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쌤이알고싶다] 박지희 선생님 1
박지희 선생님은 날 두 번 울렸다. 첫 번째 눈물은 《온작품을 만났다 낭독극이 피었다》를 읽으면서였다. 돌아가신 할머니를 그리워하는 아이가 쓴 '살아 있어 살아 있어/ 그립고 있어/ 살아 있어 살아 있어/ 울고 있어/ 아, 살아 있다는 건/ 울고 있어'란 글과 박지희 선생님의 해설을 읽다가 출근길 버스에서 그만 눈물이 났다.
두 번째는 1학기 말이었다. 갑작스러운 학교 일로 괴로워 전교조 페이스북 분회에 하소연 겸 도움 요청을 드렸다. 그때 생면부지인 나에게 선뜻 손을 내밀고 전화까지 걸어주신 분이 바로 박지희 선생님이었다.
“선생님은 그저 할 일을 하신 거예요. 혹시라도 힘든 일이 생기거나 물어볼 게 있으면 언제라도 연락주세요.”
그 순간 나에게 가장 필요했던 말이었다. 주차장에 서서 따뜻한 선생님의 목소리를 듣는데 참았던 눈물이 터졌었다. 지금도 기억나는 그날. 《온작품을 만났다 낭독극이 피었다》를 3개월 넘게 품고 다닌 여름 저녁이었다.
선생님, 만나주셔서 감사합니다. 저에겐 박지희 선생님 하면 ‘국어 수업, 온작품 읽기, 한글 교육, 전교조 해직 교사, 내부형 공모교장’ 같은 것들이 우선 떠올라요. 먼저 작년에 출간하신 《온작품을 만났다 낭독극이 피었다》 이야기를 해볼까요? 저자소개에서 아이들의 삶을 바꾸는 교육, 교사가 환영받는 수업을 찾고자 고민해왔다고 하셨지요. 구체적으로 ‘삶을 바꾸는 교육’과 ‘교사가 환영받는 수업’이란 무엇일까요?
지금 아이들이 처한 삶의 문제를 해결하는 게 진짜 공부라고 생각해요. 대학 갈 때 필요한 지식을 다루는 것이 아니라요. 수업이 온전히 아이들 것이 되려면, 아이들의 이야기를 가지고 아이들 안에서 출발해야 합니다. 이런 것들을 다루는 수업과 교육을 만들어 나가면 아이들이 스스로 즐기면서 할 수 있을 거라 믿습니다.
실제로 온작품 수업을 하며 아이들이 자기 문제를 드러내더라고요. ‘힐링’이라는 단어처럼 그저 순간 잊어버리고 딴생각으로 넘어가는 것이 아니라 문제에 직면하고 맞서며, 풀어내는 거지요. 이런 것이 가능했던 게 온작품을 다루는 수업 덕분이라 생각합니다. 점점 더 아이들이 책 읽기를 좋아했고, “이 책 다시 읽고 싶어요.” 말하곤 했지요.
종종 수업 중에 다른 활동을 하다가 이제 교과서를 펴자고 하면 아이들 입에서 ‘에이~’라는 말이 나오곤 하잖아요. 하지만 온작품 읽기는 아이들의 직접 나서서 하자고 하는 수업이었어요. 아이들의 입에서 먼저 하자는 말을 들으며 ‘이게 바로 아이들에게 환영받는 수업이구나.’ 하는 생각이 들며 저 역시도 치유되는 느낌이었습니다.
말 그대로 아이들에게 ‘환대’받는 수업을 말씀하시는 거군요. 저에겐 《온작품을 만났다 낭독극이 피었다》는 시중에 나와 있는 여러 온작품 읽기 관련 도서와 다르게 다가왔습니다. 그 이유가 뭘까 생각했는데 이 책은 단순한 방법서를 넘어 박지희 선생님이 아이들과 함께 호흡하고 웃고 운 스토리가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이 들었습니다. 《리디아의 정원》이나 《살아 있어》와 같은 책들은 여러 챕터에 걸쳐 여러 번 등장하는 것도 같은 맥락이겠고요. 저도 온갖 미디어가 범람하는 이 시대에 책읽기가 가지는 의미에 대해 다시 한번 생각할 수 있었습니다. 뻔한 질문일 수도 있겠지만, 왜 책읽기, 왜 온작품이어야 할까요?
아이들은 모두 각자 커다란 삶의 문제에 직면하고 있어요. 어떤 아이는 외로워 죽겠고, 또 다른 어떤 아이는 상실감을 느끼고 그리움에 눈물이 나지요. 이런 아이들의 마음과 삶의 문제를 살펴주는 것이 수업 시간에 이루어지면 좋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온작품을 읽으며 아이들이 “이 문제가 해결되었어요.” 입 밖으로 말하진 않았지만 저이들이 힘들 때면 “온작품 수업해요.” 말하곤 하는 거예요. 그래서 온작품을 다루는 게 아이들에게도, 저에게도 너무 좋다는 생각을 자연스레 했던 것 같아요. 코끼리 다리만 만지는 게 아니라 온전한 코끼리를 보고 접하는 거죠.
우리나라의 문학 교육이 국어 수업을 위해서만 문학 텍스트를 읽고, 개인적으로 찾아 읽는 친구들만 책을 읽었기에 작금의 모습이 된 것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합니다. 모든 아이가 ‘책을 읽는다는 게 이런 기분이구나.’ 라는 것을 경험한다면 자기가 좋아하는 분야 정도는 충분히 찾아 읽는 독자가 될 수 있다고 믿습니다. 우리 아이들이 커가면서 단 한 권의 책이라도 ‘쿵’하고 만났으면 좋겠어요.
<아이들을 위한 그림책과 동시집으로 가득한 박지희 선생님의 교장실. 억울하거나 속상한 일이 생겼을 때, 교실에서 잠시 멀어지고 싶을 때 아이들은 교장실을 찾는다. 필자가 머무른 아주 길지 않은 시간에도 몇 명의 아이들이 다녀갔다. >
카프카의 ‘도끼’와 같은 책 말씀이군요. 아이들이 스스로 즐긴다는 말 역시 와닿습니다. 같은 맥락으로 ‘재미있는 수업보다 즐거운 수업이 되길 원한다’(같은 책 67쪽)란 문장에도 깊이 공감했거든요. 재미있는 수업과 즐거운 수업의 차이는 무엇일까요?
재미는 외적인 것에서 오는 것이지만 즐거움은 내적인 것에서 기인하는 것으로 생각합니다. 자기 문제가 해결되고 치유되는 쾌감을 느끼며 긴 시간 동안 신나고 충만한 느낌을 받는 것이지요. 저는 아이들이 ‘공부’의 즐거움을 알았으면 합니다. 당연히 힘든 것도 있겠지만 그 힘든 것을 극복했을 때 오는 기쁨이나 희열 또한 분명 있잖아요. 아이들이 이런 기쁨을 몸소 느끼면 좋겠습니다. 이런 수업을 많이 해나간다면 공부는 지겨운 것이라 여기는 아이들이 줄어들 거라 믿어요. 책을 읽어낼 때도 마찬가지겠지요. 단순한 재미를 넘어 즐거움을 느끼면 좋겠어요.
어른이 돼서도 책을 읽는 사람들과 읽지 않은 사람들은 아주 큰 차이가 있다고 생각해요. 책을 읽는 것은 직접 겪지 못하는 다양한 삶을 직간접적으로 경험하게 해주는 것이지요. 저는 그냥 마냥 단순한 생활신조를 가진 사람들을 싫어합니다.(웃음) 삶의 다양한 무늬나 결을 보지 못하는 사람들을 좋아하지 않아요. 나와 다른 것들에 대해 너무 빠르고 쉽게 판단해 버리는 사람들 있잖아요. 그건 결국 다양한 인문학 성찰을 못 하는 것이거든요.
그렇다면 즐거운 수업을 위해서 교사는 어떤 노력을 해야 할까요?
저는 교사에게도 철학 공부가 굉장히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사실 학급 운영이나 놀이 같은 수업 기술과 기능적인 공부는 많이 하지만 무엇이 어떠해야 하는가에 대한 근본적인 공부는 여전히 부족한 실정이지요. 교원학습 공동체로 조금씩 시작되고 있지만, 아직 상대적으로 활성화되지 않았습니다.
저 역시 처음 교대를 졸업하고 교단에 섰을 때 막막했거든요. 대학 교육을 비롯해 그때까지의 제 공부는 ‘어떻게’ 가르칠 것인가에만 초점이 맞춰져 있었으니까요. ‘무엇을’ ‘왜’ 해야 하는지에 대해서 더 이야기하고 공부해야 한다고 합니다. 무엇보다 ‘왜’에 대해 고찰하는 자세가 더욱 중요하니까요.
저 역시도 명심하고 노력하겠습니다. 또 선생님 책들을 읽다 보면 제2의 저자는 아이들 같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아름다운 아이들의 글이 많았어요. 보석과 같은 아이들의 글을 길러내는 노하우가 있다면 무엇일까요?
선생님이 정확하게 보셨어요. 저는 그림책, 동시 등 무엇이 되었든 간에 그 작품이 앞에 드러나서도 안 되고, 교사가 앞에 드러나서도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온작품을 통해 아이들이 삶이 어떻게 표현되고 이야기들이 피어나는가가 먼저여야 하는 거지요.
아주 어렸을 때 엄마를 잃은 친구와의 일화가 떠오릅니다. 《엄마의 마흔 번째 생일》을 읽고 자기 엄마 이야기를 처음으로 하더라고요. 이어서 《무릎 딱지》책을 읽어주었더니 처음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울기만 했지요. 그러다 “이 아이는 엄마의 냄새라도 기억하지만 난 냄새도 기억하지 못한다.” 이런 말들을 포스트잇에 적어 책에 붙여오더라고요. 이때 제가 그 아이에게 이걸 발표를 하라던가, 어떤 걸 만들어보라고 했으면 오히려 이 흐름이 깨졌을 겁니다. 그럴 때는 그냥 울도록, 흘러가도록 내버려 두는 것도 교사의 역할이라 생각해요. 아이가 어떤 한 책에 감동했다고 해서 그 이야기를 어떤 결과로 끌어내려고 하면 오히려 과정과 감정을 잊어먹고, 과업만이 남을 수도 있으니까요.
전 사실 ‘한학기 한 권 읽기’라는 말과 ‘온작품 읽기’란 말이 동일하다고 여기지 않습니다. 교육정책으로 들어온 ‘열린 교육’이 제가 생각한 ‘열린 교육’과 같지 않았던 것처럼요. ‘한학기 한 권 읽기’가 하나의 국어 수업의 형태, 기술, 방법으로 간다면 지금의 이 거품이 많이 사라질 거라 생각합니다. 기능적인 부분으로 어느 작품 하나에 매달리게 되면서 아이들이 쉽게 따라 해보는 장점은 있겠지만, 결국 온작품의 진정한 의미나 가치를 못 느끼게 되니 유행은 지나가는 것이지요. 실제로 이미 어느 정도 줄어든 게 느껴지기도 하고요.
저도 책을 정말 좋아하고 아이들과도 많이 보는 편이지만 ‘한학기 한 권 읽기’나 ‘그림책 보기’가 뭔가 유행처럼 다루어지니 오히려 굳이 드러내며 하고 싶지 않다는 이상한 마음이 들더라고요.(웃음)
선생님의 마음이 전적으로 이해가 돼요. 과거 교과서만 앞에 두고 아이들의 삶을 하나하나 들여다보지 않았던 것이 문제가 되는 것처럼, 어쩌면 지금도 비슷한 상황일 수 있습니다. 아이들의 삶이 아닌, 문학작품이나 그것을 가지고 기가 막힌 수업 기술을 가진 교사가 부각되는 상황은 좋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때때로 SNS에서 뛰어난 아이의 작품에 교사가 부차적인 작업들을 한 것들을 보면 ‘그 아이는 그 작품으로 말하고 있지만 다른 많은 아이들의 목소리는 왜 안 들리지?’ 하는 생각이 들때도 있거든요. 책이나 교사의 활동과 능력만 먼저 보여버리면 결국 아이들은 소외되기 쉽죠.
저는 온작품이 교육 운동으로 퍼지는 것은 굉장히 좋지만, 교육상품처럼 보이는 현상에 대해선 걱정도 돼요. 어떤 철학이 바탕이 되지 않은 것들이 상품처럼 소비되고 아이들에게 어떤 흔적도 남기지 못하는 게 아닐까 하는 우려가 되는 거죠. 그 과정에서 교사 자신도 어느덧 상품화되겠지요. 제가 꼰대 기질이 있는지 모르겠지만(웃음) 온작품 수업이든 교육이든 좀 더 긴 호흡으로 아이들의 삶을 들여다보고 아이들 한명 한명에게 배움이 일게 하는 그런 시도들이 더 나오길 바라요. 과연 우리 수업이, 학교에서 이루어지는 배움이란 것들이 그런 역할을 하고 있나 성찰해야겠지요.
‘이 작품 아이들 좋아해요. 이렇게 하니 이런 훌륭한 결과물이 나와요.’ 수준을 넘어서진 못하면 이 유행도 곧 지나가리라 봅니다.
동의합니다. 그래서 ‘삶을 바꾸는 교육’이란 것이 더욱 어렵고 조심스러운 것 같아요.
우리 교육이 바뀌지 않으면 아이들에게 외면당하리라 생각해요. 아이들을 수업에 끌어들이기 위해 공부의 패러다임이 바뀌고, 지금 내 삶의 문제나 세상을 보는 눈을 넓혀나가는 것이 교육이 되어야 합니다. 이런 부분을 도와주는 것이 온작품 읽기가 될 수 있겠지요.
‘시 교육’의 목표 역시 나와 주변을 관찰하고 다양한 삶에 대한 상상력을 키워나가는 ‘소통과 공감’에 있어야 될 것입니다. 그런데 기존의 시 수업은 표현 방법에 치중되어 왔어요. 저학년은 흉내 내는 말, 중학년은 묘사하는 말과 장면 상상하기, 고학년은 비유적 표현과 같은기능 위주로요. 하지만 무엇보다 충분히 읽고 내 안에서 무르익어 나오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교실에서 아이들과 상황에 적절한 시를 찾는 활동을 많이 했습니다. 그래서인지 교사가 “이 마음을 시로 표현해봐.” 하지 않아도 자연스럽게 표현하게 되더라구요. 아직까지 초등학교 아이들에게는 표출하라고 하는 것보다 많은 표현들을 체험하게 하는 것들이 더 중요하다는 생각도 했고요.
저도 매일 아침 정해진 시간에 아이들과 책을 그저 함께 읽고 간단한 감상만 나누고 있는데, 함께 읽는 것만으로도 아이들이 성장하는 것이 느껴지더라고요. 특별한 과제가 있거나 결과물을 창출하는 것이 아니니 아이들도 부담없이 그 시간을 즐기고 기다리는 것이 느껴져 교사도 같은 마음이 되었습니다.
아이들이 읽어낼 수 있어야, 결국 쓸 수 있습니다. 내용을 깊이 읽는 것과 아이들에게 다양한 체험을 하게 하는 것이 중요한 이유입니다. 반복되는 일상에서 체험이 부족한 아이들에게 자꾸 표현하라고 하면 부담을 느낄 수 있습니다. 책읽기와 시를 같이 읽어내면서 간접경험을 풍부하게 하는 것이지요.
아이들의 삶과 경험의 폭은 작고, 설사 경험을 했어도 어떻게 표현해야 하는지 모르는 경우도 많거든요. 이럴 때 긴 호흡의 동화책이나 그림책, 동시를 함께 읽어나가면 다양한 인물과 상황, 갈등 속에서 폭넓은 체험을 할 수 있습니다. 아이들은 시와 글, 자신의 마음을 결합해보는 활동을 많이 해보는 거죠. 간접 체험을 하면서 내 체험과 견주어 보며 ‘아, 이럴 때 이런 표현을 쓰는구나. 이때 내가 이 마음이었구나.’ 하는 깨달음을 얻게 되는 거죠.
선생님의 책을 읽고 태어나 처음으로 동시집을 사고 조금씩 학급문고로 모으고 있습니다. 앞으로 1달에 1권은 꼭 동시집을 사서 학급에 비치하자고 마음을 먹었지요.
저는 동시집을 오래전부터 모으기 시작했어요. 동시 감상부를 운영하며 동아리 지원금으로 동시집을 사 모았습니다. 그 동시집들은 제 보물과도 같아요. 얼마 전 5학년 수업 보결을 갑자기 들어가게 되어(보결을 대신해주시는 교장 선생님이라니!) 함께 《쿵푸 아니고 똥푸》를 읽었죠. 그런 후 특정 대목과 어울리는 동시 찾아보는 활동을 하면서 2교시동안 아주 재미있게 공부했어요.
<지난 2월, 코로나19의 여파로 졸업식이 축소된 6학년 아이들을 위해 각반에 들어가 2시간씩 온작품 낭독극 수업을 하고 '마녀의 꿀 사과'를 선물해 주셨다.>
담임을 할 때는 필사를 많이 했습니다. 독서기록장을 아예 필사로 했으니까요. 1학년도 4월부터는 필사를 시작했고요. 그림책을 보고 가장 마음에 남는 문장을 베끼는 방식으로요. 너무 쓰지 않는 것도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필사를 통해 아이들의 문장력이 많이 커집니다. 고학년이 되면 필사할 때 차분해지는 느낌을 알아요. 때론 아이들이 교사가 내심 기대한 것보다 오히려 더 긴 텍스트를 필사하려고 하지요.
맞아요. 저도 최근에 반아이들과 함께 시화를 하면서 느껴본 기분이예요! 너무 긴 것 같아 1연만 쓰라고 했는데 아이들이 다 쓰겠다고 하더라고요. 그간 수업해 온 보람이 느껴진 보석 같은 순간이었어요. 혹시 학년군별로 적합한 시집을 추천해주실 수 있으실까요?
그럼요. 개인적인 목록 공유는 좋지만 공유목록이 공개적인 곳에 노출되는 것은 제가 놓친 시집이나 시인들에게 실례가 되는 듯해서 하지 않으려 합니다. 별거 아니지만 제가 어떤 권력이 되어서는 안되니까요.
아.. 전 거기까진 생각을 하지 못했어요. 앞서 말씀하신 인문학적 성찰이 바로 이런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자신의 행위와 그것이 미치는 영향을 끊임없이 돌아보는 태도를 배우고 싶습니다.
하지만 공개적인 곳에 게시하지 않으면 제가 정리한 도서목록이나 PPT로 만들어진 강의자료 등은 늘 공유하려고 합니다. 강의자료 같은 걸 자신이 한 것처럼 제목만 싹 바꿔서 사적 이익을 얻는다면 지식인의 양심에 어긋나는 일이고 안되겠지만요. 저는 널리 퍼지는 것 또한 제가 해온 ‘교육 운동’의 일환이라고 생각하거든요. 제가 한 것을 가져가셔서 교육적으로 활용하신다면 제 이름을 밝히지 않으신다고 해도 괜찮습니다. 아이들과 함께 좋은 수업을 하고 널리 퍼지는 데 일조하신 거니까요.
Copyright에 반한 copyleft 운동이 떠오르네요. 아이들의 삶과 교육, 결국 아이들만을 생각하시는 선생님의 진심이 느껴집니다. 저도 아이들과 더욱 많이 읽고 나누며 살아야겠다는 다짐을 다시 한번 해봅니다. 아직 할 이야기가 많이 남았는데 시간이 참 빠르네요.
지면 관계상 인터뷰 2부에서 박지희 선생님의 내공 깊은 한글 교육 이야기와 더불어 공모형 교장으로서 바라보는 학교와 사회에 대한 고견 등을 이어갑니다. 박지희 선생님의 더 크고 단단한 이야기, 이어지는 2부도 많이 기대해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