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Q, 지금부터 Q 4탄] 4. 학부모는 내 편이 아니다
나는 게임 덕후였다. 특히 삼국지 마니아였다. KOEI의 걸작 게임인 삼국지는 내 청소년기를 지탱한 한 축이었다. 전략 게임인 삼국지에서 가장 중요한 요소는 인재다. 실제 정치에서도 인재를 잘못 골라 낭패를 겪 듯 능력치가 높은 무장이나 책사는 금보다 더 소중한 존재이다. 초심자들이 재정적으로 풍요로와도 동탁군이 아닌 조조군을 선택하는 이유가 그것이다.
인재를 얻으려면 등용을 하면 된다. 주로 재야에 있는 인재를 찾아서 등용하거나 전쟁에서 승리한 뒤 포로로 잡아 등용한다. 소중한 인재는 등용한 뒤 얼른 충성도를 높여야 한다. 그래야 다른 세력의 유혹에 넘어가지 않기 때문이다. 내 사람으로 만드는 것이다.
그 중 색다른 매력을 가진 장수들이 있다. 바로 이민족 장수들이다. 강족, 남만족, 오환족 등 중원이 아닌 인근 지역에 거주하는 사람들을 칭하는 것인데(지극히 중화중심주의다.) 그들은 중원의 장수들이 가지지 못한 특수한 능력을 가지고 있다. 강족은 철기병을 잘 다룬다. 그래서 전투력 높은 철기병 부대를 지휘할 수 있다. 남만족은 등갑군을 지휘할 수 있는데 보병계열 중 독보적인 전투력을 자랑한다. 그러다 보니 이 지역을 정벌하고 장수들을 등용하는 건 국력에 큰 힘이 된다. 등용한 뒤에는 온갖 방법으로 충성도를 100까지 높여 내 사람으로 만든다. 충성하고 전력에 보탬이 되니 참 든든하다. 하지만 전쟁에서 한 번 지고 포로로 잡히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게임 특성상 충성도가 높은 장수들은 항복을 잘 하지 않는다. 그런데 이민족 장수들은 너무나 쉽게, 허무하게 적에게 항복하고 만다. 적군의 지휘관이 된 이민족 장수들을 전장에서 만났을 때의 분노와 허무함은 일로 말할 수 없다.
내 편이라 믿었건만, 그들은 내 편이 아니었나 보다.
1. 아팠던 나의 경험담
뜬금 없이 게임 이야기를 한 이유는 이와 같은 경험을 현실에서도 했기 때문이다. 내가 조금 더 젊고 부족했던 시절의 이야기이다.
한 학부모가 있었다. 남편은 대치동에서 잘나가는 영어 강사였고 아내는 학원을 운영하고 있었다. 직업적 특성 때문이랄까, 아니면 가치관 때문에 직업을 선택했다고 할까? 부모는 사교육에 대한 맹신을 가지고 있었다. 특히 딸에 대한 기대가 커서 어려운 학군이었음에도 방대하고 많은 양의 사교육을 시키고 있었다. 그에 비례하게 학교에 대한 불신, 불만도 컸다. 내가 지향하는 교육의 방향과 많이 달랐다.
그 때나 지금이나 모든 학부모와 상담을 했다. 그리고 이 엄마를 만나게 되었다. 전에 겪어본 선생님들은 힘들겠다고, 조심하라고 했다. 웃으며 괜찮다고 했다. 그렇게 만난 엄마는 의외로 말이 잘 통했다. 예의 발랐으며 나에 대한 이야기를 많이 들어 존경한다고 했다. 우리는 딸의 교육 방향에 대해 진지하게 논의했다. 엄마는 나에게 어려운 점을 묻기도 하고, 우리 반에서 이루어지는 교육 활동에 대해 전폭적인 지지를 드러냈다. 내 편이 된 것이었다.
그 후에도 마찬가지였다. 사소한 문제가 생기면 통화를 할 때가 있었는데 엄마는 쉽게, 호의적으로 대응했다. 나는 의기양양해졌다.
‘이 엄마가 힘들다고 했던 분들은 진심을 전달하는 방법을 잘 모르셨던 건 아닐까? 나는 진심을 효과적인 방법으로 담아 소통하니까 전혀 문제가 없는데? 든든한 내 편으로 만들었잖아.’
자만심이 생겼다. 문제가 될만한 상황이 발생해도 ‘내가 이야기 하면’, ‘나를 아는 학부모라면’ 수긍하고 인정해주리라 확신했다. 점차 원칙보다는 내가 생각하는 교육적 가치를 중시하기 시작했다. 그래도 됐다. 학부모들의 전폭적인 지지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렇게 나는 또 다른 권력에 취해갔다.
그러다 사고가 터졌다. 내가 휴가에 들어갔을 때였다. 우리 반에는 전교의 넘버원(다양한 어려움을 지녀 교사들이 기피하는 학생)이 있었다. 평소에 그 엄마의 딸이 장난기가 있어 이 친구와 자주 다투었다. 그날도 쉬는 시간에 넘버원과 장난을 치다 말다툼을 했다. 그리고 점심 시간에 밥을 먹는데 넘버원이 그 여학생 뒤통수를 세게 때린 것이었다. 하필 그 순간 여학생은 밥을 입에 넣고 있었고 젓가락에 입을 찔릴 수도 있었을 아찔한 상황이었다. 다른 반 선생님께서 더 큰 싸움으로 번지는 것을 막았고 친구들이 둘을 진정시켰다. 전화로 상황을 전해 받은 나는 더 큰 일이 벌어지지 않아 다행이라고 여겼다. 휴가가 끝나면 상황을 마무리해야겠다고 다짐하면서.
그런데 다시 전화가 왔다. 여학생 엄마가 학교로 찾아왔다는 것이었다. 얼마나 놀랬겠나 싶어 그럴만하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선생님께서 아무래도 나에게 학교에 나와봐야 할 것 같다는 것이었다. 엄마가 많이 흥분했다면서. 베테랑이신 선생님께서 휴가중인 나를 부를 정도면 상황이 심각하다는 의미였다. 나는 그 길로 학교로 향했다. 내가 이야기 해야 엄마가 납득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도착한 나는 그 엄마를 마주했다. 엄마는 극도로 흥분해있었다. 상황이 얼마나 위험했는지 아냐고, 한 학생을 죽일 뻔했던 사고라고 소리질렀다. 소리지르고 울고, 울다가 소리지르고. 상대 학생의 부모를 고소하겠다고 하고 학교도 신고하겠다고 했다. 나는 마음을 읽고 경청하기 시작했다. 경청은 제대로 이루어졌고 효과적인 상담이 되고 있었다. 두 시간여를 그렇게 보낸 엄마는 상대 학부모와 이야기를 하게 해주겠다는 확답을 받고 돌아갔다. 문제가 해결된 것은 아니었다. 넘버원 학부모는 방치와 폭력성, 무관심으로 무장한, 대화가 어려운 부모였기 때문이었다. 그렇게 해결 방법을 모색하고 넘버원 학부모와 대화를 시도하다 퇴근했다.
퇴근 후 다시 전화가 왔다. 그 엄마였다. 엄마는 아이가 불안해하는 것 같다며 다시 이야기를 시작했다. 소리지르고 울었다. 나를 포함한 학교에 대한 원망을 쏟아냈다. 고소를 이야기했으며 언론에 제보하겠다는 협박도 했다. 나는 다시 마음을 읽었다. 어느정도 진정된 뒤 나는 내 의사 전달을 시도했다. 학폭위를 여는 건 어렵지 않다. 하지만 같은 부모 입장에서 이 학생과 대화를 하고 교육적인 방향을 고려했으면 좋겠다는 말이었다. 평소 나와의 관계를 생각할 때 충분히 가능한 이야기였다. 전달 방법도 안전하고 깔끔했다.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우리 아이는 무서움에 떨고 있을텐데 그게 말이나 돼요? 그리고 그 아이를 바른 길로 인도하기 위해서라도 이번 기회에 따끔하게 혼을 내야죠!”
그리고 소리를 질렀다. 울었다. 다시 시작 되었다. 내가 예상한 것과 전혀 다른 반응이었다. 평소에 나와의 관계를, 이 엄마의 모습을 생각하면 상상하기 힘든 일이었다. 엄마는 궤변을 늘어놓기 시작했고 폭주한 기관차처럼 내지르기만 했다.
그렇게 며칠이 반복되었고 그 집 할아버지로부터 며느리를 말리기 어렵다는 전화까지 받았다. 나중에야 관리자로부터 ‘그 엄마 별명이 작년에 XXX이었는데 올해 또 난리구먼.’이라는 말을 들을 수 있었다. 결국 학폭위가 열렸고 넘버원과 학부모는 학교폭력관련 교육을 이수하게 되었다. 넘버원의 학부모로부터 죽여버리겠다는 협박을 들었고 나도 더 이상 화를 참기 어려웠다. 일 년 동안 내가 가장 공들인 학생이었기 때문이었다. 일이 다 끝난 뒤 넘버원에게 물었다.
“교육 받느라 고생했다. 어땠니?”
“아빠가 그러더라고요. 너도 누가 건드리면 무조건 학폭 걸어버리라고. 소리지르고 울라고요. 그래서 앞으로 그러려고요.”
2. 교사의 오판
나의 실수는 크게 세 가지였다. 첫째는 학부모의 깊은 속내에 대해 고민하지 않고 내가 편한대로 믿었다는 것이다.‘근본적 귀속 오류(Fundamental Attribution Error)’. 다른 사람들도 어떠한 일에 대해 자신과 같은 방식으로 반응할 것이라고 가정하는 오류를 칭한다. 쉽게 말하면 있는 것을 보는 게 아니라 믿고 싶은 것을 보는 것이다. 나는 학부모도 나와 같이 생각하고 반응할 것이라고 ‘판단’했다. 그간의 좋았던 관계가 그 근거였다. 하지만 예상은 보기 좋게 빗나갔다.
둘째는 학부모의 신념을 고려하지 않은 것이었다. 사람마다 가지고 있는 신념이 다른데 그 차이를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신념이 달라도 행동이나 반응은 비슷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아니었다. 신념의 결이 다르면 나타나는 모습도 확연히 다르다는 것을 느꼈다.
마지막으로 학부모는 결국 나의 동료가 아니라 아이의 부모라는 걸 간과했다. 문제가 발생할 경우 교육적이고 이성적인 판단 보다는 자기 가족에게, 특히 아이에게 이로운 판단을 내리는 존재이다. 이는 부모라면 어쩔 수 없는 부분이다. 나 역시도 내 아이가 어려움에 빠지면 이성적인 판단을 내릴 수 있을 지 모르겠다. 하지만 경험이 부족했던 나는 그 순간까지도 학부모를 이성적인 존재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이성적인 대응을 했고 문제를 더 크게 만들었다. 가치 판단의 순간에 학부모는 감정의 동물이 된다.
나는 내 능력을 과신했고 학부모를 믿었다. 이 두 가지 요인이 합쳐져 참사를 만든 것이었다. 물론 그 일은 사고였다. 하지만 사고를 사건으로 만든 데는 내 책임이 컸다.
3. 한 쪽 눈을 떠야 한다.
교사는 학부모를 크게 두 가지 방식으로 대한다. 경계하거나 믿거나. 어느 쪽이든 지나치면 해롭다. 물론 같은 팀원으로서 학부모를 믿어야 한다. 하지만 한 쪽 눈은 항상 뜨고 있어야 한다. 좋은 관계가, 호의적인 태도가 나와 학부모를 동일시하는 근거가 되어서는 안 된다. 이와 같은 실수는 특히 학부모와 많이 소통하고 학급 살이에 자신이 있는 교사들이 자주 저지른다. 나 역시 그랬다. 학부모를 의심하고 마음을 열지 말라는 이야기가 아니다. 마음을 나누되 어쩔 수 없는 한계를 잊지 말라는 것이다. 사업을 할 때 좋은 파트너라고 해서 회사 회계를 맡기지는 않는다. 어디까지나 학부모는 파트너이자 의미 있는 ‘타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