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빠는 나오지 않는 그림책, 아이들은 왜 입을 막았을까
아빠는 나오지 않는 그림책, 아이들은 왜 입을 막았을까
[짬내어 그림책 읽는 교실 28] 하이로 부이트라고의 <집으로 가는 길>
가끔 오후 갑자기 비가 내리는 날이 있다. 내가 가르치는 애들은 4학년인데도, 엄마나 아빠가 소나기를 뚫고 아이를 데리러 온다. 휴대전화 너머로 조금 있다 가겠다는 엄마의 목소리를 확인한 아이의 얼굴은 그렇게 밝을 수 없다. 11살이면 다 큰 것 같아도 부모와 함께 걷는 순간을 기다린다.
인생은 홀로 와서 홀로 가는 것이라 하지만, 누군가 옆을 지켜준다면 무척 든든할 것이다. 더구나 어린 시절 따뜻하고 안전한 분위기에서 사랑받으며 자란 아이는 그 힘으로 평생을 산다. 그런데 만약 그렇지 못한 환경에 놓인 아이라면 어떨까. 별안간 비가 쏟아져도 우산 받쳐줄 사람이 없는 아이 말이다. 오늘은 그림책 <집으로 가는 길>을 읽으며 한 소녀의 등굣길에 동행해보려 한다.
남미 콜롬비아가 배경이다. ⓒ노란상상
사자를 바라보는 소녀가 있다. 사자는 소녀보다 다섯 배는 커 보이는데 발을 가지런히 모으고, 입을 다물고 있어 사나워 보이지 않는다. 점으로 콕 찍은 듯 작은 눈이 소녀와 닮았다. 소녀는 사자를 향에 노란 꽃 한 송이를 건네며 말한다.
"안녕! 우리 집까지 함께 가 줄래?"
사자는 순순이 따라나선다. 마치 오래전부터 알고 지낸 사이 같다. 그런데 집까지 같이 가 달라는 이유가 특이하다. 집에 가다가 잠들지 않도록 말동무를 해달라는 것이다. 소녀에게 무슨 사연이 있는 것일까. 기면증(밤에 잠을 충분히 잤어도 낮에 갑자기 졸음에 빠져드는 증세)에라도 걸린 걸까.
학교 정문을 빠져나온 소녀는 하품을 하며 기지개를 켠다. 정말 졸려 보인다. 초등학교에서는 좀처럼 보기 힘든 광경이다. 밤늦게까지 학원을 다니는 중, 고등학생들이야 교실에서 졸 수 있다고 해도 초등학생은 대부분 일찍 잠자리에 들기 때문이다. 하품하는 소녀를 보고 갑자기 우리 반 승우가 따라서 하품했다.
"너도 졸리니?"
"어제 TV 본다고 조금 늦게 자서요."
하품은 전염성이 있다. 몇몇 애들이 덩달아 입을 쩍쩍 벌렸다. 물어보니 휴대폰 게임하느라, 부루마블 하느라 평소보다 덜 잤다고 했는데 그래도 여덟 시간 이상 잤다. 그럼 소녀는 무얼 하길래 길에서 잠들 걱정까지 하는 걸까.
초등학교에서는 좀처럼 보기 힘든 피곤에 절은 소녀 ⓒ노란상상
"우리 집은 아주 멀어서 한참을 걸어가야 해."
소녀는 사자와 함께 언덕길을 오른다. 도로에는 오토바이와 버스가 다니고, 자전거를 타는 사람도 있다. 도로가의 집들은 페인트가 벗겨지고 금이 가서 속 벽돌이 그대로 보인다. 집이 그렇게 멀었다면 다른 사람들처럼 대중교통을 이용하거나 자전거를 타면 될 텐데 소녀는 걷는다.
"육 학년에 현식이 형도 집 엄청 먼데 걸어 다녀요."
승표는 6학년 누나 반에 있는 현식이 형을 떠올렸다. 현식이는 학교에서 차로 10분 거리에 사는데, 눈이 오나 비가 오나 씩씩하게 걸어 다니는 친구다. 물론 현식이는 걷는 게 좋고 운동이 된다고 생각해서 그렇게 한다. 그런데 소녀는 사정이 다른 것 같다.
"서둘러, 빨리 집에 가고 싶어."
마음이 급한지 소녀는 사자 등에 올라탄다. 두터운 갈기를 손으로 꽉 움켜쥐자, 사자가 달리기 시작한다. 소녀의 머리칼이 날리고 그 신박한 모습에 얼이 빠진 주민들은 눈을 왕방울 만하게 뜨고 쳐다본다.
"거기서 잠깐만 기다려 줄래?"
소녀가 먼저 들른 곳은 집이 아니다. 사자가 근처 잔디밭에 누워 고양이들과 얘기하는 동안, 소녀는 어린이집에서 동생을 찾아온다. 어린이집 선생님은 별 다른 말 없이 소녀에게 동생을 건네준다. 소녀는 능숙하게 동생을 안아 든다. 한두 번 해본 솜씨가 아니다.
"왜 저 애가 아기를 데리러 가요? 엄마가 없나?"
사자를 타고 달리는 장면에서도 아무렇지 않아 했던 아이들이 어린이집 장면에서 고개를 갸웃거렸다. 우리 반에도 동생 있는 학생이 꽤 있는데 유치원이나 어린이집에 직접 데리러 가는 경우는 매우 적다. 따지고 보니 이상했는지 너도 나도 "어 그러게?"를 연발했다. 아이들 상식으로는 아기를 돌보거나 키우는 건 어른들 몫이었다. 소녀는 상식이 깨진 나라에 살고 있었다.
어린이집에서 동생을 찾아오는 누나. ⓒ노란상상
소녀는 동생을 사자 등에 올린 다음 집으로 향한다. 동생도 사자를 겁내지 않고 목덜미를 꼭 붙든다. 드넓은 사자 등이 듬직하다. 마을에 도착한 사자와 남매는 집에 들어가기 전 식료품점에 들른다.
"잠깐만! 가게에 들러 음식을 사야 해. 그런데...... 돈이 별로 없어."
소녀는 갈색 봉투 가득히 음식을 담았다. 당근과 빵, 소시지가 봉투 입구 위로 솟아있다. 돈은 없지만 사자를 대동한 소녀는 가게 주인에게 당당히 봉투를 내민다. 믿는 구석이 있는 아이의 얼굴은 해맑다. 지금껏 온순하게 굴었던 사자가 갑자기 포효하며 무시무시한 송곳니를 드러낸다. 기겁한 가게 주인은 등을 뒤로 내빼며 봉투를 앞으로 민다.
사자와 함께 들어간 집은 아담하다. 세간살이는 단출하고 싱크대 밑 수납장 문이 떨어져 나왔다. 소녀는 식기를 내어 테이블을 세팅하고 익숙한 듯 가스레인지 앞에 선다. 키가 작은 탓에 벽돌을 두 개나 포개어 선다. 까치발을 한 소녀는 김이 모락모락 오르는 수프 간을 본다.
"우리 엄마는 불 못 쓰게 하는데."
초등학교 4학년이나 되어도 다칠까 봐 아이들에게 요리를 못하게 하는 집이 은근히 많다. 아이들은 요리하는 걸 즐기기 때문에 국자를 쥔 소녀를 부러워했다. 앞치마가 금지된 가정에서 자란 초등학생 눈에는 단정하게 앞치마를 두른 소녀가 대단해 보인다.
"조금 있으면 엄마가 오실 거야. 그때까지 함께 있어줄래?"
소녀는 동생과 길가에 나가 엄마를 기다린다. 엄마는 반갑다고 손 흔드는 아이들 쪽으로 발걸음을 옮기지만 고개를 푹 숙이고 땅만 본다. 엄마 눈에는 사자가 들어오지 않는 모양이다. 그녀는 몹시 지친 기색이다. 이제는 사자가 떠나가야 할 시간. 돌아선 사자를 향해 소녀는 외친다.
"가고 싶으면 가도 돼. 하지만 내가 부르면 언제라도 다시 와 줘. 꼭!"
액자 속 아빠의 머리카락이 사자 갈기처럼 보이는 건 왜일까 ⓒ노란상상
어둠이 내려앉은 밤, 소녀와 동생 그리고 엄마는 한 침대에 누워 이불 하나를 나눠 덮는다. 엄마는 피곤한지 모로 누워 잠이 들었고 동생은 엄마 머리카락을 만지며 함께 뻗었다. 소녀는 아직 잠이 오지 않는지 스탠드를 켠 채 눈을 말똥거린다.
"선생님, 스탠드 밑에 가족사진 있는데 아빠도 있어요!"
눈썰미 좋은 성현이가 스탠드 아래에 놓인 액자에서 아빠 얼굴을 찾았다. 가까이 들여다보니 과연 그랬다. 이야기 내내 한 번도 나오지 않은 아빠가 분명 있었다. 책 한 장을 넘기니 액자가 클로즈업되어 아빠 얼굴이 더욱 선명하게 보였다. 풍성한 금발 머리가 사자 갈기를 연상시켰다. 류은이가 "설마 이혼?"이라고 말하려다 입을 두 손으로 막았다.
이혼은 공식 석상에서 쉽게 말할 수 있는 단어가 아니다. 그러나 확실한 건 소녀의 집에는 아빠가 없고, 소녀가 아빠에 대해 한 마디도 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이혼이라고 충분히 짐작할만한 상황이었다. 이혼이다 아니다를 두고 추측이 난무하는 가운데, 탁자 옆에 쌓인 신문이 눈에 들어왔다. 기사는 색이 약간 바랬지만 첫 줄이 또렷하게 적혀있었다.
<1985년 분쟁으로 수만 명이 가족 잃어...>
그 문장을 읽는 순간, 우리는 아무도 말하지 않았지만 왜 소녀가 사자에게 집까지 가달라고 했는지 이해했다. 소녀의 아빠는 무척 용감하고 자상한 사람이었을 것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