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단상] 책, 왜 읽으세요? 책, 왜 읽히세요? #03 너와 책 이야기
#Intro
우리는 자신의 성공담을 이야기하는 책을 쉽게 만납니다. 그들은 모두 열심히 했고, 그게 다 각고의 노력 덕분이라고 말합니다. 이런 이야기를 들을 때 우리는 두 가지 마음이 동시에 듭니다. 의욕과 좌절. 이야기 속 사람만큼 열심히 하고 싶지만 나는 그만큼 치열하지 않습니다. 나는 왜 이것밖게 못할까, 스스로를 자책하게 됩니다. 그런데 정말 '나'가 잘못한 건가요?
어린시절 가장 소중한 친구였던 여동생은 책을 좋아하지 않았습니다. 가만히 앉아 있는 것 자체가 그녀에게는 고역이었습니다. 어린 저는 동생을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끈기'가 부족한 거라 여겼습니다. 동생에겐 가만히 앉아 책을 읽는 끈기가 없었습니다. 그리고 저는 그걸 동생의 결점이고 부족한 점이라 여겼습니다.
지난 글에서 깊고 중요한 질문일수록 해답은 가까운 곳에 있는 법이라 말했지요. '왜' 책을 읽어야 하는가? 라는 질문에 대한 답을 찾는데 결정적인 답을 준 건 저의 동생이었습니다. 책을 좋아하지 않는다고 말하는 동생, 그녀는 과연 독서와 절교한 사람일까요?
일인칭 동생 시점 #1
나는 삼남매 둘째다. 우리 집은 작은 방이 두 개 있는 시골집이었다. 셋이 사용하는 방은 두 평도 안 되는 크기였고, 우리는 매일 이불싸움을 하며 좁은 방에서 포개져 잠을 잤다.
그 작은 방에서 우리 셋은 꼭 붙어있었다. 그건 서로를 끔직히 아껴서 라기보단, 꼭 붙어있어야 겨우 놀 수 있는 작은 공간만이 우리에게 있었기 때문이다. 서로가 함께라 심심하지 않고 늘 놀거리가 있었지만, 나에겐 그 공간이 심각하게 비좁았다. 작은 방에선 술래잡기도, 축구도 할 수 없으니까.
놀거리가 가득한 나의 아지트 중 한 곳은 이모부의 작은 공장이었다. 공업사를 운영하시는 이모부에겐 신기한 것들이 가득했다. 나무와 쇠와 유리는 이모부의 손끝에서 갈라지고 합쳐지고 완성되었다. 위험하니 오지 말라는 말에도 불구하고 나는 매번 공장에 찾아가 이모부 옆에서 나무조각을 가지고 놀았다. 나의 백가지 꿈 중에서 공업사 사장님은 꽤 오랫동안 맘속에 머물렀다.
일인칭 동생 시점 #2
책읽기를 좋아했냐고? 아니, 안좋아했다. 정확히 말하면 세상에는 책보다 재미있는게 엄청 많기 때문에 굳이 책을 읽기 않았다. 그래도 가끔 비가 오거나 너무 더워 밖에 나갈 수 없을 땐 삼남매가 다같이 널부러져 책을 읽었다. 주로 만화책을 읽었다. 'OO에서 살아남기' '마법천자문', '메이플스토리' 같은 만화시리즈가 유행할 때였다. 줄글로 된 책도 읽었다. 만화책만큼 재미있는 건 아니지만 그것들도 나름 재미있었다.
하지만 학년이 올라갈수록 더 책을 안읽게 되었다. '책=내가 안 좋아하는 것'이라는 공식이 생겨버린 것이다. 내가 질문을 이해하지 못할 때마다, 맞춤법을 틀릴 때마다, 성적이 좋지 않을 때마다 주변 사람들은 그게 다 책을 안 읽어서라고 말했다. 그들에 의하면 내가 부족한 모든 이유는 책이었다. 나의 독서는 그들의 기준을 만족하지 못했다. 그렇기에 나에게 책은 무거운 짐이 되었다. 아주 많이, 꾸준히 해야 하는 숙제가 되었다.
일인칭 동생 시점 #3
책을 많이 읽든 안읽든 시간을 흘러가고 우린 어른이 된다. 나는 움직이는 게 좋아 체육전공으로 대학에 입학했다. 대학에 가서도 일부러 책을 찾아서 읽을 일은 없었다. 세상에는 재미있는 게 여전히 가득하고, 나는 그것들을 즐기기에도 시간이 모자라니까. 그래도 가끔 책을 읽었는데 책과 만났을 때 느낀 몇 가지 선명한 감각을 기억한다.
첫째로, 대학교 교양 강좌 시간에 읽은 카뮈의 『이방인』이다. 처음 읽었을 땐 무슨 말인지 이해가 안 가는 곳도 많고, 주인공이 전혀 이해되지 않았다. 읽는 순간엔 이게 뭐야, 생각하고 던져두었는데 나중에 문득문득 생각나더라. 몇 가지 장면이 강렬하게 머릿속에 그려진다. 나중에 내가 더 성숙해지고 생각이 깊어지면 이 책이 잘 이해될까? 궁금해서 서재에 보관해두었다. 미래에 어느 날 다시 카뮈와 만나기를 기대하며.
둘째로, 언니와 함께 살 때 책을 읽었 책이다. 방학동안 자격증 준비 때문에 언니 집에서 함께 살았다. 같이 놀 사람이 없는 객지에서의 삶은 무료했다. 그리고 언니 집에는 책이 가득했다. 하도 심심해서 하루는 언니에게 책을 추천해달라고 했다. 언니는 기다렸다는 듯 눈을 반짝이며 책 몇 권을 쥐어주었다.
어떤 건 재미있고 어떤 건 재미없었다. 어떤 책은 앞부분은 재미있으나 뒤에는 재미없었다. 언니는 재미있는 데까지만 읽고 안읽어도 된다고 했다. 진짜 그래도 되나? 찝찝했지만 언니 말대로 했다. 그래서 나에겐 읽다 만 몇 권의 책들이 생겼지만, 그 책들에 대한 나의 기억은 미완성 은 아니다. 오히려 완독한 책보다 더 기억에 남은 읽다만 책들이 있다.
일인칭 동생 시점 #4
나는 여전히 책이 낯설다. '독서'라는 말부터 낯설다. 나는 책 앞에선 모든 게 서툰 사람이 된 것 같다.
나는 여전히 가끔만 책을 읽고, 시간이 난다면 책을 읽기보단 친구를 만난다. 읽다보면 금세 지루해하고, 그러면서 완독에 대한 부담이 있다. 재미있거나 의미있는 책을 읽고 싶은데 그런 책을 찾는 게 너무 어렵다. 책은 같은 반이면서 1년 동안 한두 마디만 해본 어색한 친구같다. 절교하거나 싫어하는 친구는 아니지만, 어색한 친구. 나는 그 친구와 친해지고 싶은 마음이 조금은 있는 것 같지만 방법을 모르겠다. 그렇다고 책과 친해지기 위해 일부로 엄청난 시간과 노력을 들일 생각도 없다. 이런 나와 책의 관계, 비정상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