하면 ‘삽질하고 있네.’라고들 하는지 알게 되는, 스카이삽이 온 진지를 들쑤시는 그런 시간이다. 이 때면 왜 행보관이 부대의 진정한 NO.1인지 이유를 알게 된다.
그렇게 전역했더니 학교에도 참 많은 주간이 있더라. 생명존중주간, 친구사랑주간, 호국 보훈 주간 등등. 그리고 학기 초 즈음 한 번 맞게 되는 주간, 바로 ‘학부모 상담 주간’이다.
학부모 상담 신청서를 보내며 많은 교사들이 바란다.
‘제발, 방문 상담은 조금만! 전화로도 충분하잖아요?’
사실 딱히 할 말이 없을 때도 많고 묘한 관계의 성인 둘이 아무도 없는 교실에 앉아 이야기를 나눈다는 것은 무척 부담스러운 일이기 때문이다. 또한 상담하느라 못하는 업무는 고스란히 남아 스트레스의 원인이 되며 혹시나 퇴근 후 저녁 상담 신청이라도 들어오면 기다리는 시간이 그렇게 억울하고 처량할 수가 없다.
초임 시절 학부모 상담 주간이 되면 선배 교사들과 관리자들이 엄포를 놓았다.
“젊다고 엄마들이 만만하게 볼 수 있으니 기싸움에서 지면 안 돼. 무조건 옷은 정장을 차려 입고 헤프게 웃지 말고. 그리고 최대한 전문 교육 용어를 어렵게 사용해서 전문가라는 것을 보여줘. 알았지?”
그 고마운 충고에 만반의 준비를 갖추고 학부모를 마치 북한 고위 간부 기다리 듯 기다린 것 같다. 어떻게 이겨 관계에서 우위를 차지하나, 어떻게 하면 무사히 끝내나 하는 것만이 관심사였다. 지금 생각해보면 웃음이 나온다. 얼마나 웃겼을까? 젊은 교사가 딱딱한 옷에 더 딱딱한 표정으로 빈 교실에 앉아 학부모를 쳐다보고 있다. 블랙 코미디가 따로 없다.
학부모들도 우리와 똑같은 고등교육을 받은 성인이다. 물론 악질적인(?) 학부모들의 풍문은 여기저기서 들리지만 적어도 내가 만나 본 학부모들은 관계를 넘어서는 독불장군은 없었다. 아이들을 대하는 것과 똑같다. 동료를 대하는 것과 똑같다. 학부모와도 결론은 관계이다.
그래도 학부모 상담이 부담스러운 것은 사실이다. 무슨 말을 해야 하고, 어떻게 반응해야 하는지? 얼마동안 이야기 하는 게 좋고 아이가 잘 못하는 게 있으면 솔직하게 못한다고 해야 하는지, 아니면 좋은 말만 해야 하는지. 물론 교사의 교육관에 따라 다르고 경험에 따라 다르겠지만 쉬운 이야기는 아니다. 이것들에 대한 구체적인 방법이나 해결법에 대해 파고들면 그것도 몇 편의 글이 될 것 같지만 오늘은 가볍게 누구나 적용해볼 사소하고 사소한 팁만 남겨볼까 한다. 이 팁들은 나름 과학적 근거(?)가 있지만 어디까지나 효과는 주관적인 경험에 기인한 것이므로 알아서들 취사선택 / 변형하기를 추천한다.
1. 마실 것
존 바(John Bargh) 박사가 재미있는 실험을 하나 했다. 참가자를 두 그룹으로 나눠 한 그룹에게는 차가운 커피를 주고 다른 그룹에게는 따뜻한 커피를 줬다. 그리고 어느 정도 마시게 하면서 어떤 대상이 되는 사람을 평가하게 했다. 그랬더니 따뜻한 커피를 들었던 사람들이 대상을 더 긍정적으로 평가했다. 이것은 신체의 온도가 우리의 행동에 영향을 미친다는 의미인데 ‘따뜻함 = 공감, 차가움 =거부’라는 등식이 무의식중에 작용하는 것이다. 이것을 ‘점화 효과(Priming)’라고 칭하는데 어떤 자극에 노출된 경험이 다음 반응에 영향을 주는 것이다. 따라서 무더운 여름이 아니라면 따뜻한 음료를 준비하는 것이 좋다. 기왕이면 두 개 정도를 준비해서 학부모가 선택하고 나머지를 교사가 마신다면 자연스럽게 같은 걸 나누는 경험을 공유하게 되어 친밀감이 더 높아질 것이다.
2. 자리 배치
학부모와 상담을 할 때 어떻게 앉아야 할지도 고민이다. 보통 아이들의 책상, 의자를 활용해 마주보고 앉거나
혹은 가까이 앉는 것이 부담스러워 교사는 교사용 의자에 앉고 학부모는 아이 의자에 앉기도 한다.
하지만 개인적으로 둘 다 추천하지 않는다. 마주보고 앉는 경우 시선이 자연스럽게 상대에게 끊임없이 부딪혀 서로 부담을 갖게 된다. 그러다 보면 시선을 피하기 위해 바닥이나 다른 쪽으로 돌리는 일이 잦아지고 그런 모습은 상대에게 의구심이나 부정적인 이미지를 심어주기 때문이다. 또한 마주보는 구도 자체가 친화적인 배치라기보다는 대립적인(형사들이 범인을 취조할 때를 생각하면 좋다.)배치이다.
교사 책상 - 학생 책상으로 떨어져 앉는 것은 배치에서 이미 힘이 한 쪽으로 쏠리게 된다. 보통 교사의 책상이나 의자가 높고 공간이 넓기 때문에 시선이 조금 높아진다. 따라서 교사가 학부모 보다 관계에서 높은 위치를 차지한다는 걸 무의식중에 어필하게 되는 것이다.
그럼 어떻게 앉느냐? 사람이 일대 일로 앉았을 때 약 120도 내외의 각을 이루며 앉으면 가장 편안함을 느낀다고 한다. 그런데 임의로 그 각도를 만들어 자리를 두는 것도 어색하므로 모둠 형태의 자리 배치일 경우
ㄱ자 정도로 앉는 것이 좋다.
그러면 시선이 부담스럽지 않고 편안하고 동등한 위치에서 이야기를 나눌 수 있다. 너무 가깝지 않냐고? 그렇지 않다. 사람들은 보통45cm 이내가 친밀한 거리라고 하는데 그 거리는 넘어가므로 개인적 거리(45~90cm)를 유지하게 된다. 그러므로 부담스럽지 않다.
3. 리액션
상담을 할 때 말을 하는 것이 중요할까, 듣는 것이 중요할까? 답정너가 따로 없다. 당연히 듣는 게 훨씬 중요하다. 그래도 학부모가 교사를 만나러 올 때는 아이의 학교생활이나 전반적인 정보를 듣고 싶어서 오는데 교사가 최대한 많은 정보를 줘야하는 것 아니냐고?그건 교사의 큰 착각이다. 학부모들에게 그건 부차적인 목표일뿐이다. 보다 더 큰 목표는 ‘우리 아이를 맡고 있는 교사가 어떤 사람이고 어떻게 협력적인 관계를 만들까?’하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 자신이 어떻게 아이를 교육하고 있고 집에서는 어떤 생활을 하는지 더 이야기 하고 싶어 한다. 그럼 어떻게 들어야 하나?
사실 듣는다는 게 정말 어렵다. 경청해야 한다는 건 알겠는데 방청객 리액션을 하는 것도 한계가 있다.(경청에 대해서는 다음에 따로 이야기하기로^^) 이 때 간단하면서 좋은 팁이 하나 있다. 바로 표정으로 하는 리액션이다.
대화에는 크게 두 차원이 있다. 메시지의 차원과 관계의 차원이 그것인데 상대와의 친밀감을 결정하는 것은 관계의 차원에서 하는 대화이다. 관계 차원의 대화가 잘 이루어지려면 무엇보다 공감이 일어나야 한다.
정서가 받아들여지는 순서는
정서 유발 자극 -> 신체변화(표정) -> 정서 인식
이다. 예를 들어
개콘을 본다 -> 얼굴이 웃는 표정이 된다 -> 거 되게 웃기네!
이렇게 되는 것이다. 웃겨서 웃는 게 아니라 웃으니까 웃긴 것이다. 따라서 상대와 같은 표정을 짓는다는 것은 같은 정서를 느낀다는 표시가 된다.
표정으로 하는 리액션은 아주 간단하다. 대화를 하면서 상대의 표정을 비슷하게 따라하는 것이다. 예를 들어
(학부모) (인상을 찡그리며) 그래서 저희 성현이가 다친 거예요.
(교사) (인상을 찡그리며) 저런, 어떡해요.
간단한 이 방법은 의외로 큰 효과를 발휘한다.
4. ‘제 견해니까 감안하고 들어주세요.’
학부모와 상담을 하다 보면 아무래도 아이의 교육에 대한 이야기가 주를 이룬다. 그럼 우선 학부모는 교육의 과정에서 겪는 어려움과 답답함을 털어 놓게 된다. 이 때 충분히 들어줘야 된다. 충분히. 그러고 나면 ‘도대체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어요.’라고 하며 교사에게 도움을 요청한다. 이 때 냅다 바로 조언을 늘어놓는 것보다 더 세련된 방법이 있다. 이 한 마디를 넣어주면 된다.
“어머님, 이건 어디까지나 저의 생각이니까요 정답은 아니에요. 그러니 선택은 어머니의 몫이란 걸 명심하고 들어주셨으면 좋겠어요.”
이러면 교사가 학부모 보다 높은 위치에서 해결책을 던져 주는 것이 아니라 오롯이 선택권을 학부모에게 두는 그림이 된다. 그러면 학부모는 자신의 방식을 비난받는다는 생각이 덜하게 되고 존중받는다는 느낌을 받는다. 오히려 이런 약간의 객관성 확보가 학부모에게 더 큰 신뢰를 주는 것이다.
그 외에도 약 5524가지 정도의 팁이 있지만(...응?) 줄이기로 한다.
다시 한 번 못 박는다. 어디까지나 주관적인 경험에 기인하는 팁이다. 해보고 안 된다면 실컷 욕하셔도 좋지만!
살려는 주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