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르칠 수 있는 용기-3] 흔들리고 헤매는, 신규 교사 2
루루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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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04.09 19:14
3. 눈은 높아지는데 내 수업은 왠지 ‘노잼’인 것 같다.
그저 카피하고 배우려고 했지만, 자꾸 넘어진 병아리 교사.
눈으로 보는 대로 나도 이루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그 이하의 것은 모자라 보이기만 하고, 자꾸 눈만 높아져 갔다.
재미있어 보이는 교실 놀이.
긍정적인 생활지도.
다양한 학급 이벤트.
아이들의 사고력을 길러주는 노트 정리.
삶을 가꾸는 글쓰기 지도.
등등.....
그런데 뭔가 욕심내어 새로운 걸 실시해보면 상상한 만큼 아이들이 재미있어 하지 않거나 어려워하는 경우가 종종 있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아이들은 못하거나 하기 싫었던 것이 아니라 왜 갑자기 이런 것을 하는가, 충분히 이해를 못했을 수도 있다. 나도 욕심이 앞서서 아이들이 이 수업을 통해 얻게 될 열매에 기대가 너무 커서, 그에 미치지 않은 모습에 실망했을 것이다.
그렇게 여러 번 실망하고 나서야 좋아 보인다고 덥석 따라하는 것을 좀더 경계하고 우리 반 지금 아이들의 상태와 흥미가 어떤가, 내 수업 스타일과 맞을 것인가를 먼저 생각하게 되었다.
같은 학년이라도 지역마다, 학교마다,
또 반마다 아이들의 특성이 다르다. 교사인 나도 다르고.
학창시절, 나는 솔직하게 말해서 장래희망을 고민할 때‘선생님 같은 직업은 싫다’고 생각했다. 지금 이 자리에 있게 된 건 다른 이유가 생겨나서였지만, 그때는 그랬다. 선생님을 잘 따르고 칭찬도 받는 편이었지만, 이상하게도 기억에 진하게 남는 선생님이 별로 없다.
기억에 남는 몇 분의 선생님은 있다. 학생을 존중하는 태도와 인품이 인상 깊었던 선생님. 무척 재미있게 가르치셔서 그 선생님을 싫어하는 아이도 강의 실력만은 끄덕이며 인정하던 선생님.
또 하나는 수업 시간에 교과서보다는 실제로 우리가 앞으로 살면서 필요할 것 같은 요소들과 재미있는 정보를 자주 소개해주셨던 선생님.
선생님 자체의 인품을 제외하고 공통점은 ‘재미’인 것 같다. 지식 자체에 대한 유희를 느끼게 해 주는 재미. 또는 나와 관련이 있고 내가 흥미롭고 궁금한 것을 이야기할 수 있는 재미.
‘학교에서 배우는 이런 지식이 과연 필요할까’, 나 스스로 하는 질문일 뿐 아니라 아이들에게도 많이 듣는 질문이다. 배우는 지식을 당장 써먹을 수 있거나, 재미가 있거나, 내 삶과 관련이 있을 때 동기가 유발되어 즐겁게 배운다는 것은 교육학을 통해 이미 잘 알지만 모든 수업에 적용하기란 쉬운 일이 절대 아니다.
굳이 핑계를 대자면, 두 가지가 늘 걱정이다. 첫째, 내가 아이들의 삶을 분석하여 수업으로 재미있게 끌어오는 응용력과 순발력이 충분치 못하다는 생각. 둘째, 재구성을 하면 기존 교과서보다 내가 구성한 교육과정이 더 아이들에게 바람직했는가? 하는 질문에 대한 찝찝함을 이겨낼 확신의 부족.
나는 내 수업이 ‘노잼’인 건 정말 원하지 않고, 재미있게 수업을 해야 한다는 강박에 ‘조바심’만 넘치고 싶지도 않다. 그러나 재미있기 힘든 과목의 재미있기 힘든 단원을 할 때, 수업이 재미없고 교실이 따분해질 때 정말 조바심이 나고 속상하다.
(사실 지금 이 순간도 고민한다. 내 스타일에서 고칠 점이 있는 것 같아서. 자꾸 교과서 내용을 충분히 이해시키려고 하다가 효과는 덜한데 진도만 느려지려고 해서 고민이다. 아이들이 더 가볍지만 알차게 배우면 좋겠다.)
4. 답이 없는 생활지도
수업 뿐 아니라 생활지도 또한 막막했다. 누구에게도 전문가로서의 완벽한 ‘정답’은 없다. 그렇지만 하지 말아야 할 명백한 ‘오답’은 존재할 것이다. 내가 행동하는 것이 ‘오답’이 될까봐 두려웠다. 발령받자마자 충분한 준비 없이 맨 땅에 헤딩하기로 학급을 운영하니 고민이 많았다. 그런데 고민을 이야기할 때 사람마다(선생님마다) 대처하는 방법이나 철학이 달라서 나는 어떤 방법으로 해야 할지 혼란스러웠다. 마치 아버지와 아들이 당나귀를 시장에 팔러 가는 우화 같았다.
당나귀를 끌고 가는데 어떤 사람이 어리석게 끌고 가느니 타고 가라고 한다. 그래서 아버지가 당나귀를 타고 가는데 마주친 아낙네들이 어린 아이를 두고 아버지가 인정머리 없이 타고 간다고 한다. 그래서 이번에는 아들을 태운다. 길을 걷다가 노인이 요즘 어린 것들은 효심이 없다고 욕을 한다. 아버지는 어찌 해도 욕을 먹으니 함께 타고 가자고 한다.
한참 가다가 당나귀가 낑낑대는 것을 보고 지나가던 농부가 부자를 혼낸다. 당나귀가 말못하는 짐승이지만 얼마나 힘들겠냐고 하고, 결국 두 사람이 당나귀를 메고 가게 된다. 그러다가 다리 위에서 당나귀가 발버둥을 쳐 물에 풍덩 빠졌다는 이야기도 있고, 아버지와 아들을 걷어차고 달아나버렸다는 이야기도 있다.
조언을 구할 때도 조심해야 한다는 걸 알았다. 촘촘히 나누지 못한 대화는 때로는 많은 오해를 부른다. 같은 단어를 사람들은 저마다 다르게 사용한다. 예를 들어 교사의‘사랑’에도 허용적인 사랑이 있고, 친구처럼 대하는 사랑이 있고, 친절하고 단호한 사랑 등 전혀 다른 것이 하나의 단어로 묶이니까.
특히 초반에 생활지도에서 막막했던 일들을 떠올려 본다.
- 아이들이 심하게 다투는데 자신의 잘못은 전혀 인정하지 않을 때.
억지로 권위로 동의하게 하는 것도 바라지 않는다. 그렇지만 설명해주어도 전혀 동의하지 않는 아이들이 있다. 안타깝지만 말 그대로 공감하는 능력이 아직 ‘부족’하다. 체력이 약한 아이에게 억지로 운동을 시킨다고 되지 않는 것과 마찬가지로.. 일단 감정이 격해진 상태에서 바로 해결하려고 하면 잘 되지 않는다. (생각해보면 어른인 나도 그렇다.)
PDC나 TET 등의 이론이 생활지도에 도움이 되었다. 일단 조금 식히도록 한 뒤 각자의 마음을 알아주며 서로 이해하도록 해보고, 행동에는 명확한 한계를 정해주는 것을 기본으로 생각하고 있다. 때로 내 감정이 흔들리는 상태거나 몸이 피곤하면 강한 말투로 재판관처럼 행동하고픈 유혹에 빠지기도 하여, 계속 수행이 필요하다.
- 아이들의 싸움, 따돌림에 내 중재가 효과가 없어보일 때.
위와 비슷한 상황인데 따돌림이라는 특수한 상황에는 예민한 아이들 상호작용에 걱정이 많아진다. 방치해서도 안 되지만 무조건 강하게 개입하는 것이 치명적인 실수가 되기도 한다.
나의 경우 걱정과 돕고 싶은 마음이 치솟고, 따돌리는 아이들에게 속상한 마음이 든다는 것을 스스로 의식하고 내려놓으려 노력한다. 노련하게 대처하려면 정말 많은 연구와 내공이 필요한 것 같다.
- 수업에 계속 집중하지 못하고 산만한데 행동 수정의 효과가 없다고 느낄 때
원인이나 해결방법은 상황마다 달라서 더 어렵다.
담임의 애정과 노력으로 개선되기도 하고, 학급 분위기가 아이에게 영향을 미쳐 변화가 일어나기도 하고, 그러나 오히려 담임과 반 아이들만 소진되는데 비해 큰 변화가 끝까지 없기도 하고..
그 아이 하나만 대하는 것이 아니다보니 교사의 역할에 고민이 될 수밖에 없다. 아이들에게 어느 정도까지 이해해주길 부탁해야 하는지, 내가 어디까지 허용해야 하는지.
(어떤 경우엔 부모님이 일찍 '진단'을 받았더라면 이렇게까지 심해지지 않았을 아이도 있어서 안타까운 일도 종종 있다. 그러나 무조건 '병'이라는 프레임이 도움되지 않을 때도 있다. 정말 '케바케(case by case)'다. )
- 기본적인 교내 규칙을 반복지도해도 효과가 아쉬울 때.
지나치게 허용적이라면 당연히 문제가 되겠으나 무조건 선생님이 강하게(?) 잡는다고 되는 일도 아니다. 일단 아이들의 동선이나 심리를 생각해보고 제대로 이해, 실천할 수 있게 안내해야 서로 시행착오가 적으니까. 같은 학년을 담임하고 있는 동료 선생님들과 함께 지도하기 위해 묻고 배우기도 했다. 연습, 시범, 상황극 등이 생각보다 효과적이었다.
- 학부모와의 갈등.
학부모가 불만을 제기하는 것이 전부 힘들지는 않았다. 오히려 내가 미처 생각하지 못한 부분이라 고마운 적도 많았으니까. 물론, 처음 발령났을 때에는 학부모님과의 간단한 대화조차 긴장을 많이 했지만... (반쯤 말을 놓으며 정말 어리시네요, 결혼 안하셨죠?, 라는 첫인사를 하는 사람에게 기분이 상하기도 하고.) 어쨌든, 대화하다보면 아이의 '역사'와 가정의 분위기를 짐작할 수 있어서 아이를 지도하는 데 도움이 되었다.
요즘 많이 있는 사례 중 하나로 아이 사이에 서로 잘못한 일에 자기 아이만 피해자로 내세우며 교사를 협박하듯이 대할 때 난감함을 겪게 될 것이다.
그런 경우에 대부분 그런 행동의 이유는 아이에 대한 ‘사랑’이라기보다 결국 자신의 왜곡된 피해의식을 아이에게 투사하기 때문이었다. 사회나 학교에 대해 혹은 힘든 육아 때문에 쌓아온 불만과 억울한 감정들이 켜켜이 쌓여 가득찬 쌀주머니처럼 되어 있다가 작은 일이 바늘처럼 주머니를 콕, 찌르면 감정이 쏟아져 나오는 것이다. 막상 아이가 느끼는 감정에 큰 관심이 없고 자신의 감정의 극단까지 끌어내어 분풀이하는 모습을 볼 때 아이도, 그 사람도 참 안타깝기만 했다.
교사가 부모 교육까지 케어할 수 있는 역량이 된다면 더욱 바람직하겠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학교에서 어떤 서비스와 처방을 내린다 한들 본인의 참여 의지가 없으면 어떤 처방이나 상담을 하더라도 큰 효과가 없다는 사실이다.
5. 힘내요
사람이 한 번에 바뀌는 일, 서로 오해한 것이 순식간에 풀리는 일은 없기에, 꾸준히 지도하고 조심스럽게 접근해야 하는 것이 당연하다. 그래서 위의 상황은 지금도, 더 경력이 쌓여도 조심스러운 일들일 것이다. 그리고 아이들과 서로 달달 지지고 볶는 교실에서 항상 감정에 초연해진다는 게 어디 가능한가.
다만 그때는 당황스러움에 덧붙여 지금 당장 변하지 않는 것이 다 내 잘못인 줄 알고 더더욱 괴로웠다. 그 때의 나와 같은 후배가 있다면 말해주고 싶다. 이 상황에 선생님이 하면 좋을 일과 선생님의 책임이 분명히 존재하니 그것을 찾아내고 상황을 이겨내 보아요. 그렇지만, 절대 선생님의 ‘잘못’이라고 괴로워하지 말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