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곳에선 나비로 날기를.
나는 자책하고 또 자책했다.
왜 방역한다는 걸 알면서도 그대로 뒀을까.
방역의 독한 약에 취해 애벌레는 힘을 펴지 못하고 비실비실거리고 있었다. 싱싱한 잎을 갖다줘도 먹질 못하고 독약을 먹은 것처럼 몸을 가누지 못했다. 안타까운 마음에 벌레에게 묻은 약이 없어지길 바라며 분무기로 멀리서 물을 뿌려주었다. 애벌레들은 잠깐 정신이 드는 듯 했지만, 마치 물을 뿌려서 정신 차리게 하는 것마냥 아주 잠깐만 움직일 뿐이었다.
'이렇게 죽으면 안 돼.'
공휴일에 코로나-19로 인한 교실 방역을 한다고 공지가 내려왔었고, 그 방역 화학약품에 애벌레들이 그대로 노출되었다. 방역한다는 걸 알고 있으면서도 복도에 꺼내놓지 않고 교실에 두고 간 내 탓이다. 밤사이에 화학약품이 가득한 교실의 공기를 마신 애벌레들의 상태는 시간이 갈수록 눈에 띄게 안 좋아졌다. 인터넷에 '배추흰나비 살리는 법'이라고 검색해보았으나 검색 결과는 반대였다. 배추흰나비는 농가에 피해를 주는 해충으로 분류되며, 검색 결과에는 배추흰나비를 박멸하는 법만 자세히 나왔다. 그 뒤로 나는 내가 애벌레들을 살리기 위해 할 수 있는 모든 방법을 동원하였다. 매일 아침 애벌레를 더 열심히 관찰하고, 물을 뿌려주고, 잎사귀도 바꿔주었다. 살려면 케일 잎을 조금이라도 먹어야 하는데, 마음에 안 드는 건지 좋아하던 케일 잎을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식음을 전폐하는 모습은 안타깝기만 했다. 곧 번데기가 될뻔한 우람한 애벌레도 번데기가 될 자리를 찾지 못해 이틀 넘게 방황하였다.
햇볕을 쬐는 게 좋을까 싶어서 애벌레 집을 창가에 가져갔다, 그늘에 가져갔다, 집을 이리저리 옮겨주기도 했다. 그러다 어디라도 좋으니 가장 건강한 녀석이 번데기가 되길 바랐다. 그 녀석은 방역 뒤에도 괜찮아 보였다. 그런데 무슨 이유인지 왔다 갔다 기어 다니기만 할 뿐이었다. 타이밍을 놓치면 번데기가 못 될 텐데. 그러는 사이 어느새 주말이 되었다.
토요일 아침.
눈을 뜨자마자 교실 애벌레 생각이 났다. 어제 햇볕을 쬔다고 창가에 두곤 그대로 퇴근을 했다. 오늘은 마침 여름으로 접어들어 햇볕이 강해 이대로 창가에서 주말을 보내며 애벌레가 햇빛에 다 말라 죽을 것 같았다. 안 그래도 아픈 애들인데 강한 햇빛을 견딜 리가 없다. 집에서 학교까지 거리는 1시간 반이나 거리라 엄두가 나지 않아 슬쩍 같은 학년 카톡방에 톡을 남겼다.
"오늘 학교 가시는 분 있나요?"
묻자마자 돌아오는 답변.
"왜? 애벌레 때문이야?"
방역 후에 모든 반의 애벌레가 맥을 못 추고 있어서 옆 반 선생님도 애벌레를 걱정하고 계셨다.
바로 전화를 드렸다.
"제가 바보같이 창가에 애벌레 집을 두고 왔는데 오늘 햇볕이 너무 좋아서요. 걱정돼서 혹시 학교 갈 일 있으신지 궁금했어요."
학교 근처에 사는 옆 반 샘이 학교에 갈 겸 애벌레 집을 옮겨주기로 하셨다.
"내가 옮겨놨어. 근데 애벌레들 상태 안 좋더라."
"감사합니다."
최악은 면했다고 안도했는데, 그건 거만한 인간의 관점이었다. 그 다음 주 월요일, 가장 건강하던 녀석은 번데기가 되지 못한 채로 말라 죽었고, 나머지 애벌레들도 마지막 죽을 시간만을 기다리고 있는 것 같았다. 햇빛을 피해 더 안전한 곳으로 옮겨주었다고 생각했지만 살충제를 맞은 애벌레에겐 그저 병동이 옮겨진 것이었다. 애벌레들은 자기들의 죽음을 예견이라도 한 듯, 남은 힘을 짜내 서로에게 기댔다. 그 모습에 찡-했다. 가는 순간을 알고 서로에게 위로를 건네는 걸까. 이제는 내가 분무기로 물을 뿌려도 잠깐 꿈틀거릴 뿐 기어가지도 움직이지도 않는다. 아픈 벌레들을 더 붙잡고 싶은 건 내 욕심이었다. 힘든 애벌레들을 놓아주었다.
그렇게 우리 반의 애벌레들은 자취를 감췄다. 나비가 될 때까지 책임감 있게 기르지 못한 애벌레에게도, 어린이들이 온라인 수업하는 동안 사육장을 잘 지키지 못해 우리 반 애들에게도 미안했다.
모든 동물은 그대로 자연 상태에서 자랄 때 가장 잘 자란다. 사육을 목적으로 데리고 온 애벌레들은 답답함을 견디지 못하였고, 먹을 잎이 없는 곳에서 잎사귀를 찾다 객사할 뻔했고, 그나마 살아남은 애벌레도 방역 화학품에 쓰러졌다. 내겐 반려동물도 없고, 애도 없지만, 어느 날 애벌레가 찾아왔다. 처음엔 동물 한살이를 배우려는 목적으로 들여온 애벌레였다. 알은 먼지보다 작아 현미경으로 봐야 조금 보일까 말까 하던, 존재조차 희미한 생명이었다. 시간을 보내며 들여다볼수록, 함께 지내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애벌레는 내게 동물을 사랑하는 게 어떤 마음인지, 살아있는 생명체에게 애정을 쏟는 게 어떤 의미인지 어렴풋이 느낄 수 있었다. 애벌레가 떠나간 자리는 언제 그랬냐는 듯 익숙해졌지만, 밖에서 나비를 보는 내 마음은 달라졌다. 부디 애벌레들이 그곳에서는 나비로 자유로이 날아다니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