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육연극을 배우다11] 역할극 대신 즉흥연기
교육연극을 배우면서 ‘즉흥연기’를 처음 만났던, 지난 글[교육연극을 배우다 10]즉흥연기, 어렵지 않아요 (클릭하시면 링크로 넘어갑니다)에서 이어집니다. 이전 이야기를 먼저 읽고 오시면 이해하는데 도움이 되실 거예요.
학교에서 사회 수업을 준비하고 있었다. 준비하는 수업은 2년 전 신규시절에 가르쳤던 적이 있던 내용이었다.
역시 신규시절이라 열심히 준비한 자료들이 저장되어 있었다. 그 중'역할극'이 눈에 띈다. 그 자료를 보며 2년 전 수업의 기억을 떠올려본다.
2년 전에는 교과서에 나와 있는 대로 마지막 활동을 역할극으로 준비했었다. 대본을 웃기게 짜고 싶어 했던 ‘개성파’와 모범답안을 만들고 싶어 했던 ‘정석파’ 학생들이 모둠 안에서 많이 다투었다. 1차시로 계획한 수업이었지만 대본을 짜는 시간이 오래 걸려 역할극 발표는 다음 수업시간으로 미뤄졌다. 학생들은 대본을 외우지 못했고, 친구들 앞에서 발표를 한다니 더더욱 긴장해서 대본을 ‘국어책 읽듯’ 읽으며 발표를 마쳤었다.
물론 그런 발표도 아이들은 꺄르르 꺄르르 웃으며 즐거워 했다. 그렇지만 준비하고 발표하는 것에 들이는 시간이 너무 길어 피드백을 충분히 나누지 못한 것이 아쉬웠다. 연기했던 상황을 실제로 자신과 얼마나 관련지을 수 있을지도 의문이었다. 그래서 이번에는 역할극 대신‘즉흥연기’를 활용해보기로 했다.
<수업 모습>
1. 즉흥연기 연습: 버스에서 발을 밟은 상황
“오늘은 즉흥 연기를 해볼 거예요.
여러분은 지금, 아침 등굣길 만원 버스에 있습니다. 그런데 버스가 휘청~ 하네요!
가위바위보 이긴 사람~? (손 들어보도록)
이 사람들은, 버스가 흔들리면서 발을 아주 아프게 밟혔어요.
아마 내 앞에 있는 사람이 발을 밟은 것 같아요. 바로 여러분 짝이요!
가위바위보 진 사람~? (손 들어보도록)
내가 발을 밟은 것이 아닌 것 같은 억울한 상황입니다.
내가 사과를 하거나, 상대방의 사과를 받아야 합니다.
자, 이긴 사람이 아야! 하며 시작합니다.
레디~ 액션!”
원한다면 일어나도 된다고 하니, 하나 둘 자연스럽게 다들 일어난다. 혹시 어려워하는 학생이 있을까 학생들을 살피는데 모두들 주변 눈치 보지 않고 짝꿍의 얼굴에 눈이 고정되어 있다. 대부분 고성이 오가는 와중이지만 누구 하나 웃지 않고 있는 아이들이 없다.
어느 정도 시간을 주고 짝꿍과의 연기를 마무리한다.
사과를 받아냈는지 확인하고 3팀 정도 발표를 하였다. 처음이기에 자신감있게 자원하는 팀을 위주로 발표를 해보았다.
즉흥연기를 처음 배울 때 어색해했던 나와 달리 학생들은 바로 빠져드는가 보다.
역시 아이들은 훌륭한 연기자이다!
아쉽지만, 시간의 한계가 있기에 지금이 ‘사회시간’이고, 그동안 ‘가족’에 대해서 계속 배워왔던 것을 상기시키며 다음 활동으로 넘어간다.
2. 가족 즉흥연기1. 엄마 vs. 아들
“ ...네, 우리가 그동안 이런 내용들을 배웠어요.
하지만, 가족들 사이에 항상 행복한 일들만 있지는 않습니다.
다시 짝과 함께 가위 바위 보!
이긴 사람?(손 들어보도록) 이번에는, 엄마가 될 거예요.
진 사람(손 들어보도록)은 아들입니다.
엄마는, 아들이 자꾸 숙제도 안하고~ 준비물도 안 챙기고~ 학교 가야되는데 자꾸 늦잠도 자고~ 그래서 답답함이 잔뜩 쌓여있어요.
아들은 딱!! 이제 방금 숙제를 시작 하려고 하는데~ 엄마가 방에 들어와서는 잔소리를 늘어놓습니다. 아들도 짜증이 나겠지요?
자 아들들! 책상에 숙제 펴놓고 앉아있고~
엄마들은 아들 방에 살짝 들어가면서 상황 시작합니다.
화해를 해도 좋고, 아니어도 좋아요. 대화를 통해서 상황을 풀어가 보세요.
레디, 액션! “
쓰윽 문을 밀며 들어가는 엄마, 똑똑 노크하는 엄마, 다짜고짜 소리를 지르는 엄마,...
나는 짝꿍과 연기하는 아이들의 모습을 살핀다.
어느 정도 시간을 주어 충분히 연기를 마무리하도록 한다.
이번에는 화해한 팀/ 화해 못 한 팀을 나누어 손 들어보도록 하고 각각 2팀씩 발표를 해보았다. 다들 발표를 하고 싶어해서, 어느 팀이 발표할지 아주 고민이 되었다. 즉흥연기를 하는 모습을 내가 관찰하면서 같이 이야기 나누어볼만한 특이점이 보였던 팀들을 위주로 발표를 해보았다.
아들의 절대적인 굽신거림으로 급 화해를 하기도 하고,
처음엔 화를 내더라도 자신의 마음을 잘 표현해서 화해를 하기도 한다.
같은 말을 반복하며 소리치고 과거의 일까지 꺼내 상대방을 더 짜증나게 하기도 하고,
화해까지는 못 했지만 나름의 타협을 하는 팀도 있었다.
즉흥연기를 하고 보는 데에는 그렇게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는다.
덕분에 시간 여유가 있기에, 2년 전에 못 했던 것이 아쉬웠던 피드백 시간을 충분히 가졌다.
발표를 한 사람이 나와 어떻게 다른 반응을 했는지,
나라면 어떻게 이어갔을지 다시 한 번 생각해보고
어떻게 갈등을 해결할 수 있을지 솔직한 이야기를 나눈다.
학생들이 완전히 빠져들고 있는 것 같다.
이 번에도 시간의 한계를 아쉬워하며 다음 활동으로 넘어간다.
3. 가족 즉흥연기2. 엄마 vs. 아빠
“짝과 함께 가위 바위 보!
이긴 사람?(손 들어보도록) 이번에도, 엄마!
진 사람?(손 들어보도록) 이번에는 아빠가 되어 봅시다.
자, 때는 토요일 9시입니다. 아빠는 전 날 일을 마치고 집에 밤 11시가 넘어 들어오셨어요. 너~무 피곤하겠지요? 꾸벅꾸벅 졸면서 쇼파에 누워 TV를 보고 있습니다.
엄마! 주말에 아이들이랑 같이 놀러가기로 약속해놓고는, 쇼파에 누워만 있는 남편에게 무슨 말을 하고싶을까요?
이번에도 마찬가지로 대화로 어떻게든 결론을 내어보세요.
레디, 액션~!“
벌써 3번째 즉흥연기이다. 이번에는 자세한 시작 대사나 동작을 알려주지 않아도 다들 알아서 연기를 시작한다.
이번에도 화해를 했는지/못 했는지 확인하고 한 팀씩 발표해보기로 한다.
먼저 잘 화해가 된 한 팀의 발표를 보고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리고 화해가 안 된 팀의 발표를 할 차례에는 발표를 하지 않는 학생들에게 새로운 역할을 주었다.
“자, 이제 앉아있는 여러분은 엄마 아빠를 바라보는 자녀입니다.
엄마 아빠의 대화를 보다가,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꼭! 한마디 해야겠다~싶은 상황이 나오면
손을 들고 하고 싶은 말을 해볼게요.”
오늘 수업을 준비하며 제일 중요하다고 생각한 활동이었다. 교실에서의 수업이 아니라, 집에서 가족들 속의 ‘자녀’의 역할로 돌아갈 학생들이기 때문이었다. 자녀로서, 가족의 어떻게 갈등을 대하는지 더 자세히 보고 이야기 해보고 싶었다.
자녀들은 대부분 놀러가야 하는데 약속을 지키지 않는 아빠에게 화를 냈다.
저마다 손을 들고 격양된 목소리로, 아빠의 자존심을 긁는 말들을 성토한다.
두둥. 아빠 역할을 하던 학생이다. 여기저기 소리치며 성토하는 말이 힘들게 다가왔나보다. 자리로 돌아가 왈칵 눈물을 쏟아낸다. 아빠에게 분노를 쏟아내던 자녀들도 숙연해진다.
예상치 못한 상황이라 조금 당황스러웠지만, 정신을 차려야겠다고 마음을 다잡는다.
"괜찮다. 그렇게 하자. 충분히 잘 해주었다. 고맙다." 이야기를 건넨다. 이 수업시간이 그동안 내가 연극 수업에서 배웠던 것처럼 학생의 마음을 안전하게 받아줄 수 있는 시간이 되기를 바라본다.
활동을 정리하고 울던 학생은 자리로 돌아가 짝꿍과 이야기하며 마음을 진정시켰고, 수업을 마무리할 시간이 다가온다.
4. 마무리
“오늘 우리가 연기했던 장면들, 혹시 여러분의 가족들과 비슷한 경험을 해본 적이 있나요?
2개의 상황만을 연기해보았지만 (교과서에 나온 예시들을 훑으며) 가족 사이에는 다양한 갈등이 일어나기도 하죠.”
처음 계획과 달리 교과서는 가볍게만 훑었다.
그리고 울던 학생이 진정된 것을 확인하고 조심스레 물었다.
“ㅅㅇ(아빠 역할을 연기했던 학생)아,
아까 자녀들이 다같이 아빠에게 이야기를 할 때 마음이 어땠어요?”
“그랬대요. (다른 학생들을 보며) 자녀로서 약속을 안 지킨 아빠에게 아쉬운 마음이 들겠지만,
아까 그런 분위기에서 속상했을 아빠의 마음, 이해가 되나요?
오늘 수업에서는 엄마, 아빠, 아들까지 어려분이 다양한 역할을 해보았어요.
자 그럼 여러분들의 집에 돌아가서, 여러분의 역할은 무엇인가요?
네, 자녀이지요. 가끔은 가족 안에서 여러분이 끼어들지도 못할 문제도 생기고,
때로는 여러분이 상처를 받는 문제 상황도 생겨요.
하지만, 화내는 말로, 미운 말로 소리치기만 했던 아까의 상황에서 갈등이 해결되었나요?
정말 여러분이 집으로 돌아가 가족들 속의 ‘내’가 되었을 때,
어떻게 갈등을 잘 해결할 수 있을까요?"
...
아이들은 잘 대답하지 못한다. 역할극 대본을 쓸 때 쉽게 나왔을 뻔한 모범답안이, 아이들 입에서 쉽게 나오지 않는다. 그만큼 아이들은 고민하고 있는 것이다.
나도 굳이 답을 내리지 않는다. 각자 가족의 문제는 다 다르고, 다른 가족들의 반응도, 학생들이 문제를 대처하는 방법도 다 다를 테니까. ‘앞으로도 계속 고민해나가자’고 이야기하며 수업을 마무리하였다.
*ㅅㅇ이와는 쉬는시간에 따로 더 이야기를 나누며 마음을 살폈습니다.
즉흥연기를 적용한 수업의 한 모습입니다. 저는 이 날 수업으로 즉흥연기의 매력에 푹 ! 빠졌어요.
/ 즉흥연기는 형식적인 대본 쓰기, 외우기, 발표의 과정이 필요 없습니다.
그 대신 시간을 아껴 보다 많은 상황을 직접 연기해보거나 상황에 대해 더 깊은 이야기를 나눌 수 있었습니다.
/ 무대에 대한 부담이 적습니다.
역할극은 왠만하면 모든 팀이 다 준비된 ‘발표’를 해야 하지요. 저는 주변 친구들의 눈치를 많이 보는 성격이라 학창시절 이런 기회에서 부담 속에 제대로 상황에 집중을 못 하고 쑥스러워했었어요. 반면에 즉흥연기는 발표가 목적이 아닙니다. 연습이나 준비가 따로 없이 다같이 동시에 시작하고 그 자체가 연기가되지요. 다들 각자 자신의 짝꿍에게만 집중하고 있으므로 다른 친구들이 나를 어떻게 볼지 신경을 덜 쓰게 됩니다. 짝꿍과 대화를 나눌 수만 있다면 별다른 연기력이 없어도 충분한 것이지요.
함께 더 이야기를 나누기 위해 발표를 하더라도 대본을 따로 외울 필요 없이 방금 짝꿍과 했던 것을 재연하는 것이기에 국어책을 읽는 것 같은 역할극 발표보다 훨씬 자연스럽더라고요. 물론 즉흥적으로 내뱉은 대사들을 잊어버리고 가끔은 완전히 다른 발표가 되기도 하지만, 그런들 어떠한가요!
대본이 존재하지 않으므로 틀린 것이 없어 괜찮습니다.
/ 학생들의 본색이 드러납니다.
내가 아닌 역할을 입는다고 하더라도 즉흥연기를 할 때는 아무래도 자신이 익숙한 모습이 흘러나옵니다.이 날 수업에서도 갈등을 두루뭉술 넘기려 하기도 하고, 따박따박 따지기도 하고, 삐지거나, 흥분해서 소리만 지르고 별 대화는 되지 않는 학생들도 있었습니다. 우리의 실제 삶의 모습도 그렇잖아요. 항상 교과서같은 정답만을 말하며 살지 않는 걸요. 그래서 ‘잘 화해한 팀’이 아닌‘화해가 안 된 팀’을 발표할 때 더 생각할 거리, 이야기 거리가 많아져서 좋았습니다.
ㅎㄴ이의 연기가 기억이 납니다. ㅎㄴ은 평소에 친구들을 잘 챙기고 문제가 생겨도 좋게좋게 해결하도록 분위기를 이끌어가는 학생이었어요,
그런데 ‘엄마vs.아들’의 연기에서 엄마의 역할을 입고는 잔소리가 폭발했습니다. 아들이 뭐라 변명하든 머뭇거리지도 않고 따박따박 쏘아대는 연기가 아주 명품이었지요.
수업시간에 에너지를 표출한 덕분인지 이 날 급식시간에 ㅎㄴ은 평소보다 더 발랄까불한 모습이었어요. “오우 ㅎㄴ, 까불이네~”하는 제 말에“흐흐흐~ 이게 나지~~”하며 웃더라고요. 저는 평소에 친절하고 친구들을 잘 챙기는 ㅎㄴ의 모습도 고맙지만, 조금 더 솔직한 까불이 ㅎㄴ의 모습도 참 좋았습니다.
물론, 학생들이 솔직해지면 교실 안에서는 더 많은 역동들이 일어날 수도 있어요. 그래도 그 덕분에 저도 교실 안에서의 가면이 조금씩 벗어지는 것 같았습니다.
/ 상황을 ‘자신에게 닥친 문제’로 가지고 와서 고민할 수 있습니다.
오늘 수업, 사실 도덕수업 내용같지 않나요? 아마 역할극으로 표현했다면 정답이 잔뜩 나왔을 것이에요. 모범적이지만, 뻔한 답들이요. 반면에 오늘 수업은 답이 나오지 않고‘앞으로 계속 고민하자’고 마무리되었습니다. 그래도 이 고민의 시간이 대본 속 정답을 달달달 읊는 것보다 훨씬 의미있지 않을까요?
자, 수업에서 역할극 대신 즉흥연기!
한 번 해보시면 어떨까요?
/ 서울교대 교육연극지도교사 양성과정을 수료하고 적는 글입니다. 제가 기록한 내용들이 모두 교육연극의 정설이나 정답이 아닐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