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술가 함께읽기] 천년의 화가, 김홍도 (2)
조선의 화가하면 누구나 첫째로 떠올리는 김홍도.
그는 당대에도 그림을 잘 그리기로 소문난 천재이었습니다.
당시 그림 천재는 어떤 대접을 받았을까요?
#4 홍도의 현실
그가 어용화사로 멋지게 그림을 그리자, 상으로 벼슬이 내려왔습니다.
하지만 그 벼슬은 도화서에서 그림을 그리는 일이 아니었습니다.
궁중에 들어가면 실컷 그림을 그릴 수 있을 거라 여겼던 홍도의 기대와 달리
그는 평생 그림과 관련없는 부서의 하급관리 신세였습니다.
김홍도가 처음으로 맡은 직책은 사재감이었습니다.
궁중의 식료품을 관리하는 직책이었는데 심지어 무봉급이었습니다.
그리고 둘째로 맡게된 직책은 울산에서 말을 관리하는 감목관이었습니다.
타지에서의 관리 생활은 쉽지 않았지만, 그와중에도 홍도는 사람들의 삶을 눈여겨봅니다.
말보다도 못한 취급을 받는 평민들의 삶을 보며 홍도는 가슴이 아팠습니다.
그림으로 남기는 게 자신이 할 수 있는 최고의 일이라 생각한 홍도는 위와 같은 그림을 남겼습니다.
감목관을 마치고 돌아온 홍도는 그 후에도
무봉급으로 한강의 얼음을 동빙고에 저장하는 일을 하기도 하고,
꽃 다루는 장원서, 채소 다루는 사포서에서 일하기도 했습니다.
낮에는 나라의 관리로, 저녁에는 사람들이 요청한 그림을 그려주며 생계를 꾸렸습니다.
홍도의 삶은 줄곧 이상과 현실 사이의 줄타기였습니다.
홍도는 풍류를 즐기는 삶을 꿈꾸며 왼쪽과 같은 자화상을 그렸습니다.
하지만 동시에 관리로서의 일과 궁중화가로서 요구되는 형식적인 그림을 그렸지요.
#5 일만이천봉을 보고 그리다
단원의 나이 43세, 그는 정조의 부름을 받습니다.
산수화를 능히 그리는 김응환과 함께 금강산을 그려 올 것을 명 받은 것이죠.
강원도 동쪽에 있는 9군 중 군사적으로 주요한 곳의 지형을 그려오는 것이 그들의 임무였습니다.
더불어 간김에 정조가 머리를 식힐 때 볼 수 있도록 금강산도 그려오라는 명을 받았습니다.
여정은 강원도를 거쳐 금강산으로 들어가는 과정이었습니다.
당시 양반들의 소원 중 하나는 바로 금강산을 여행하고 오는 것이었다고 합니다.
하지만 금강산으로 떠난 김홍도와 김응환의 마음은 편치만은 않았습니다.
평생 보기힘든 절경을 그린다는 기대만큼 왕명을 성공적으로 수행해야 한다는 부담이 컸기 때문입니다.
금강산행에 많은 예산과 시간이 주어진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렇기에 둘은 빠르게 구석구석을 누벼야 했고 서둘러 그림을 그렸습니다.
게다가 왕명으로 그리는 것이니 정확하면서 아름답고 기품있는 그림이어야 했습니다.
저는 금강사군첩을 보고 정말 놀랐습니다.
이전에 홍도의 그림하면 풍속화만 떠올렸는데, 산수화도 놀랄만큼 잘 그렸기 때문이죠.
그리고 스페인에서 피카소 박물관에 방문했을 때가 떠올랐습니다.
스페인 피카소 박물관에는 피카소가 어릴 적 그렸던 그림들이 있습니다.
그곳에 가면 피카소가 남들과 다른 그림을 그릴 수 있었던 건, 이미 어릴 때부터 사실적인 그림을 열심히 그려 기본기를 다졌기 때문임을 알 수 있습니다.
홍도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그가 풍속화를 잘 그릴 수 있었던 건, 그저 천재이기 때문이 아니라
성실하게 실력을 쌓아가며 산수화에서도 뛰어난 기량을 발휘했기 때문입니다.
금강산 강행군 중에 그는 그림에 자신의 흔적을 남기기도 했습니다.
「명경대」에 그려진 양반들의 모습에서 우리는 절경에 폭 담기고 싶었던
홍도의 모습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영원암」에서도 김응환과 김홍도의 모습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너른 바위에 앉아있는 둘을 보니 일만이천봉의 절경을 바라보며 그림을 그렸을 그들이 부럽습니다.
세계 구석구석을 누비지만 가까운 금강산에 갈 수 없는 대한민국 국민으로서 금강산 기행은 그림으로 대신할 수밖에 없으니까요.
#6 굶주리고 병든 노년
단원은 생애 동안 쉴새 없이 그림을 그렸습니다.
금강산에 다녀오고 나서는, 조정나리들의 그림 요구가 더 많아졌지요.
덕분에 생활은 조금 윤택해졌지만, 몸은 점점 약해졌습니다.
금강산행 때 고생한 여파로 2년 뒤 크게 폐렴을 앓았고,
그와 같이 금강산에 갔던 김응환도 몸이 쇠약해져 얼마 뒤 죽고 말았지요.
사실 홍도의 꿈은 거창한 게 아니었습니다.
자신의 집에서 소중한 사람들과 음악과 술을 나누는 것,
그리고 이야기하며 그림을 그리는 것이었지요.
홍도는 어릴 적 스승 강세황이 머물던 곳의 지명인 '단원'을 따
자신의 집을 '단원'이라 칭하고 자신의 호도 '단원'으로 정했습니다
하지만 단원에서의 꿈같은 세월도 오래가지 못했습니다.
그가 충청도 연풍현감의 자리에 오른 것입니다.
그가 세 번째 어진 작업으로 정조의 얼굴을 그렸기에 내려진 벼슬이었습니다.
중인 출신인 단원에겐 과한 벼슬이었으나, 한양에서의 생활을 내려두고 떠나야한다는 아쉬움도 있었을 것입니다.
인생사 새옹지마라지요. 홍도 인생 최고의 관직이 도리어 그의 발목을 잡습니다.
현감으로서 지내면서 마을의 처녀 총각의 중매를 봐준 일, 꿩 사냥을 나간 일을 두고 외유사(암행어사와 비슷한 직책)가
그의 죄를 물은 것이지요.
홍도는 관직에서 박탈당하고, 이 때문인지 정조가 수원 화성 능행도를 그릴 때 어용화사인 김홍도를 부르지 않았습니다.
단원 51세, 그는 점점 자신의 자호대로 취화사가 되었습니다.
그림을 그린 돈으로 모조리 술을 사먹었습니다.
삶의 구렁텅이에서 술에 허우적댈수록 그의 몸은 약해졌습니다.
홍도 나이 예순, 그는 제자 박유성이 있는 전주로 내려갑니다.
고질병인 폐렴을 앓는 홍도에게 남은 건
술에 취한 몸과 열두살밖에 안된 어린 아들 뿐이었습니다.
전주로 내려간 홍도가 한양에 있는 아들에게 쓴 편지를 읽으면 천재 화가 김홍도의 말년이 어땠는지 짐작할 수 있습니다.
날씨가 차가운데 집안 모두 편안하고 너의 공부는 한결 같으냐? 나의 병세는 어머니께 보내는 편지에 이미 다 말하였으므로 다시 말할 필요가 없을 뿐이다. 김동지도 찾아가서 이야기했으리라 생각한다. 너의 선생님께 보내는 월사금을 보낼 수 없어 탄식한다.정신이 어지러워 더 쓰지 않는다. 12월 19일에 아버지가 쓴다. 이충렬 - 「 천년의 화가 김홍도」 (444) |
조선의 천재 화가였다가, 아들의 월사금도 내지 못해 탄식하는 신세가 된 김홍도.
그의 말년을 곁에서 지켜본 심상규는 다음과 같은 글을 남깁니다.
화사 김홍도가 굶주리고 병들어 먹을 것을 위해 여기에 왔습니다. 이 사람은 이 시대에 재주가 훌륭한 사람인데 그 곤궁함이 이와 같습니다. 우리나라는 인재가 살기에 적합하지 않은 것 같습니다. 이충렬 - 「 천년의 화가 김홍도」 (444) |
김홍도하면 그의 풍속화에 넘쳐흐르는 재치를 떠올리는 우리로서는
재주가 훌륭함에도 곤궁하게 삶을 마감한 홍도의 마지막이 더욱 생경하고 가슴아프게 느껴집니다.
#NEXT. Who is that?
두 번에 걸쳐 우리나라 최고의 화가, 김홍도에 대해 알아봤습니다.
다음 미술사 함께읽기에서는 반대편으로 넘어가 서양의 미술가를 만나보겠습니다.
개인적으로 미술사에 대한 지식이 임용 교양 수준에 머물러 있는 저로서는 이 기획이 스스로 공부가 되어 만족스럽습니다. :)
출처: 이충렬, 「천년의 화가 김홍도」, 메디치미디어, 20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