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저는 ‘친구’ 같은 교사는 되지 못할 것 같습니다.
저는 ‘친구’ 같은 교사는 되지 못할 것 같습니다.
3월 5일, 학교가 개강을 하고 제가 몸답고 있는 단체의 일에 치여서 하루를 보내다보니, 금방 일주일이 끝났습니다. 한 달 전부터 ‘개강’이 다가오는 것에 두려워하던 날들을 떠올리면, 별다른 사건·사고 없이 흘러간 것 같아 다행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일부 독자들께서는 교육대학교 학생의 개강 첫 주에 대해서 궁금하시겠지만, 필자의 2018년 무술년의 첫 글은 올해 겨울에 겪었던 하나의 ‘사건’에 대해서 적으려고 합니다. 국민들의 안목을 어지럽히는 인터넷기사의 자극적인 제목만큼이나 강렬한 이 글의 제목과도 연관이 있습니다.
필자는 이번 겨울방학동안 가장 기억에 남는 활동은, 1월과 2월에 걸쳐 참여했던 ‘중학생 멘토링’입니다. 멘토링 경험이 스스로 적다고 생각하지는 않지만, 이번 활동을 돌이켜 생각해보면 꽤나 애를 먹었던 것 같습니다. 멘토링을 하는 동안, 필자는 필자의 조원 학생들뿐만 아니라, 최대한 많은 학생들과 친해지려고 노력했습니다. 약 3주간의 멘토링 활동이 끝나니, 필자가 알려준 핸드폰 번호로 많은 카톡, 메시지 그리고 전화들이 왔었습니다. 필자 또한 처음에는 학생들의 연락을 기쁘게 받았습니다. 그 친구들이 그만큼 저를 편안하게 생각하고 좋아해준다는 것이었으니까요. 하지만 별다른 이유 없이 ‘심심하다’는 이유로 연락이 계속되자, 필자의 다른 업무에 집중을 하는 것이 점점 힘들었습니다. 학생들의 연락이 부담스러워지기 시작한 것이지요. 그러다보니 그들의 연락에 답장을 하는 것이 늦어지고, 답장이 짧아졌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한 학생과 카톡을 주고받다가 서로에게 상처가 생긴 일이 벌어졌습니다. 그 친구가 필자에게 “읽씹하시네../ 그럼 톡 안할래여/ ......ㅎ”라고 톡을 보냈습니다. 잠시 후에 “모든 톡에 답을 해야 하는 건 아니잖아::”라고 필자가 답을 했고요. 당시에는 필자의 카톡 대화 방식에 대해서 문제를 삼기보다, ‘그 친구의 행동은 너무 무례한 것이 아닌가?’라고 생각했었습니다. 실제로 당시에는 그 친구에게 덧붙여서 필자가 기분상한 이유와 함께 ‘학교 선생님께도 그렇게 말씀드리지는 않잖아.’라고 덧붙였습니다. 제 행동보다는 그 학생의 행동이 문제가 있다고 생각한 것이었지요.
하지만 생각을 해보니, 필자가 그 친구의 수다를 처음부터 무조건적으로 받아준 것이 그 원인을 제공하지 않았나 싶습니다. ‘사교’라는 활동은 참 어려운 것 같습니다. 그것이 교사와 학생들 사이의 관계라면 더욱 그렇고요. 필자가 느끼기에 제 또래의 교육대학교 학생들은 학생들에게 ‘친구’같은 교사가 되려고 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실제로도 좋은 교사에 대한 비유를 할 때, 다른 학생들이 비유로 많이 사용하는 단어가 ‘친구’이기도 합니다. 그런 젊은 교사들에게 현직 교사 선배님들은 ‘요즈음 젊음 교사들은 학생들과 친해지려고 하지를 않아.’라는 말씀(조언)을 하시는 것을 자주 보고 또 들었습니다. 그 자리에서 겉으로 내색을 하지는 않았지만, 항상 ‘모순적이다.’라는 생각을 했습니다. 친구 같은 선생님이 되고 싶은 젊은 교사들이 왜 학생들과 거리를 두려고 하는 것일까.
이번 경험을 통해서 조금은 이해가 가는 것 같습니다. 스마트폰 시대(카톡 세대)라고 해서 두 연령층의 대화 문화까지 같은 것은 아닙니다. 그리고 그 문화의 차이에서 서로에 대한 상처와 경계가 깊어져서, 교사들이 학생의 연락을 부담스러워하고 조심하게 되지 않나 생각해봅니다.
이번에 필자가 겪었던 사건 또한 ‘읽씹’의 문제였습니다. ‘읽씹’이라는 것은 고의적으로 누군가의 카카오톡 대화를 읽고 상대방에게 답장을 하지 않는 것입니다. 이 기준이 필자와 그 학생이 서로 다르고, ‘교사’는 학생에게 있어 말을 하거나 문자를 보내는 데 있어 조심스럽다는 점. 그리고 학생들과 하루 종일, 더 나아가 일주일동안 친구와 수다를 나누듯이 대화를 나눌 내용이 없다든 점. 무엇보다 이것을 학생들에게 알려주지 못하는 경우, 교사는 학생들의 끊임없는 연락을 점점 부담스러워한다는 것이 이번 사건을 겪고서 얻는 가장 큰 깨달음이 아닐까 싶습니다.
친구라면 서로의 수다에 있어서 ‘이것이 교육적으로 적합한 말인지’에 대해서 신경을 쓰지 않아도 되고, 비슷한 시기와 문화를 공유하고 있기에 여러 가지 ‘기준점’에 대해서 서로 이해를 하고 양보를 해줄 수 있습니다. 하지만 학생과 교사의 관계는 매우 다른 것 같습니다. 필자의 주변에서도 ‘교사가 학생들과 함께 온라인 게임을 하는 것’에 대해서 찬반의 의견이 극명하게 갈리는 등, 학교 외 사적인 자리에서의 관계의 형성은 저 같은 초임교사에게 있어서 생각하지 못한 복병이나 다름이 없습니다.
임용고시를 보고서 교사로 복무하며 경험을 쌓고 필자만의 노하우를 만들면 생각이 바뀔 수도 있겠지만, 지금 당장은 ‘교사가 친구처럼 느껴지는 것’, 어렵지 않나 생각합니다. 실제로 필자의 작년(2017년, 2학년) 수업 참관실습 때도 지도 선생님께서는 필자에게 ‘교사 같은 선생님이 되면 안 된다.’고 이야기 하셨고요.
글을 마치며, 사실 좋은 교사는 수업 외적인 부분에 대해서 얼마나 잘 대처하느냐에 따라 정해지지 않을까 생각해봅니다. 인터넷 강의와 자료들이 워낙 잘 준비되어있기 때문에 수업적인 요소는 상향평준화가 이루어지지 않았을까 추측해봅니다. 그러나 필자가 경험한 일처럼, 생각해보지 못한 곳에서 터지는 학생과의 수업 외적인 부분들은······. 물론 선배 교사님들의 이야기가 많이 도움이 되겠지만, 당사자가 그 일을 겪고서 ‘어떤’ 생각을 하느냐가 중요한 것 같습니다. 중학교 3학년, 처음 교사를 되고자 했던 이유는 제가 받고 있는 공교육을 직접 바꾸어보고 싶은 마음이 커서였습니다. 그리고 지금, 그 말을 주변 어른들에게 또, 절 지도해주셨던 선생님들께 그 이유를 말한 것이 무척이나 죄송하고 창피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