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술수업] 이런 만화 수업은 처음일겁니다. (수업)
저는 만화를 정말 좋아합니다.
어렸을 때 동생이랑 '만화로 보는 그리스 로마 신화'만화책을 보며 마르고 닳도록 따라 그렸어요.
하지만 그 때 따라그리던 만화의 그림체가 제 손에는 하나도 남아있지 않습니다.
돌이켜 생각해보면 저는 그림과 같이 등장하는 만화가 머리 속으로 들어와서 저절로 애니매이션이 되는 그 경험을 즐겼던 것 같아요.
이번 글에서는 만화 수업을 '체험' 영역과 '표현' 영역으로 나누어 살펴보겠습니다
체험
이 만화에서 그림을 그리는 능력은 중요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별로 연습하지도 않았어요. 제일 먼저 아이들과 한 것은 '만화 찾아보기'입니다.
#1. 만화 찾아보기
학생들에게 만화에 대해 이야기해보라고 하면 'WHO'시리즈를 가장 많이 이야기합니다. 그 다음에는 고학년일수록 웹툰 이야기를 많이해요.
1. 만화책
엉덩이 탐정? 메이플스토리? 흔한남매??
초등학생들의 만화 세계는 그들만의 리그가 따로 존재하더군요. 학교 교실에서 아이들이 가져온 학습만화만 봤던터라 만화책 이야기를 들을 때 재미있기도 하면서 신기했어요.
2. 웹툰
웹툰은 스마트폰만 있다면 언제 어디서든 만화를 무제한으로 볼 수 있습니다. 스크롤을 넘기는 것이 책장을 넘기는 것과도 같죠. 단, 화면의 폭이 정해져 있다는 것이 특징입니다. 네*버 웹툰에서는 컷툰이라고 해서 한 화면에 한 장씩, 터치하면 다음 장으로 넘어가는 형태의 만화도 있었어요. 마치 만화책의 느낌을 스마트폰으로 가져온 듯 했습니다.
3. 애니매이션
아이들이 아주 신이 나서 이야기합니다. TV에서 바영되는 모든 애니메이션 이름이 다 나올 심산이었어요. 그렇게 열정적으로 발표하는 모습은 또 처음봤습니다. 고학년의 경우 숨겨왔던 자신의 덕력을 발휘할 타이밍이기도 합니다.
세상에서 제일 즐거운 표정으로 줄줄 말하는 아이들에게 갑자기 만화를 그리자고 하면 아이들은 많이 부담스러워합니다.
머리 속에 떠올린 만화들은 어마어마하게 잘 그린 만화들이니까요.
아이들은 자신이 읽었던 만화들만큼 재미있게 잘 그리지 못한다는 사실을 이미 알고있습니다.
그래서 만화를 그린다는 생각을 빼주는 것이 좋아요.
그럼 아이들에게 이렇게 주문을 걸어봅시다.
"우리는 만화를 그리는 것이 아니라 제작할거야. 요즘 방식으로 말이야!"
#2. 만화의 형태와 제작방식
1. 형태
아이들이 쏟아낸 만화의 형태를 분류했습니다. 가장 큰 분류 기준은 '보는 방법'입니다. 종이로 만화를 보느냐, 화면으로 만화를 보느냐 두 가지로 나뉩니다.
종이로 보는 만화는 만화책이 90%입니다. 예전에는 신문에 만평도 많았지만 요즘 신문을 구독하는...곳.....이...?
네, 아이들이 접할 수 있는 종이 만화는 만화책이 전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화면으로 보는 만화는 웹툰(스마트폰과 PC), TV 애니메이션, 영화 애니메이션 등이 있습니다.
여기서 또 분류를 하면 움직이는 만화와 움직이지 않는 만화로 나눌 수 있습니다.
이렇게 만화 형태를 분류하다보면 아이들은 자연스럽게 만화의 제작 방식을 생각하기 때문에 선생님은 다음 단계로 넘어가시면 됩니다.
2. 제작 방식
만화 제작방식은 기술의 발전과 발맞추어 다양하게 변했고, 만화 시장을 어마어마하게 확장시켰습니다.
수만장의 그림을 연결하여 만화를 만들던 시장에는 디지털 기술이 도입되어 효율성을 높였습니다. 게다가 화려한 표현뿐만 아니라 사실적인 3D구현이 가능합니다. 종이에 인쇄된 사진은 이제 기계 속으로 들어갔습니다.
세상은 이렇게 변했는데, 네모난 종이에만 그림을 그리면 아이들은 당연히 재미가 없어요.
디지털 드로잉이 많이 퍼졌지만 사실 교실에서 쉽게 도전하기는 힘듭니다.
이유는
- 아이들이 모두 기계를 잘 다루지 않는다.
- 학교에 보급된 기계는 한계가 있다.
- 교사인 내가 디지털 드로잉을 잘 못하면 시도할 수 없다.
- 자동으로 선 보정이 되는 디지털 드로잉은 모든 미술 표현을 대신할 수 없다.
정도가 있습니다.
(수업은 선생님이 자신이 있어야 성공합니다. 내가 하지 못하는 디지털 드로잉을 시대에 발맞춘다고 억지로 하실 필요는 없어요. 오히려 기술적인 문제에 막혀 아이들이 제대로 된 표현활동을 할 수 없을지도 모릅니다.)
움직이지 않는 만화의 경우 장면들을 그려서 배치합니다.
종이에 그릴 수도 있고 컴퓨터로 그릴 수도 있어요. 어떤 크기의 종이에, 혹은 어떤 화면 크기로 배치하느냐에 따라서 제작 방식은 또 달라집니다.
움직이는 만화의 경우 움직이게 하기 위해서 많은 방법을 사용합니다.
스톱모션으로 제작하기 위해 사진을 찍을 수도 있고, 그림을 조금씩 움직여가며 여러 장의 그림을 이어붙일 수도 있어요. 혹은 디지털 기술을 활용할 수도 있습니다.
몇 가지 팁을 준 다음 아이들이 직접 탐구할 시간을 줍니다.
제작 방식을 탐구하는 시간은 만화를 다른 관점으로 관찰하는 기회를 만들어줍니다.
여태껏 책장 넘기기에 바빴던 아이들이, 휙휙 지나가는 효과에 눈 멀어있던 아이들이 만화를 수업의 도구로 활용하는 시간이기 때문입니다.
만화가 수업의 재료가 된다니, 생각만해도 신나는 수업이 아닌가요?
표현
#1. 이야기 구성
만화는 그림에서 시작......... 하지 않습니다.
만화는 이야기에서 시작합니다. 스토리 작가와 그림 작가가 함께 작업을 시작하는 경우도 많습니다. 그래서 만화에서 중요하는 것은 바로 '이야기'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작방식을 먼저 살펴본 이유는 학생들이 다양한 만화를 살펴보면서 이야기와 구성의 힌트를 얻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만화의 이야기는 생각보다 까다롭습니다.
단순해서도 안되고
너무 장황해서도 안되고
적당한 반전이 있다가도
매력적인 결말이 필요하거든요.
<이야기 도움 얻기>
1. 살펴봤던 만화들에서 마음에 드는 이야기 가져오기
2. 전래동화나 유명한 소설을 각색하기
3. 내가 있었던 일 중에서 재밌었던 일 떠올리기
초등학생 수준에서 아예 처음부터 이야기를 상상해내는 것은 어렵습니다. 다른 곳에서 이야기를 가져와도 된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아이들은 많은 부담을 덜 수 있습니다.
#2. 세로 만화
자신의 이야기가 준비되었다면 어떤 식으로 제작할 것인지 결정합니다. 앞에서 살펴본 다양한 방식들 중 한 가지를 선택해도 좋습니다.
하지만!
학생들에게 너무 많은 선택지를 주면 혼란만 가득합니다. 그래서 저는 이 부분에서 개입했습니다.
"오늘은 웹툰을 종이로 옮겨올겁니다. 웹툰은 어떤 특징이 있나요?"
- 스크롤을 내리면서 본다.
- 세로로 길다.
웹툰이 일반 만화책이랑 가장 큰 다른 점입니다. 어떻게 종이 만화를 세로로 내리냐구요?
준비물 : 16절 도화지, 채색도구
여기서 핵심은 16절 도화지를 세로로 반 자른다는 것!
<16절 도화지를 반으로 잘랐을 때 얻는 효과>
1. 그림의 폭이 좁기 때문에 종이를 채우는 부담감이 내려간다.
2. 만화 컷의 모양을 쉽게 나눌 수 있다.
3. 내용이 길어지면 계속 이어서 그릴 수 있다.
4. 종이가 가득 차지 않아도 원하는 부분에서 끝내고 자를 수 있다.
5. 틀리면 그 부분만 잘라내고 다시 새 종이를 이어붙일 수 있다.
(좌 16절 도화지, 우 A4용지)
4컷 혹은 8컷으로 만든 A4크기의 학습지는 어렵습니다. 네모 안에 한 장면을 넣어야하기때문에 곤란한 경우가 생기기도 합니다.
하지만 16절 도화지 반 정도의 폭은 아이들의 손 크기에 적당합니다. 가로는 제한이 있지만 세로에는 제한이 없기 때문에 원하는대로 컷을 조절할 수 있죠.
그리고 제일 중요한 것은 컷을 이어 그릴 수 있다는 점입니다.
웹툰을 보다보면 '스크롤'을 굉장히 잘 활용한 경우를 찾을 수 있습니다.
스크롤을 내리면서 깊은 바다속으로 들어가는 듯한 느낌을 내기도 하며, 공이 굴러와 주인공에게 닿는 장면을 마치 슬로우 효과를 낸 것처럼 표현할 수도 있습니다.
책장을 넘기면서 보는 만화에서 발전된 효과라고 할 수 있죠.
이런 느낌을 학생들에게 설명하며 세로 만화를 구성하는 방법을 고민하게 만듭니다.
이제 그리기만 하면됩니다.
#3. Tip
1. 1명당 최소 분량은 3장
그래도 3장 정도는 그려야 만화답습니다. 3장정도의 길이가 있어야 이야기에 반전도 들어가고 결말도 들어가게 되거든요. 최소 분량은 정해두고 시작하는 것이 좋습니다.
2. 종이는 많이 쌓아두기
저는 1명당 3장씩 나눠준다음 그보다 더 많은 양의 종이를 쌓아두었습니다. 틀리면 틀린부분을 오리고 새 종이를 이어 붙이면 되니까요. 길게 그리고 싶은 학생들은 자유롭게 가져가 길게 그리게 했습니다.
3. A4도화지에 표지 만들기
16절 도화지는 A4도화지보다 작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A4 도화지를 반 접은 것에 쏙 들어가요. A4도화지를 반 접은 다음 안에 만화를 붙이고 바깥쪽에 표지를 그려주면 그럴듯한 만화책이 완성이 됩니다.
4. 그리기 어려운 장면은 따라그리기
그림 기술이 부족한 학생들은 사람의 포즈나 물건을 잘 묘사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럴 때에는 찾아보고 따라그리면 됩니다. 수업의 목표는 만화가를 배출하는 것이 아니라 아이들이 만화 한 편을 제작하는 것이니까요!
#4. 평가
저는 평가 기준을 두 가지로 잡았습니다.
1. 주제와 흐름이 잘 드러나는 이야기로 구성하였는가?
2. 표현방식을 탐구하고 활용하였는가?
평가 기준을 이렇게 잡으면 더 이상 그림을 잘 그리고 못 그리고가 중요한 수업이 아닙니다.
만화를 다양한 관점으로 탐구하고 그것을 그림에 반영했는지 살펴봐야해요.
결과는?
대.성.공.!
만화를 돌려보면서 댓글을 달아주는 활동까지 했습니다. 자기들끼리 신나서 2편을 그려달라, 이거 숨겨진 뜻이 있냐 질문을 하며 마지막까지 즐겼습니다.
제가 한 것은
1. 자유롭게 만화 이야기를 할 시간을 준 것
2. 16절 도화지를 반으로 잘라서 나눠준 것
이 두 가지 밖에 없습니다.
그림을 잘 그리는 학생에게는 어떤 조건을 주어도 해결해냅니다.
하지만 그림에 자신이 없는 학생들은 그 기술을 보완할 장치들을 마련해주어야합니다. 미술이 지겨운 척 하지만 사실 자기가 할 수 있는 미션이 나오면 은근히 도전해보고 싶어하는 것이 초등학생이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