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Q, 지금부터 Q 4탄] 3. 학부모는 '학부모'가 아니다.
친구 녀석에게 소개팅을 해줬다. 내심 좋아하더니 체면 때문이었을까? 괜히 뒷말을 덧붙였다.
“요즘 여자들은 말이야, 좀 계산적인 것 같아. 내가 진심을 이야기 해도 순수하게 잘 안 받아들이더라고. 그리고 또……”
달갑지 않은 친구의 ‘요즘 여자론’을 들었다. 적당히 맞장구 쳐주고 헤어졌다. 그리고 며칠 뒤 친구는 소개팅을 마쳤다. 친구의 소개팅은 성공했을까? 아니다. 실패했다. 그리고 본인의 실패담을 덧붙였다.
“거봐, 내 말이 맞지? 똑같더라니까. 아무튼 요즘 여자들 나는 참 마음에 안 들어. 계산적으로 행동하는게 눈에 뻔히 보이거든. 그리고……”
속으로 생각했다. ‘이 친구는 소개팅으로 성공하기 어렵겠구나.’ 왜냐하면 친구는 OOO이라는 사람이 아니라 ‘요즘 여자’를 만나기 때문이다.
'
1. 학부모는 '학부모'가 아니다.
비단 친구 녀석만의 문제는 아니다. 우리는 범주화하는 것을 좋아한다. 공통점을 묶어 집단을 만들고, 그 집단 자체를 평가한다. 이 방법은 장점이 많다. 상대에 대해 빨리 파악할 수 있고 대처가 용이해진다. 어느정도 타당성도 있어 효과가 나타난다. 데이터가 쌓일 수록 대인관계 기술이 능숙해진다.
이 방법이 효과를 발휘하려면 조건이 있다. 집단의 경향성을 정확하게 파악하는 것이다. 하지만 여기에 함정이 있다. 경향성은 다수의 공통점이지만 모두의 공통점은 아니다. 사실 관계에 대한 확인도 없이 예단하는 경우도 발생한다. 그리고 그 결과는 처참하다. 이는 최근 한국 사회에서 유행하는 혐오표현의 작동 방식과도 유사하다. ‘한남’이니 ‘김치녀’이니 ‘급식충’이니 집단을 규정하고 그 특성을 박제화하는 것이다. 구성원들의 개인성은 상관 없이 비하하고 프레임에 가둔다. 그래야 본인의 판단이 우월하고 적절함을 과시할 수 있기 때문이다. 불편한 이야기이지만 교사도 이 프레임 놀이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요즘 학부모들은 정말 싸가지가 없어.”
“요즘 학부모들은 자기 아이밖에 몰라.”
문제가 발생하거나 상담주간이 되면 어렵지 않게 들을 수 있는 말들이다. 물론 교사 입장에서 그렇게 표현할만한 경험적 근거가 있을 것이다.(아무 이유없이 매도하는 몰지각한 교사는 없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싸가지가 없고 자기 아이 밖에 모른다고 판단되는 것은 경험 속의 그 학부모이지 ‘요즘 학부모’들이 아니다. 오늘 만난 학부모가 싸가지가 없다고 내일 만나는 학부모가 싸가지 없는 것은 아니다. 그럼에도 우리는 끊임없이 범주화하고 프레임을 들이댄다. 왜? 그게 편리하기 때문이다. 사람과 관계를 맺고 이해한다는 것은 고단하고 복잡한 과정이다. 우리 반의 2~30명 학생의 학부모 모두와 이 과정을 거친다는 것은 엄두가 나지 않는다. 그래서 ‘~~한 학부모’, ‘~~스타일의 학부모’ 등 몇 가지 유형으로 범주화 해놓고 거기에 학부모들을 끼워 맞추는 것이다. 교사의 이기심 때문이 아니다. 생존을 위한 몸부림에 가깝다. 하지만 부작용은 분명하다. 인간은 자신이라는 존재 자체로 인정받고 싶지 신분이나 집단의 일부분으로 대접받고 싶지 않다. 그것이 인간의 본능이다. 그들도 학부모이기 전에 비슷한 연배의 성인이다. 개인성을 인정하고 그사람 자체로 만나는 것, 그것이 학부모를 존중하며 만나는 방식이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었을 때
그는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
- 김춘수
2. 학부모는 학생도 아니다.
아이에게 가장 큰 영향을 미치는 타인은 부모다. 이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그래서 흔히들 ‘아이를 보면 부모가 보인다.’고 말한다. 어렸을 때는 이 말 자체가 세상에 찌든 편견 같아 혐오스러웠다.
‘그럼 개차반 부모 밑에는 개차반 아이 밖에 없다는 말이야?’
사실 일면 타당하다. 학생이라는 존재는 역사를 담은 하나의 생명체다. 태어날 때부터 가지고 난 본성도 있지만 길러지고 만들어진 부분이 훨씬 더 크다. 그리고 그건 가정에서부터 시작된 것이다. 그래서 통계적으로도 어릴 때 애착 관계를 맺지 못했거나 학대 받은 아이들은 학교 생활에 잘 적응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지나치게 엄격한 학부모의 양육 태도는 학생으로 하여금 두려움을 많이 가지게 한다.
하지만 우리는 이 논리적 연결에 쉽게 기대는 경향이 있다.
(소위 말하는)문제 학생 = from 문제 학부모’라는 등식은 성립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앞에서 언급했 듯 학생은 역사를 담은 존재이기 때문이다. 그 역사는 부모가 만든 부분도 있지만 본인의 타고난 기질, 아울러 학교나 사회에서의 상호작용에 의해서도 영향을 받는다. 그걸 교사도 알지만 당장에는 학부모만 보인다. 그래서 학부모에게서 원인을 찾는다. 이런 접근이 문제가 되는 이유는 협력이라는 가치보다는 논리싸움에 치중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교사와 학부모는 하나의 팀인데 시너지 효과를 내지 못한다.
학부모가 학생이 아니라는 건 또 다른 의미도 있다. 학부모를 가르치려 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그들은 성인이다. 타인의 허락없이 도움을 주고 가르치려 하는 것, 그것을 우리는 ‘꼰대짓'이라고 한다. 교실에서도 가르침이 아닌 배움을 강조하는 마당에 학부모들을 가르치려 하는 건 어불성설이다. 물론 교사의 눈에는 더 나은 방법이 보인다. 길을 안다. 하지만 그것을 원하는 건 학부모의 선택이다. 학부모와의 대화는 들어주고 도와줄 뿐, 가르쳐서는 안 된다.
어려운 점은 이 두 가지 모두 경력자들이 빠지기 쉬운 함정이라는 것이다. 경험이 쌓일수록, 소위 노하우가 생길수록 유혹에 사로 잡힌다.
3. Now & Here
그럼 어떻게 접근해야 할까? 정답은 기본으로 돌아간다.
Now & Here
지금 여기, 그 사람을 만나는 것이다. 지식과 경험은 내 대응력을 높이는 참고 도구일 뿐이다. 예단하지 말고 벽을 쌓지 말고, 그렇다고 방심하지 말고 그 사람과 관계를 맺어야 한다. 백 명의 학부모에게는 백 가지의 유형이 있다는 믿음으로 만나자. 그래야 더 실질적이고 유연한 관계를 만들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