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2화 : 팩트만 말하라고, 팩트!
※ 다음의 대화를 읽고 물음에 답하시오.
지훈 : 태희야, 우리 오늘 뭐 할까? 영화 볼까? 드라이브 갈까? 태희 : 음……. 뭐, 아무거나. 지훈 : <베테랑> 엄청 재미있대. 그럴 줄 알고 예약 해뒀지! 태희 : 그래? 그런데 자기야, 나 오늘 몸이 별로다. 피곤해. 지훈 : 정말? 어쩔 수 없지 뭐. 영화는 다음에 보자. 집에 가서 쉬어. 배웅해줄게. (한 시간 뒤) 지훈 : (까똑!) 응? 아프다더니 웬 깨톡? 태희 : [오빠, 어쩜 그럴 수 있어? 역시 안 되겠어. 우리 그만하자.] |
문제 : 위의 대화에서 지훈이가 잘못한 것을 백 자 내외로 서술하시오.
위의 문제의 정답을 완벽하게 서술할 수 있는 남자라면 굳이 다음의 내용을 읽을 필요가 없다. 시간 낭비하지 말고 뒤로 가기를 누르시면 된다. 그렇지 않다면 잠깐 이야기를 들어주길 바란다.
대화란 무엇일까? 이 질문으로 브레인스토밍을 하면 비슷한 이야기들이 쏟아진다. 수많은 내용들을 정리하면 ‘감정, 마음, 정보 등을 상대방에게 말로 전달하고 받는 과정’이라는 방향으로 흘러간다. 하지만 이는 정확한 내용은 아니다. 대화의 구성이나 종류 등에 대한 조금 심오한 이야기는 다음에 하기로 하고, 일단 오늘은 대화가 이루어지는 과정과 그 때 꼭 주의해야 할 것에 대해 이야기 하고자 한다.
한 사람이 어떤 생각이나 감정을 가진다. 그리고 그것을 상대방에게 말로 전달하려 한다. 그런데 자신의 감정이나 생각을 ‘있는 그대로, 솔직하고 정확하게’ 표현한다면 얼마나 좋을까? 여성들이 남자 친구에게 ‘자기야, 나 지금 쇼핑하고 싶은데 자기가 영화를 보자고 해서 섭섭하고 속상해.’라고 명확하게 이야기 하는 상황을 상상해보자. 남자들에게는 그 얼마나 아름답고 명쾌하고 살만한 세상일까?장담하건대 이런 일이 일어날 경우 연애 실패 비율이 현저하게 줄어들 것이다.
하지만 아쉽게도 현실은 그렇지 않다. 사람은 일반적으로 자신의 감정이나 생각을 그대로 드러내기 보다는 ‘돌려서’ 표현한다.(조금 그럴싸한 말로 ‘암호화’ 혹은 ‘부호화’라고 한다.) 자신의 감정을 날 것 그대로 드러내는 것은 자기 노출이라는 굉장한 용기가 필요한 과정이기 때문에 엄청난 친밀감이 형성되지 않은 관계에서는 쉽게 일어나지 않는다. 그래서 우리는 ‘말을 말 그대로, 말 같이’ 들을 수 없는 것이다. 그 속에 담겨진 진의를 생각하고 해석해야 하는 수고가 발생한다. 그 과정에서 오해가 생기고 갈등이 창궐하며 결국 관계를 망치게 되는 경우가 허다한 것이다. 그래서 천재 언어학자 비트겐슈타인은 ‘말할 수 있는 것은 간결하게 하라. 하지만 말할 수 없는 것에 대해서는 침묵을 지켜야 한다.’라고 말한 것일지도 모르겠다.
Communication은 Communicare라는 라틴어에서 파생된 것이다. ‘꼼뮤니까레’라고 읽는 이 단어의 의미는 ‘공유하다’이다. 상대와 감정, 생각, 경험 등을 말 그대로 공유하는 것, 그것이 소통이고 대화이다. 그런데 대화 자체가 암호화를 통해 이루어지니 둘 사이에 다른 감정, 생각을 공유하게 되는 것이다. 분명히 동시에 경험한 그 상황을 표현할 때도 다른 이야기와 해석을 하고 있다. 다음 상황을 상상해보자.
(쉬는 시간에 열심히 공문 작업 하고 있는 교사) 인경 : 선생님, 미주가 저 때렸어요! 교사 : (지금 엄청 바쁜데!) 그래? 미주야, 너 왜 때렸어? 미주 : 저 안 때렸어요. 실수로 팔이 부딪힌 거예요. 그리고 인경이가 저한테 먼저 시비 걸었단 말이에요! 인경 : 내가 언제 시비를 걸었어? 나는 그냥 내 갈 길을 지나갔을 뿐인데! 미주 : 니가 지나가면서 시비 걸었잖아! 교사 : ?????? |
하루에도 열 두 번씩 일어나는 상황이다. 왜 이런 황당한 상황이 발생할까? 누가 한 명이 작정하고 거짓말을 하는 것일까? 아니다. 아이들은 각자의 입장에서 진실을 이야기 하고 있다. 비밀은 말 속에 있다.
타임 기너트는 <교사와 학생 사이>라는 책에서 수 년 간 존경 받는 교사와 비난 받는 교사를 비교 분석하고 비난 받는 교사들이 많이 사용하는 말의 비밀을 찾아냈다. 바로 상대방을 ‘평가하는 표현’이다.
예를 들어 한 친구가 팔이 옆의 친구 팔로 향했다. 이 때 그걸 본 학생이 말한다.
“선생님, 쟤가 짝을 때려요!”
하지만 그 아이는 억울하다. 짝을 때릴 생각이 전혀 없었다. 다만 팔에 묻은 먼지를 털어주려 했던 것이다. 이런 말을 들은 학생의 기분은 어떨까? 당연히 속상할 것이고 변명을 하거나 어쩌면 복수를 하고 싶을지도 모른다. 저 말을 한 친구에게는 분노가 쌓일 것이다.
‘에이~ 누가 그렇게 평가적인 말을 사용하나, 교실에서!’ 라고 생각하는가? 그럼 다음 말들을 생각해보시길 부탁드린다.
‘너 진짜 착하다.’
‘너 왜 친구를 괴롭히니?’
‘깨끗하게 하라고 했지?’
‘줄을 똑바로 서야지’
‘수업 시간에 바른 자세로 앉아야지.’
‘책임감 있게 행동해.’
이게 뭐?라고 생각 할 수도 있겠다. 위의 말들은 대표적인 ‘평가적 표현’이다. 평가적 표현을 쉽게 설명해보겠다.(학생들도 이 비유를 비교적 잘 이해한다.) 어떤 말을 떠올린다. 예를 들어 ‘시비 건다.’라고 해보자. 여러 사람이 눈을 감고 ‘시비 건다.’라는 장면을 머릿속으로 떠올린다. 그리고 하나, 둘, 셋을 세면 동시에 떠올린 장면을 행동으로 보여준다. 이 때 대부분의 사람이 같은 행동을 했다면 그건 평가적 표현이 아니다. 관찰된 객관적인 표현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T.E.T에서는 행동 관찰이라고 표현하기도 한다.) 하지만 각자가 생각하는 ‘시비 건다.’는 일치하지 않을 것이다. 그렇다면 그건 평가적 표현이라고 할 수 있다. 나와 다른 사람이 똑같이Communicare하지 못하는 언어인 것이다. 이런 평가적 표현은 반발심, 오해, 갈등을 낳는다. 그래서 관계를 위해, 건강한 대화를 위해 가장 먼저 할 일은 바로 이런 평가적 표현을 제거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말을 해야 할까? 간단하다. 필자는 ‘보들 말하기’라고 하는데, 보이는 대로, 들리는 대로 말하는 것이다. ‘놀렸어요.’가 아니라 ‘바보야라고 했어요.’, ‘시비 걸었어요.’가 아니라 ‘지나가면서 제 팔에 부딪혔어요.’라고 말하는 것이다. 위의 비유를 한 번 더 적용하자면 ‘놀렸어요.’를 각자 떠올리면 다른 그림이나 말이 나오지만 ‘바보야라고 했다.’를 떠올리면 똑같은 그림이 나오는 것이다.
처음에 함께 시고작하면 어색함을 느낀다. 말하는 게 딱딱하고 어렵다고 불평을 한다. 그만큼 우리는 생활 속에서 평가적 표현을 많이 사용하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점차 갈등이 줄어드는 것을 느낄 수 있다. 특히 말다툼이 길어져 큰 싸움으로 가는 경우는 거의 사라진다. 우리 반에서 유행처럼 이런 상황이 생긴다.
“야, 너 왜 맨날 내 물 마셔?!”
‘아, 물 마셔서 미안. 그런데 매일은 아니지 않냐? 그건 니 평가인 것 같은데. “
“아, 매일은 아니고, 어제 마셨잖아.”
“그건 맞아. 쏘리!”
어색한가? 유치한가? 효과를 느껴 보면 그렇지 않다는 걸 깨달을 수 있을 거라 생각한다. 그렇다면 어떻게 하면 학급 전체가 평가적 표현보다 보들 말하기를 할 수 있을까? 간단하다. 가장 확실한 방법은 교사부터 사용하면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