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절약촉진제 06> 안 쓰면 보이는 것들
와인을 즐기기 시작했다. 촌뜨기인 내가 먼저 길을 텄을리 없다. 전방위 호기심과 도전정신이 뛰어난 남편 작품이다. 덕분에 일주일에 한 병, 아이들 우유 옆에 와인 한 병은 냉장고 상비군이다. 떨어지지 않도록 자주 채워두고 하루 한 잔 씩 마시고 있다. (이 글도 취중 작문입니다. 헤헤.)
아낀다면서 웬 고급진(?) 취미 생활이냐 물으실 수도 있다. 하지만 자본주의 사회에서 가장 비싼게 바로 '임대료'와 '노동력'이다. 남의 가게에서 남이 따라준 와인을 마셨다면, 절약 생활자에게는 어림도 없는 취중 작문이다. 그러나 우리집에서 내가 따라마신 와인이라면 얘기가 다르다. 오늘 마신 'VEGA OLIVERAS'는 자국(自國)술을 수출하지 않기로 유명한 스페인에서 생산된 와인인데, 마트에서 한 병에 6천원을 주고 샀다.
비싼 와인이 맛있다는 통념을 깬다. 한창 와인을 공부하는 남편이 억울하게 토로했다.
"비싼게 좋은 술인 줄 알았어. 그런데 의외로 정말 맛있는 와인은 3만원대에 많데. 가격과 맛이 정비례하지 않는다는거지."
자세히 들여다보면 자본주의 사회는 허점이 많다. 구멍이 숭숭 뚫려있다. 돈을 지불해야만 값어치를 한다는 고정관념은 대표적인 '허점'이다. 우리는 '공짜'인 내 힘으로 뭔가를 해낸다는 거에 겁에 질려있다. 필요 이상으로 말이다.
소비해야'만' 좋은 물건과 서비스를 취할 수 있다는건 억지 주장이다. 그런데 이 주장의 빈틈을 발견하는데는 왕도가 없다. 정면돌파의 방법은 바로 '안 쓰기'다. 뭐든 돈 안 쓰고 해보려고 고군분투 해보는거다. 지름길을 믿지 말고 정직하게 몸으로 부딪치자. 그래야 '돈 덜 써도 별 일 없네?'를 깨닫게 된다.
이름하야 안 쓰면 보이는 것들이다.
돈 안 쓰고 버텼더니, '임대' 혹은 '작은 평수'에 가려진 집 본연의 값어치를 가려내는 안목이 생겼다. 좋은 집이란 무엇일까? 신축 브랜드 30평대 아파트? 아무렴 좋을거다. 좋아야 한다! 2억 5천씩 들여 입주했으면 당연히 만족스러워야 한다. 보증금 5800만원에 월세 6만 5천원, 24평 우리집도 좋다. 남향, 고층, 초중고등학교 다 가깝고, 온갖 편의시설(병원, 마트, 카페, 도서관 등) 도보 15분 내외, 바로 앞 전천 산책길까지.
딱 한 가지 나쁜 점이 있다면, 우리 아이 임대 아파트 산다고, 친구들이 놀리지는 않을까 앞서 걱정하는 일이다. (어쩌다가 동해도 이 지경이...) 돈 없어서 이사를 안 가든, 돈 있어도 이 아파트에 계속 살든, 우리 아파트의 좋은 점을 깡그리 뭉게버리는 '임대 아파트 주민=무례함'으로 여기는 더 무례한 인식들. 그것 빼곤 다 좋다.
(수도권에서는 분양 아파트과 임대 아파트 사이에 철벽을 치고, 심지어 같은 아파트 단지 내에서 출입구를 달리한다는 기사를 읽었다. 가난을 잠시 머무르는 '상태'가 아닌 '성질'로 여겨버리는 무식함에 혀를 내두르며 경멸한다. )
돈 안 쓰고 버텼더니, 도서관에서 책을 잔뜩 빌려 아이들에게 날랐다. 덕분에 아이들은 자주자주 손때 탄 책장 너머, 귀한 지혜들을 자꾸 배운다.
돈 안 쓰고 버텼더니, 집밥을 해다 먹였다. 정육점에서 빵가루 묻혀 주던 돈까스도 아까워서 직접 등심을 사다가 튀겨주었다. 좋은 우유, 좋은 계란, 좋은 고기로 만든 9700원어치 돈까스 6장은 4인 가족 두 끼 반찬을 책임질 수 있다. 사 먹으면 좋은 점은 '맛'과 '편리함'이지만, 해 먹으면 좋은 점은 '위생'과 '건강'이다. 돈 쓴다고 반드시 최선은 아니었다.
돈 안 쓰고 버텼더니, 취미로 책 읽고 글 쓴다. 돈 드는 취미보다, 생산자의 삶을 취미로 삼는다. 돈 쓰는 취미를 가진 사람이 수입이 줄어들거나 여타 상황이 안 좋아지면, 삶이 바로 무너진다. 하지만 돈 안 드는 취미를 가진 나는, 최소한 '돈'에 의해 삶이 크게 휘청이지 않을 것이다. 적게 써도 난 재밌게 잘 노니까.
미래를 위해 절약하기도 하겠지만, 사실 돈 덜 쓰는 삶이 미래의 행복을 위한 유예가 아니다. 안 써보니 보인다. 이토록 건강하고 정직하며 찬란한 순간은 화려한 대형 쇼핑몰에서만 오지 않음을.
+)
써야 보이는 것들도 있습니다. 돈을 지불해야 하는 것들도 있지요. 가치 있는 예술 작품, 잘 무두질 된 가죽 소파, 단단한 원목의 책장과 면 좋은 티셔츠. 그러나 이건 구태여 누군가 말하지 않아도, 물건 파는 사람들이 알아서 잘 홍보해줍니다. 그러니 우리는 우선 안 써야 보이는 것들을 발견해야 해요. 그래야 비로소 '써야 보이는 것'과 '안 써야 보이는 것'의 균형이 생길테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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