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Q, 지금부터 Q 번외편] 10. 싫은데요?
본디 일이란 게 배려심이 없다. 감당할 수 있을 만큼 순차적으로, 체계적으로, 짜임새 있게 찾아오면 좋겠지만 그런 적은 거의 없다. ‘언제나’라고 해도 좋을 만큼 적거나, 몰아친다. 그날도 그런 날이었다. 가을 운동회 준비 막바지에 학년 SNS 싸움 조사, 그리고 공개수업 지도안 마감에 온갖 제출 서류들이 몰려들었다. 공교롭게도 전담 수업도 없었다. 이럴 때면 긴장이 된다. 나는 긴장을 잘 하지 않지만 디테일과 신중함에 약해 몰아치는 것을 잘 해내지 못한다. 그러다보니 실수를 할까봐 날카로워진다.
아침시간, 쉬는 시간, 그리고 수업 시간의 일부를 바쁘게 달린 뒤 점심시간을 맞이했다. 하지만 쉴 수 없었다. 급하게 밥을 먹고 다시 컴퓨터와 한 몸이 되어 갔다. 정신없이 지도안을 수정하는데 낯선 녀석이 찾아 왔다.
“저희 선생님께서 이거 전해달라고 하셨어요.”
학생이 내민 건 집계표였다. 나는 자료를 다시 확인한 뒤 다음 담당자에게 전달하려했다. 시간이 촉박했기에 그 먼 곳을(다른 건물이었다.) 내가 갈 수는 없었다. 교실을 한 번 둘러보니 여학생 셋이 공기놀이를 하고 있었다. 나는 시선을 모니터에서 떼지도 못한 채 말했다.
“민지야, 이거 4학년 6반에 좀 가져다 드릴래?”
“네?”
민지가 알아듣지 못한 것 같아 다시 한 번 말했다.
“이 서류 신관에 있는 4학년 6반에 좀 전해주라.”
“......”
이번에는 대답이 없었다. 이상함을 느낀 나는 모니터에서 눈을 떼고 민지를 보았다. 민지는 특유의 뚱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선생님이 너무 바빠서 그래, 부탁 좀 하자.”
그 순간에도 파일 제출을 재촉하는 메시지가 날아오고 있었다. 황급하게 첨부 파일을 열 때였다.
“싫은데요?”
나는 반사적으로 미간을 찌푸렸다. 민지는 입술이 몇 센치는 나왔을 만큼 더 뚱해진 표정이었다. 기분이 좋지 않았지만, 급했기에 위트로 대응했다.
“야~ 그러지 말고 한 번만 부탁해~ 선생님 진짜 급하단 말이야. 응?”
“저도 지금 이 공기놀이가 급해요. 딴 애들한테 부탁하시면 되잖아요.”
민지의 말을 듣는 순간 나도 모르게 인상이 굳었다. 잠시 침묵이 흘렀고 내 입에서 한숨이 나왔다. 그리고 나도 놀랄 만큼 건조하고 차가운 목소리가 나왔다.
“그래, 알았어. 지훈아! 이리 좀 와봐.”
마침 교실 뒷문으로 들어오던 지훈이를 불렀다. 아니 소리 질렀다.
“이거 4학년 6반에 갖다 드려.”
이번에는 반응을 기다리지도 않고 다시 컴퓨터에 얼굴을 묻어 버렸다. 지훈이는 터덜대며 먼 길을 떠났다.
그렇게 헉헉대며 일을 하고서야 퇴근 10분 전에 숨을 돌릴 수 있었다. 출근 후 처음으로 의자 등받이에 기대었다. 아까 민지와의 대화 장면이 떠올랐다. 민지는 왜 내 부탁을 거절했을까? 아니, 나는 왜 그랬을까? 내가 느낀 감정을 뭐였을까?
여유가 생기자 상황이 제대로 보이기 시작했다. 우선 민지가 내 부탁을 거절한 건 말 그대로 공기놀이가 중요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나에게 도전하고 싶거나 악감정이 있어서는 아니었다. 그건 그 뒤의 수업 시간이나 하교 시간의 태도로 알 수 있다. 문제는 나였다. 나는 부탁을 한 게 아니라 지시를 한 것이었다. 정중하고 부드럽게 말했지만 분명히 지시였다. 아니, 물음표까지 붙은 저 문장이 왜 지시였을까? 거절을 받아들이지 못했기 때문이다. 부탁은 상대의 선의에 기대는 것이다. 따라서 수락 여부는 오롯이 상대가 결정한다. 동시에 부탁하는 사람은 결과를 그대로 받아들여야 한다. 하지만 나는 ‘거절하지 않겠지.’라는 생각을 품고 부탁을 했다. 그래서 거절이 낯설고 당황스러웠다. 이 순간 나의 부드럽고 정중한 말투는 거절하기 어렵게 하려는 도구에 불과했던 것이다. 이면에는 그동안 내가 들인 노력, 만들어진 관계에 대한 자신감과 보상 심리가 있었다. 아울러 그토록 없애려고 노력했던 권위 의식의 그림자도 한 몫 했다. ‘선생님이 부탁하는데 학생이 거절하지는 않겠지.’라는 권위 의식. 부끄러워졌다.
그럼 왜 이토록 부끄럽게 반응했을까? 답은 금방 알 수 있었다. 조급함. 주변의 상황과 제한된 시간이 만들어내는 압박 속에서 나는 조급했다. 조급하다보니 얕게, 급하게 판단하고 반응했던 것이다. 내가 무엇을 알고 할 수 있는 지보다 내가 어떤 상태인지를 깨닫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을 다시 한 번 느꼈다.
다음 날 아침, 나는 민지를 불렀다.
“민지야, 어제 쌤이 너 공기놀이 하느라 바쁜데 여러 번 심부를 시키려고 해서 미안하다. 예상 못했는데 니가 거절하니까 당황스럽더라고. 얼마든지 거절할 수 있는 건데 말이야.”
“네? 아, 괜찮아요. 그럴 수 있죠 뭐.”
민지는 쿨하게 사과를 받아주었다. 나는 제자지만 민지의 대범함에 다시 한 번 놀랐다. 그렇게 일은 훈훈하게 마무리 되었다.
그 뒤로 나는 ‘진짜 부탁’에 익숙해지려 노력 중이다.
“민지야, 협의실에서 8절 도화지 좀 가져다 줄 수 있을까? 우리 나중에 국어 시간에 써야하거든.”
“선생님, 저 지금 그림에 집중했거든요. 곤란해요.”
“그래? 알았어. 솔직하게 말해줘서 고마워. 누구 선생님 도와줄 수 있는 사람?”
@관련 글 : [NQ , 지금부터 Q] 11. 부탁제대로하기
https://www.educolla.kr/bbs/board.php?bo_table=Author_DoDaeyeong&wr_id=30&page=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