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 생기부의 추억
생기부 시즌이다.
학년말, 다들 생기부 입력으로 바쁘다. 해마다 읽는데 해마다 헷갈리고, 까먹는다. 생기부훈령이 자주 바뀌다보니 그럴법도 하다. 게다가 한번 틀리면 정정대장을 써야 하니 여간 귀찮은 일이 아니라서, 안그래도 바쁜 대다수 학교의 교무담당 선생님께선 생기부를 적극적으로 검토하라고 아주 신신당부를 하신다.
1. 학교생활기록부의 문자는 무조건 한글 입력
두 해 전 당시 근무하는 교감선생님께서 아이디어를 내셨다. '항상 궁금했습니다'로 시작하는 긴 쪽지의 결론, 학생을 서술하는 생기부 문구 중 몇 개만 '학생 이름을 포함한 중요 개인정보를 모두 지운 후' 학생을 대하는 문장의 서술 자체를 비교해보자는 것이었다. 그제서야 나는 신선한 아이디어 때문에 생기부를 쓰는 관점에 대해 생각해보기 시작했다. 법으로 정해진 생기부를 함부로 손댈 수 없기에 무미건조하고 형식적인 말들이 대부분일 가능성이겠으나, 적어도 행동특성을 기록하는 부분에서는 아이를 대하는 교사의 태도가 드러나기 때문에 약간의 미묘한 차이를 느낄 수 있다. 학생 성장을 바라보는 교사의 관점이 서로 다르게 드러날 수 있는 부분이라 나 또한 학생을 어떻게 바라보며 써야 하는지 생각하게 된 소중한 기회였다. 우리는 그날 각자 정제된 언어로학생 개인정보는 철저히 삭제한 후 간단한 내용을 공유하면서 다음의 차이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됐다.
가. 길이의 차이 (간결하게 쓰느냐, 학생의 사연을 상세하게 쓰느냐)
나. 관점의 차이 (인성을 바라보느냐, 학습을 바라보느냐)
다. 언어의 차이 (???)
당시 나는 다문화학생 1명을 지도하고 있었던터라 학생 어머니의 모국어인 베트남어로 된 통지표를 제공하고 싶었다. 그런데 내가 베트남어를 알리가 없으니 구글 번역기와 파파고의 도움을 얻을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같은 내용을 입력해도 두 번역기가 나타내는 문자에 미묘한 차이가 있어 무엇을 고를지 난감했다. 이걸 어떻게 고칠지 한참을 고민하다가, 아주 간결한 문장으로 2-3마디를 번역한 후, 한글로 작성한 행동특성 내용 맨 뒷편에 베트남어 문장 2-3개를 뒷붙였다.
다음해에 나는 이 생기부를 정정할 수밖에 없었다. 생기부 기재요령에는 '한글'로 입력하되, 부득이한 경우 영문으로 입력할 수 있다고 나와있다. 영문의 입력 경우에도 외국인 성명, 도로명 주소에 포함된 영문, 일반화된 명사(PAPS), 고유명사 등으로 명시두었기 때문이다. 베트남어로 된 생기부를 학부모가 보고 난 후에 지워진 것이라 소기의 목적은 달성하였지만 조금 아쉽고 민망한 추억이다.
2. 교과학습발달상황 반영은 맨 마지막에, 미리 하면 눈물..
일을 빨리 처리해두려는 습관 때문에, 담임이었던 당시 교과목 내용을 모두 기록하고 생기부에 반영하는 것이 조금 빠른 편이었다. 아무 문제 없이 생기부가 통과되었다고 생각했는데, 그 다음해에 생기부 정정 기간이 오면서 문제가 발견됐다. 내가 맡았던 반 학생들의 '영어'교과 성적이 모두 누락되었다는 것이다. 당시 전담선생님이 워낙 학교 업무로 바쁜 탓에 성적 입력을 2월 늦게 입력 완료하였고, 나는 미처 이를 반영하지 못한 채로 생기부를 마감한 것이다. 3단계 평어 입력까진 확인했는데, 학기말종합의견이 누락된 것을 보고 화들짝 놀랐다. 다행히도 다음 선생님께서 잘 발견해주셔서 잘 넘어갔다.
3. 생기부를 대하는 나의 자세
내가 생각하는 생기부란, 간결하지만 따뜻함이 묻어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나는 당신의 자녀뿐만 아니라, 자녀를 둘러싼 가정과 환경에도 관심을 지니고 있다는 마음, 자세한 말보다는 핵심만 지닌 간결함으로 학생의 생활에 전혀 문제가 없음을 보여주고 싶은 마음이 섞여 있었다. 그러다보니 서술은 간결하게 이뤄졌고, 베트남어로 번역된 문장도 '똑똑한 친구입니다, 무엇이든 혼자서 성실히 해냅니다' 정도의 간단한 내용으로 표현했다.
성취기준를 반복해서 서술하되 맨 끝에 그 성취기준에 어느 정도에 도달했는지 단편적으로 언급하는 현재의 생기부 작성 요령으로는 학생의 성장을 이끌어낼 수도 없고, 생기부를 작성하는 교사의 교육적 열의를 북돋을 수도 없다. 보고 들은 것이 있으나 때론 까먹어야 하고, 쓰고 싶은 것이 있으나 대부분 지워야 한다.
학부모는 외계어같이 서술된 생기부를 보면서 '뭘 알 수 있냐'고 불평하지만, 또 한 사람의 인생에 족적을 남기는 교사로선 그렇게밖에 할 수 없는 현실이 슬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훈령으로 규제된 생기부일지라도 조금씩 다른 생기부들이 이 순간에도 계속 작성되고 있을 것이다. 그런데 해가 갈수록, 첫해에 적었던, 길고 창의적이며 세심하게 적었던 문장들이 점점 무뎌지고 기계적, 형식적인 글로 화면을 채우고 있는 나를 발견한다.
애석하게도 나는 여태껏 생기부를 써야 하는 교사로서의 자세나 자질, 관점에 대해 동료와 이야기를 나누거나 토론해본 적이 없다. 법으로 제한된, 매우 중요하고 예민한 문서이기 때문에 쉽게 건드릴 수 없다지만, 한번은 우리가 짚고 넘어가야 할 것들이지 않을까? 학생의 인생을 성장의 관점에서 좀 더 제대로 살펴볼 수 있되, 훨씬 더 많은 내용을 함의할 수 있는 문장으로 적을 수 있는 기회가 마련되면 좋겠다. 대학에서는 예비교사가 미리 고민해보면 좋겠고, 현장에선 쓰나 마나한 초등학교 생기부 작성에 변화를 주는 목소리가 좀더 활발하게 제기되길 기대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