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육의正義]- 학예회 고찰 2
마음의 소리가 들린다. '하기 싫다, 하기 싫다, 하기 싫다....' 여기저기서 들려오는 이 소리들을 녹음하여 각각의 파일로 복사한 후, 겹쳐서 재생하면 어떤 소리가 들릴까? 말도 안되는 망상을 하는 이유는 그만큼 학예회에 대한 트라우마(?)로 인해 심적 부담이 컸기 때문이다. 부담 탓일까, 그닥 유쾌하지 않은 재작년 학예회가 떠올랐다.
2015년 6학년을 할 때였다. 몇몇 아이들이 아이돌 댄스를 하고 싶어 했다. 나는 단호히 거절했다. 내 교육관에 맞지도 않을 뿐더러, 1학기 수학여행에서 우리반 여학생들이 추는 AOA의 '짧은치마'를 보고 기겁한 적이 있어서다. 아이들은 불만을 표현했고, 나는 한발짝 양보해서 당시 무한도전에서 방영하던 90년대 토토가 댄스를 추자고 제안했다. 보러 오는 학부모에게도 반가운 음악이고, 아이들도 인기있는 예능 프로그램의 댄스라 아이들도 만족했다.
그러나 막상 연습에 들어가자 춤을 추자고 했던 아이들이 소극적으로 참여했다. 처음부터 댄스가 싫었던 아이들 마저도 댄스를 하자고 주장하던 아이들의 소극적 태도에 당황했다. 불현듯 매년 이런 일을 반복해야 한다는 생각에 머리가 아파왔다. 학예회 전날까지도 공연의 완성도는 그대로였고, 급기야 나는 학예회 당일 아이들을 독려하기 위해 직접 무대에 올라서야 했다. 가까스로 망신(?)을 피하고 큰 박수를 받으며 공연을 마쳤지만 다음에는 절대로 이런 의미없는 학예회를 하지 않겠다고 다짐했다.
2017년 현재, 나는 아이들과 담판을 지어야 했다. 그 옛날 서희는 거란의 소손녕과 담판을 벌였는데, 자기 요구를 들어주지 않는다며 땅을 내놓으라고 떼를 쓰는 것을 잘 달래고 오히려 땅을 얻었다. 공교롭게도 나는 서씨고, 아이들은 저마다 자신들이 하고 싶은 것을 요구하며 떼를 쓰고 있다. (쓸데없는 역사적 상상력을...) 나는 담판을 짓기 위해 3가지 조건을 내걸고, 그 조건을 이용해 공연의 종류를 결정하자고 했다. 첫째, 3번의 치열한 토론을 할 것. 둘째, 마지막엔 토의로 결정할 것. 셋째, 토의에는 결선투표를 적용해 결정할 것. 아이들은 받아들였다.
3번에 걸친 숙의 과정을 거쳐 우리반은 치어리딩을 하기로 결정했다. 내가 가르칠 수 있는 것이었고, 체육의 표현활동에 포함시킬 수 있어서 내 입장에선 꽤 괜찮은 결과라고 생각했다. 처음부터 태권도를 하자던 아이들과 댄스를 하자던 아이들도 모두 치어리딩의 특성에 녹아 있는 절도있는 동작과 흥겨운 율동 요소를 이해하고는 결과에 만족했다. 춤이 추기 싫다던 남학생들도 3번의 토론을 거쳤기에 흔쾌히 양보하고 열심히 연습하기로 마음먹었다. 무언가를 결정할 때 다른 사람의 입장을 수없이 생각해보도록 유도하고, 결정을 최대한 미루었던 것이 꽤 효과가 있었던 모양이다.
그런데 단 1명이 이 결정을 쉽게 받아들이지 못했다. 평소에도 자신의 의도에 어긋나는 결정이나 결과가 나타날 땐 강하게 감정을 표현하던 터라그간에 경고와 훈육, 대화를 많이 했던 아이다. 순간 화가 턱밑까지 올라왔지만 꾹 참았다. 그 아이를 남겨서 치어리딩이 왜 싫냐고 부드럽게 물었다. 아무렇지 않은 척 다른 이유를 둘러대다가, 계속된 내 물음에 그만 눈물을 쏟으며 이렇게 말했다. "이번에도 치어리딩하면 저는 학예회에만 3번째 치어리딩을 하게 됩니다..." 전혀 예상치 못한 이야기에 내가 할 수 있는 말은 이것 뿐이었다. '네 마음을 충분히 이해한다, 나라도 싫었을 것이다.'
너무나 미안했다. 이 1명의 아이를 위해서 모든 결정을 번복하고 다시 정하고 싶었다. 만약 이 사실을 알았더라면 절차를 어겨서라도 내 권한으로 선택지에 넣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결정된 사항을 되돌리기엔 명분도, 시간도 없었다. 그저 최선을 다해 지도하고 그 학생을 최대한 배려하는 일 외엔 별다른 방법이 없었다. 아이들이 모두 열심히 참여하면서도 즐거움을 느끼도록 내가 직접 시범을 보이면서 아이들의 웃음을 이끌어 내려고 노력했다.
현재 그 아이는 누구보다 열심히 동작을 따라하고 있다. 절도있는 동작도 100점, 순서를 외우는 것도 100점. 마음같아선 가운데에 세우고 싶지만 본인이 사이드에 서겠다고 해서 그대로 놔뒀다. 열심히 하게 된 이유를 물으니 예전에 하던 치어리딩과는 다르다며 오히려 재밌다고 말한다. 가슴을 쓸어내리며 안도했고, 아이에게 감사했다. 다른 아이들은 그 아이의 힘차고 절도있는 동작을 보며 진심으로 감탄하고 칭찬을 했다.
치어리딩이 불편했던 아이들과 내가 어느덧 한마음 한 뜻으로 이렇게나 열심히 연습하고 있다. 어떻게 하면 더 멋있을지 고민하는 우리반을 생각하니 피식 웃음이 나온다. 또한 그렇게나 하기 싫었던 학예회를 이렇게나 열심히 준비하고 있는 내가 참 웃겼다. 학예회가 옳은지, 그른지에 대한 생각은 온데 간데 없고, 이제는 그저 모든 아이들이 이 순간을 즐겼으면 하는 바람이다.
모든 아이들의 욕구를 채울 수 없는 제한된 환경에서 일제화된 공연을 선보여야 하는 현재의 학예회에 대해 여전히 회의적이지만, 학예회에 임하는 우리의 방법과 자세만은 옳다고 믿는다. 옳지 않다고 믿었던 학예회 덕분에 아이들은 숙고의 과정을 경험했고, 그 결과에 대해 다소 불편하더라도 받아들였으니 그것으로 이미 교육적인 의미는 충분하지 않을까. 이제 남은 것은 이번주 목요일, 무대를 우리 것으로 만드는 일 뿐이다. 내일 아침에는 누구보다 멋진 무대로 소중한 추억을 만들자고 말해 볼 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