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월 스승의 날 특집] 나는 독립군 사단입니다.
매년 5월 15일은 스승의 날이다. 대한민국에서 분투하는 선생님들을 위한 작은 위로이다. 전국에는 선생님들의 숫자만큼 다양한 스승의 날이 있다. 내심 학생들의 환대를 기대하며 학교를 향하기도 하고 세상의 시기, 질투에 차라리 휴업일로 지정하기도 한다. 아무튼 대다수의 선생님들이 학생들이 준비한 작은 마음을 받은 뒤에는 '설마 수업을 하시겠어?'라는 초롱초롱한 무언의 압박을 받게 마련이다. 그럴 때면 교사는 '고맙다.'라는 말 외에 다른 어떤 마음을 전하고 싶어진다.
나는 매년 스승의 날이면 아이들에게 들려주는 이야기가 있다. 바로 내가 교사가 된 이유, 나의 스승에 관한 이야기이다.아이들에게 나는 절대 권력을 지닌 큰 어른으로 보일 뿐 나 또한 똑같이 학창 시절을 거쳤다는 것을 상상하지 못한다. 그래서 나의 어린 시절 이야기를 들려줄 때면 아이들은 호기심 어린 얼굴로 그 어느 때보다 집중하기 마련이다.
부모님을 교사로 둔 나는 교사가 되고 싶은 생각이 전혀 없었다. 세상의 시선과 달리 얼마나 힘들고 지난한 직업인지 가까운 곳에서 봐왔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고2 때 정종호 선생님을 만나며 인생이 바뀌었다.
전교에서 가장 유명한 '독립군'이라는 별명을 가진 카리스마 가득한 선생님과 전교에서 내노라는 사이코, 개구쟁이들이 모인 반. 드라마틱한 일들의 연속이었다. 독립군이라는 별명이 붙은 이유부터 다양한 전설적인 사건을 가지신 선생님과의 만남은 공포로 시작되었다. 둘째 날 야간 자율학습 때 운동장에서 모두 엎드려 야구 방망이로 엉덩이를 맞는 것을 시작으로 카리스마 VS 똘끼의 시너지가 불꽃 튀듯 날아다녔다. 한참 반항 가득한 시기에 자칫 권력 대결의 소용돌이 몰아칠 수도 있었지만 우리는 점점 선생님에게 빠지기 시작했다. 무뚝뚝하고 때리고 구박하지만 우리를 '내 새끼'라는 생각으로 품는 모습을 인정했기 때문이었다.
#1
가을 무렵이었다. 우리 반은 행정실 청소를 맡고 있었다. 당시 행정실장은 재단의 친인척이었기에 교사나 학생을 본인 아래로 생각하고 안하무인이었다. 그날도 친구 하나가 청소를 하고 있었다. 그런데 친구가 떠들고 제대로 청소를 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행정실장에게 뺨을 맞았다. 친구는 억울했지만 어쩔 수 없이 교실로 돌아왔다. 하지만 친구의 상태를 선생님은 바로 알아보셨고 친구는 자초지종을 털어놓았다. 그러자 선생님께서는 '한 번만 참아라. 대신 다음에도 그런 일이 생기면 내가 책임질게.'라고 하셨다. 우리는 '아, 선생님도 어쩔 수 없구나.'라고 체념했다. 사립 고등학교라는 곳은 그런 비합리적인 권력관계가 판치는 곳이니까.
그리고 며칠 뒤 똑같은 사건이 일어났다. 행정실장이 또 다른 친구를 이유 없이 때리고 발로 찼고 선생님께서 알게 되셨다. 우리는 우리 선생님도 어쩔 수 없다는 것을 알기에 안타까운 마음으로 고개를 돌리려는데 갑자기 선생님께서 성큼성큼 밖으로 나가셨다. 그리고는 곧장 행정실로 향했다. 아이들은 뭔가 일어날 것 같은 예감에 따라갔고 행정실 안에서는 고성이 오갔다.
"니가 뭔데 내 새기 때리노? 오늘 니나 내 중에 하나 그만두는 기다!"
"어? 어?"
일개 교사의 예상치 못한 공격에 행정실장은 당황했고 처음에는 고자세로 나가다 나중에는 어쩔 줄 모르는 상황이었다.교감 선생님에 교장 선생님까지 달려오셔서 선생님을 진정시켰고 그제야 상황이 마무리되었다. 우리는 믿을 수 없는 광경에 입을 다물지 못한 채 서둘러 교실로 돌아왔다.
#2
그 뒤 얼마가 지났을까? 자율 학습을 하던 중 친구 하나가 문을 열며 소리쳤다.
"야, 우리 쌤 담배 피우신다!"
"뭐?!"
우리는 놀랐다. 왜냐하면 선생님과 아이들 사이에 금연 내기가 진행되고 있었기 때문이다. 아이들인 담배를 피우면 10만 원 벌금, 선생님이 담배를 피우시면 우리 반 전체에게 맛있는 것을 쏘기로. 말한 것을 지키는 선생님의 성격을 알기에 담배를 피우셨다는 것은 충격적인 사건이었다. 하지만 뒤에 그 친구가 들려 준 이야기는 더 충격이었다.
행정실장이 아까 일을 정식으로 사과하러 왔고 선생님은 사과를 받기로 했다. 그렇게 이야기가 오갔고 행정실장이 사과의 의미도 담배를 한 대 건넨 것이다. 차마 그것을 거절할 수 없었던 선생님은 받아 피신 것이다.
잠시 뒤 선생님께서 교실에 들어오셨고 우리는 사정을 뻔히 다 알면서 선생님을 놀리고자 말했다.
"에~~~ 선생님, 담배 피우셨어요?"
"피셨죠? 우와, 약속하시고서는?"
선생님의 당황하는 모습과 변명을 듣고자 했던 우리는 기대 어린 눈빛으로 쳐다봤다. 하지만 대답은 예상 밖이었다.
"그래 핐다."
헐? 이게 뭐지?
그리고 며칠 뒤 선생님은 우리를 다 데리고 뷔페를 쏘셨다.
#3
옆 반 선생님은 담임선생님을 좋아하는 우리 반의 모습에 묘한 질투심을 가지고 계셨다. 그래서인지 가끔 우리 반을 기웃거리시며 날카로운 시선을 날리시고는 했다. 그러던 어느 날 그 옆 반 선생님께서 우리 반에 들어오시더니 최신 휴대폰을 사셨다며 자랑을 하기 시작했다. 우리는 심드렁하게 쳐다보고 있었는데 마지막 한 마디가 자존심을 건드리고 말았다.
“느그 선생님은 이런 거 없드라, 그쟈?”
‘아, 진짜 유치하게 뭐야?’하고 살펴보니 정말 우리 선생님은 낡디 낡은 핸드폰을 쓰고 계셨다. 거기다 차는 아주 오래된 구아O을 타고 다니셨다. 그럴만 했다. 선생님은 선배들 때부터 어려운 선배가 있으면 학비, 식비를 내주시고 집안에 문제가 있으면 본인의 집으로 데려가서 몇 달을 학교를 데리고 다니셨으니까. 주말에는 봉사 / 기부 활동까지 하시니 교사 박봉에 여유로운 생활은 꿈꾸기 힘드셨으리라.
“아 놔! 자존심 상하게. 야, 우리 독립군이 이런 대접을 받아서야 되겠나!”
“그러게! 쪽팔리게!”
그 길로 우린 만장일치로 반 전체 학생들이 돈을 걷어 최신 휴대폰을 하나 샀다. 그리고 그걸 선생님께 선물로 드렸다.
“이기 뭐이고?”
“쌤! 우리가 쪽팔려서 안 되겠어요. 이거 쓰세요!”
선생님은 어이없어 하셨으나 결연한 우리의 태도에 결국 승낙하셨고 대신 십 년은 쓰겠다고 약속을 하셨다. 그리고 그 뒤에 매년 우리가 찾아뵈었을 때 이제는 낡아버린 그 핸드폰을 십 년 가까이 쓰고 계셨다.
#4
졸업을 하고 대학교 때는 매년, 교사가 되고 나서도 2~3년에 한 번은 학교로 찾아뵙는다. 대학생이 되고 처음 찾아뵈었을 때였다. 복도에 들어서며 괜시리 감격에 젖어 있는데 멀리 선생님이 보이셨다.
“선생님! 저희 왔습니다!”
우리가 반가우셨는데 멀리서 씩~ 웃으시며 손짓을 하시는 선생님의 모습이 보였다.
“선생님, 정말 뵙고 싶었......”
그 순간이었다. 씩 웃으시던 선생님은 귀를 잡고 끌고 가기 시작하셨다.
“이 시키! 머리가 이게 뭐이고? 따라 오이라!”
“아아아~~~”
쌤, 저희 고딩이 아니라 대딩..... 학생부로 끌려간 우리는 웃으며 꿀밤을 맞고 이야기꽃을 피우기 시작했다. 선생님의 유행어 “이 시키!”, “엎드리라!”, “따라 오이라!”가 폭발했다. 그제야 선생님께서 마지막에 해주신 말씀이 떠올랐다.
“느그가 내 품을 떠난다고 끝나는 게 아니다. 쌤이 살아 있는 한은 느그는 내 새끼고 잘못된 길을 가면 내가 다 잡아와서 직이뿐다, 알았제!”
단순한 일 년의 관계가 아니라는 게 따뜻하고 고마웠다.
#5
졸업 후 선생님과 술 한 잔을 기울일 때면 깜짝 깜짝 놀란다. 졸업한 친구들, 선배들의 근황을 우리보다 더 상세하고 알고 계시기 때문이다.
“OO이는 군대 갔다 오더니 늦바람이 들어가지고 무슨 외무고시를 준비한다고!”
“XX이는 끈기가 있는 스타일이라 고시 공부 잘 하고 있더라.”
스마트폰도 잘 못하시는 양반이 제자들이 어떻게 살아가는지, 이 세상에서 어떤 역할을 하고 있는지 살피고 응원하고 꾸짖어주신다.
내가 임용 고시를 치를 무렵이었다. 최악의 TO 발표가 나는 순간 절망감이 전 교대 4학년을 휘감았었다. 그 때였다. 선생님께 전화가 왔다.
“도대야! TO 났는데 쪼금 어렵다매?”
“네, 선생님. 고민입니다.”
“도대야! 강원도건 제주도건 어디든 가라. 선생한다는 놈이 편한 거 찾고 지역 가려가면서 하면 안 된다. 애들이 있는 곳이면 그곳이 니가 있을 곳이지! 그리고 쌤은 무식해서 느그를 때리기만 했지만 니는 다를 거다. 더 똑똑하고 좋은 방법을 잘 찾아서 더 훌륭한 선생 되어라. 끊는다!”
지금도 이 말은 내 교사 생활의 모토로 자리 잡고 있다.
내가 교사로서 가지고자 하는 자질, 자신의 말과 행동에 책임을 지고 말이 아닌 행동으로 교육하는 것. 그리고 아이들을 내 새끼로 생각하고 품는 것은 바로 그분의 영향이었고 내가 그렇게 가기 싫었던 교직의 길로 나가게 된 것이다.
이 이야기를 들려주고 나면 아이들은 무척 신기해한다. 그리고 흥미를 가지고 좋아한다. 나의 삶의 모습이 단 한 명에게 말이라도 내가 정종호 선생님께 받은 영향만큼 영향을 미친다면 나는 성공한 스승이라 말할 수 있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