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왜 학교를 그만두었나. -9- 논현동 사무실 라이프.
나는 왜 학교를 그만두었나. -9-
# 서울라이프
사직서를 쓰고 온 곳이 '회사'라는 것 만큼이나 큰 요소는 바로 '서울'이라는 것이었다.
예전부터 막연히 언젠가는 서울에서 살아보고 싶다는 생각을 했지만
막상 대학 진학의 순간이나 임용고시 지원 때에는 서울행을 선택하기가 쉽지 않았다.
교직에서 지역을 옮기는 근무 발령은 없기 때문에 처음 교직을 시작할 때
내 생활의 주요 장소가 바뀔 것이라고는 상상도 못했다.
하지만 학교를 그만두면서 26년 간, 한 번도 떠난 적 없었던 대구에서 상경했다.
대학 진학부터 서울, 경기권 대학을 다닌 친구들은 자연스럽게 수도권 근무로 이어지는 편이지만
지방에서 대학 졸업, 근무까지 했던 나에게는 서울살이에 대한 고민이 마치 외국살이 만큼 걱정되었다.
처음에는 내가 새롭게 다닐 직장에서 일을 잘 할 수 있을까로 시작했던 고민은
서울은 집값이 전부 몇십억이라던데 거기서 나중에 집은 구할 수 있을까,
분명 대구보다 물가도 높을 텐데 이 월급으로는 밥도 제대로 못 먹는 것은 아닐까,
처럼 점점 그곳에서의 생활, 생존에 대한 고민으로 바뀌어 갔다.
대구에서 태어나서 초, 중, 고, 첫 대학, 두 번째 대학, 그리고 첫 사회 생활까지 이어졌다.
추억도 많았지만 또 가끔은 한 번 정도는 다른곳으로 떠나서 살고 싶기도 했던 곳이었다.
가야지, 가야지 하다가 진짜 오게 된 서울이었다.
# VR처럼 전달하고 싶은 논현동 사무실 생활기
2015년, 서울에서 다녔던 회사는 논현동에 있었다.
TV에서 백종원의 유명한 식당이 몰려있는 동네로 몇 번 본 적 있었는데
그곳이 새로 이사한 우리 회사 사무실 동네였다.
서울에서 지내던 이모댁은 서대문구에 있었는데 아침마다 한 시간씩 지옥 버스를 타야했다.
지옥 버스를 몇 번 타고 나니 아침부터 혼이 쏙 빠지는 느낌이었다.
집에서 나오는 시간은 7시 40분에서 조금씩 빨라졌고 나중엔 7시가 되기도 전에 출발했다.
대구에선 본 적 없던 초록색의 아담한 마을 버스를 타고 다음 버스로 환승한 뒤
논현역에서 내려 10분 정도 걸어가면 사무실이 나왔다.
버스에서 내려 논현역에서 걷기 시작하면 보통 7시 30분 쯤 되었는데,
나의 소확행이라 항상 주장하는 사치커피를 한 잔 사들고 느긋하게 걷다 보면 신기한 풍경이 많았다.
동네 특성 상 아침 8~9시까지 영업하는 술집이 많았고, 거기엔 항상 사람들이 그득 차 있었다.
출근길 아침 공기에 섞여 있는 술 냄새와, 하루 일과를 마치고
12시는 되어야 느낄 것 같은 분위기가 묘하게 섞여 있었다.
나에게 8:30-16:30의 생활이 있었던 것 처럼 내가 출근하는 아침에 한잔 중인 저 사람들에게는
또 각자의 생활 시간이 있었을 것이다.
# 점심시간
오전 내 적막했던 사무실에서, 11시 30분 쯤 되면서부터 공기가 달라지기 시작한다.
12시 부터 점심시간인 것을 다 알고 있지만 그때 나갔다간 만원 버스 안에서 밥먹어야 할 상황이 되기 때문에
11시 30분 쯤, 슬그머니 오늘의 점심 메뉴가 제안되고는 했다.
서울 물가인지, 논현동 물가인지 알 수는 없었지만 회사 구성원끼리 암묵적으로 약속한
점심 식사비 1인 7천원에 맞는 식당은 한정되어 있었다.
회사 근처 식당의 김치찌개와 계란말이는 최애 식단이었고
보통 닭곰탕, 김가네, 맥도날드, 서브웨이도 종종 다녀왔다.
원래는 치킨 집이지만 점심시간에만 돈까스를 팔던 가게도 가끔 다녀왔다.
피곤한 날엔 점심시간에 식사 대신 잠을 선택하기도 했다.
한 시간 정도 엎드려 자고 일어나면 배는 엄청 고팠지만 세상 개운했다.
점심 먹고 들어가는 길에 사서 마시는 아이스 아메리카노는 정말 좋았다.
회사 생활에서 가장 좋았던 것을 꼽으라면 아마 식사 후 아메리카노가 아니었을까.
하지만 가끔은 급식이 그립기도 했다.
어린이 입맛으로 맞춰져서 전~혀 자극적이지 않은 육개장, 하나도 안매운 떡볶이가 나왔지만
그래도 급식으로 먹을 땐 점심 메뉴를 전혀 고민하지 않아도 되서 좋았다.
닭튀김을 5개씩 줄것인가 6개씩 줄 것인가 신경 쓸 것은 많았지만
밥 먹기 위해서 줄 설 필요는 없었기 때문이었다.
가끔 시간을 잘못 맞췄을 때에는 한참을 밖에서 줄서서 기다리고 겨우 자리가 나서 들어가면 허겁 먹고 나와야 했다.
식후 아이스 아메리카노는 없었지만 그래도 먹을 수록 건강해지는 식사가 바로 급식이었다.
# 오후 근무 시작
차고에서 시작되었다던 애플, 구글, 아마존의 성공 사례를 모르는 것은 아니지만.
도대체 그 회사들은 언제 작고 작은 한 칸짜리 사무실에서 탈출한 것일까.
머리를 맞대며 회의하던 그들의 모습은 참 낭만적으로 보였는데
막상 매일 머리를 맞대 보니 좁은 공간에서 여럿이 생활하기란 신경 쓸 것이 한 두가지가 아니었다.
물론 다 같은 성인들이라 농담해도 다같이 웃을 수 있고,
가끔은 어마어마한 팀워크에 가슴 뿌듯해질 때도 있었지만.
오후 쯤 되면 혼자 편하게 업무 하고 싶은데, 조용히 혼자 공간을 쓰려면 사장님이 되는 것 말고는 방법이 없었다.
하루 종일 정신 없이 애들이랑 지지고 볶고 난 뒤에 다 집에 가고 나면
햇빛 들어 오는 텅 빈, 고요한 교실 사무실이 눈물나게 그리웠다.
좋아하는 노래 한 곡 틀어 놓고 열심히 일을 하던 그 때.
아. 왜 몰랐을까.
밖에서 보는 우리 학교는, 귀엽고 사랑스러운 아이들과 따뜻한 눈빛을 나누며
즐겁게 수업하고 다정하게 사제간의 정을 쌓아가는 것일 테지만.
실제로 우리의 매일은 다르지 않던가.
종종 보면 어린이 맞나, 싶은 6학년 어르신들과 함께
복도에서 '식빵'을 날리며 우다다닥 뛰어가는 학생들을 잡으러 쫓아 다니며 매일 목이 쉬는 일상이 아닌가.
서울, 논현동 사무실 생활도 그러했다.
마음 맞는 사람들과 비전을 공유하며 멋지게 일을 하고,
점심시간엔 커피 한잔의 여유를 즐기며 멋진 회사 생활을 할 줄 알았으나 그것은 이상인 것을.
현실은 술냄새를 맡으며 출근하고 점심시간 되면 좀비 마냥 줄을 서서 기다리고
좁은 사무실에서 다닥다닥 붙어 일하며 지내는 것이었다.
# 함부로 판단하지 말지어다
그러니 폼나는 사원증을 부러워 하지 말고, 점심시간의 커피 여유를 부러워 하지 않고,
자유 로운 근무 시간을 부러워 하지 않아야 한다.
반대로 방학을 시기하지 말 것이며, 1시간 이른 퇴근 시간을 비아냥 거리지 말고,
회식 없는 문화를 존중해 줘야 할 것이다.
서로 현실에서 꿋꿋하게 버티고 있는데 왜 얕게 보이는 이상 만으로 서로의 힘듬을 판단하는 것일까.
각자의 작업 공간에서는 각자만 알 수 있는 현실의 영역이 있다.
회사를 떠난 지금, 나는 논현동에서 술 한잔 할 때가 제일 기분이 좋다.
회사 생활이자 서울 살이를 처음 시작했던 그 때의 초심이 떠오르기도 하지만
무엇보다 매일 출퇴근길에 터벅터벅 피로를 한가득 짊어지고 걸었던 그 골목에서
더 이상 출근 부담을 느끼지 않아도 되기 때문이다.
회사든 학교든, 어디서든 장단점은 존재하고 매일의 일상은 지루하고 힘들다.
무엇을 하든 이상과 현실의 차이는 있지만 그래도 나는 학교가 조금 더 좋다.
논현동의 현실 보다는, 여기 교실의 현실이 훨씬 더 좋기 때문이다.
가끔 열받긴 하지만 그래도 여기가 조금 더 재미있는 현실 상황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