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Q, 지금부터 Q 4탄] 2. 학부모를 대하는 우리의 자세
학부모와의 대화에 관한 연재를 시작한다. 주체는 둘이다. 학부모, 그리고 교사. 그래서 이 둘의 관계를 먼저 설정해볼까 한다.
교사에게는 수많은 ‘나의 학생들'이 있다. 그리고 그 숫자 만큼의 학부모가 있다. 인간 관계가 그러하듯 교사와 각 학부모의 관계는 다 다르다. 어떤 학부모와는 사이가 좋고 편안하지만 또다른 학부모와는 껄끄럽다. 발신번호에 이름이 뜨면 두근거리는 학부모가 있고 어려운 부탁을 해야할 때 생각나는 학부모도 있다. 교사는 다양한 관계 속에서 데이터를 얻어 판단을 하고 어떤 경향을 형성한다. 그리고 그 경향은 굳어서 신념이 된다. 그게 바로 그 교사의 학부모관이다.
[권위주의]
한 선배 교사가 나에게 물었다.
“학부모들이랑 잘 지내는 거 같던데 대화 하는 거 어렵지 않아?”
“개인적으로는 그다지 어렵지 않아요. 그냥 편하게 하는 편이거든요.”
“공부하고 이런 것들이 도움이 되나봐. 그런데 학부모가 아주 개차반이라도 그런게 통해?”
다소 과격한 단어가 나와 나도 모르게 반응했다.
“어떤 말이나 행동 때문에 그렇게 생각하셨어요?”
“애가 아주 개판이야. 부산스럽고 남에게 피해주고. 그래서 내가 상담 때 이야기를 했지. 바로 잡아야 할 것 아냐?”
“어떤 말씀이요?”
“이러이러 하다. 그러니 집에서도 제대로 교육을 해야 한다. 그랬더니 아주 눈에 쌍심지를 켜고 나한테 대드는데, 우와…… 아주 개차반이야 개차반. 그래도 내가 담임인데 도움 되는 말 한 마디 했다고 그렇게 대드냐고.”
표정과 말투에서 괘씸함이 생생하게 전달되었다. 이런 교사들은 권위주의적인 학부모관을 가지고 있을 가능성이 높다. 군사부일체가 사회적으로 통용되던 우리네 학창 시절과 다르지 않다. 자녀의 스승인 본인이 학부모 보다 위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본인이 생각하는)’바른 길'로 강력하게 학생을 이끌려고 하며 이를 학부모에게 까지 적용한다. 본인이 권위를 갖춘 전문가이니 학부모는 잘 따라야 한다는 것이다.
이런 분들이 즐겨하는 표현이 있다. ‘옛날 학부모들은', ‘요즘 학부모들은 정말'. 경력이 높은 교사들은 까마득한 옛날 학부모 관계를 미화한다. 그들이 얼마나 헌신적이었고 학교를 위해, 교사를 위해 충성했는지. 학부모를 나쁘게 표현하면 계몽의 대상 정도로 여기는 것이다.
권위주의적인 교사들이 학부모와의 관계에서 활용하는 가장 큰 무기는 힘이다. 학부모와는 수직적인 관계라고 인식한다. 그리고 관계적인 힘을 통해 학부모를 누르려 한다. 학부모를 ‘다루는 기술'이 큰 자부심이며 학부모에게 ‘굽신굽신하는’ 동료들이 못마땅하다. 끊임없이 평가하고 재단한다. 그렇게 학부모라는 존재를 소비하는 것이다.
[서비스주의]
하루는 퇴근 무렵이었다. 우연히 후배 교사가 무언가를 열심히 하는 것을 발견했다.
“뭘 그렇게 열심히 해요?”
“아, 학부모님이 뭘 부탁하셔서요.”
“부탁이요?”
열심히 학급 홈페이지를 뒤지는 모습에 궁금해졌다. 후배는 홈페이지의 사진들을 보면서 무언가를 세고 있었다.
“뭘 세는 거에요?”
“아, 학급 사진에 본인 자녀가 잘 안 나오는 것 같다고 확인해달라고 하셔서요. 그거 하고 있어요.”
순간 내 귀를 의심했다. 사진 속의 특정 학생 등장 횟수를 세고 있다는 이야기였다.
“그걸 왜 선생님이 해요? 그건 아닌 것 같은데요.”
“그럼 어떡해요, 강력하게 말씀하시는데요.”
후배는 서비스에 매몰 되고 있었다. 이런 서비스주의 학부모관을 가진 교사는 학부모의 만족을 최우선 기준으로 삼는데 특히 교육 활동에 열정적인 교사들에게서 많이 나타난다. 이들은 학부모와의 소통에 적극적이고 좋은 관계를 만들고 싶어 한다. 동시에 그들에게 좋은 교사로 인정 받고 싶은 욕구가 크다. 그러다 보니 학부모들이 점차 많은 요구를 하게 되고 교사는 그걸 충족시키려 노력한다. 원칙보다는 ‘좋은 것'에 무게 중심이 쏠려 있다.
문제는 단호하고 명확한 선을 긋지 못한다는 것이다. 그러다 보니 대화를 할 때면 ‘네, 네, 맞아요’, ‘그렇죠.’라는 동감의 표현을 많이 쓰며 끌려 간다. 대화가 끝나면 이상하게 학부모의 욕구는 충족되어 있지만 교사의 욕구는 충족되지 않은 경우가 많다.
이들이 학부모와의 관계에서 활용하는 도구는 ‘친절'이다. 친절함으로 좋은 관계 만들기를 넘어 본인의 욕구를 충족시키려 한다. 학부모에게 인정 받으려 하고 가상의 부채 의식을 만든다. ‘내가 이렇게 까지 했는데'라는 본전 생각이 무의식 속에 자리 잡고 있다. 그래서 학부모와의 관계가 틀어지면 배신 당했다고 느끼며 아예 단절하는 경우도 있다.
[비즈니스주의]
지금은 통하지 않을 속담이 있다. ‘처가와 뒷간은 멀수록 좋다’ 뒷간이 가까우면 냄새가 고약하듯 처가가 가까우면 처갓집의 입김이 강해지다는 의미를 담은 속담이다. 가부장적인 이 속담은 이미 화석화 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하지만 학교에서는 비슷한 말이 진리 처럼 살아 꿈틀댄다.
‘학부모와의 거리는 멀수록 좋다'
이런 교사들은 학부모와의 관계를 철저히 비즈니스적으로 본다. 업무상의 관계일 뿐이며 그 이상의 의미를 두지 않는다. 가급적 접촉을 줄이고, 무언가를 생산하기 보다는 문제를 만들지 않는 것에 집중한다. 교사와 교실에 대한 정보를 제공하지 않는다. 빌미를 없애는 것이다. 학부모와 인간적인 관계를 맺는다는 것은 어리석은 짓에 불과하며 감정은 철저히 배제된다. 무미건조함이 안전을 만든다고 믿는다.
이들이 학부모와의 관계에서 활용하는 무기는 ‘팩트'다. 소송을 대비해 데이터를 모으 듯 혹시 모를 학부모와의 분쟁을 위해 팩트를 모은다. 상담 기록, 수업이나 학급 살이 결과 등이 지향하는 방향도 면피에 가깝다. 부정적이고 소극적인 의미의 ‘적자생존(적어야 산다)’에 치중하는 것이다.
[끝없이 변한다]
앞서 경향이 신념을 만든다고 했다. 하지만 하나의 경향만을 가진 사람은 거의 없다. 경험과 상황에 따라 수시로 변한다. 서비스주의로 다가갔다 상처를 입은 뒤 비즈니스주의로 돌아서거나 권위주의로 회귀하기도 한다. 교사의 성격도 영향을 미치지만 더 큰 영향을 미치는 것은 상황과 경험이다. 이 경향성은 저절로 형성되기도 하지만 교사의 노력에 따라 바꿀 수 있다. 성격처럼 변하지 않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학부모를 대하는 신념을 결정할 때 고민해야하는 것이 있다.
‘과연 내가 얼마나 에너지를 쏟고 어느 정도까지 개입할 것인가?’
이에 대한 냉철한 분석과 결정이 필요하다. 어설프게 낭만적으로 접근하거나 보수적으로 물러나면 실수를 할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현명한 선택이 건강한 학부모 관계를 만든다.
아울러 앞서 언급한 학부모관들을 넘어서는 신념이 필요하다. 서비스를 하되 명확한 한계와 선을 전달할 수 있어야 한다. 교사 자신의 상황을 살펴 학부모에게 평화적으로 표현할 수 있어야 한다. 서로에 대한 평가나 비판보다는 발전과 협력에 초점을 두는 것이 좋다. 아이의 성장을 지원하는 팀이라는 공감대를 만들 수 있어야 한다. 그것이 바로 파트너십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