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학기 한 권 읽기, 교실에 책숨을 불어넣다
이준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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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12.03 07:18
“아이가 집에서는 도통 책을 읽지 않아요. 학교에서는 좀 어떤가요?”
상담 기간에 빠지지 않는 래퍼토리가 있다면 단연 독서입니다. 부모님들은 자녀가 책을 너무 안 읽는다고 하소연을 하십니다. 덧붙여 학교에서라도 양서를 접할 수 있게 도와 달라고 하시지요. 그 마음을 십분 이해할 수 있었습니다. 이제 겨우 네 살 밖에 안 되긴 하였지만, 교사인 아빠가 정성껏 그림책을 읽어주어도 유튜브 앞에서는 무용지물이 되어 버리거든요.
아이들 신경계를 마구 자극하는 귀엽고 깜찍한 핑크퐁, 타요 앞에 말이 없는 책은 후순위가 되기 일쑤입니다. 몇 살 더 먹으면 어떻습니까? 게임도 하고 좋아하는 아이돌 스타 방송까지 보느라 책 볼 여가는 더욱 줄어듭니다. 머리가 굵어졌다고 말도 안 듣습니다. 세상에는 책의 라이벌들이 너무 많습니다. 정말 어떻게 해야 할까요?
아이들만의 문제가 아닙니다. 대한민국 성인 3명 중 1명은 일 년에 단 한권의 책도 읽지 않는다고 합니다. 한 달에 한 권씩만 읽으시더라도 상위 10% 독서인이 될 수 있습니다. 누구나 책의 중요성을 말하지만 진득하게 책 읽는 사람을 찾아보기 힘든 안타까운 현실입니다.
하늘이 무너져도 솟아날 구멍이 있다고 했지요. 최근 학교에 긍정적인 변화가 일어나고 있습니다. 바로 2015 개정 교육과정이 적용되면서 국어 교과에 독서 단원이 신설되었습니다. ‘독서단원? 예전 국어 시간에 이야기 많이 듣고, 읽었는데?’라고 생각하신다면 학창시절 좋은 은사님을 만나 교과서 이외에 다양한 책을 접하신 분들입니다.
물론 현재 국어 교과서에도 여러 문학, 비문학 지문들이 단원의 목적에 맞게 실려 있습니다. 그러나 한정된 수업 시수와 교과서 분량의 한계로 인해 작품 전체가 담겨 있는 경우가 드뭅니다. 장편 동화 중 일부를 옮겨 놓고 인물의 성격을 분석하거나 이어질 내용을 상상하는 활동들이 그 예라 할 수 있습니다.
독서 단원은 작품을 온전하게 다룰 수 없었던 기존 교과서의 아쉬움을 덜어 주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우선 독서 단원에 사용할 책은 현장 교육 전문가인 선생님이 담당하는 학생들의 취향, 수준을 고려하여 직접 선정(또는 학생과 협의)합니다. 또 교실 여건에 맞게 프로젝트 방식으로 일주일간 집중 운영하거나 타 교과와 연계하여 주제 통합으로 운영하는 등 충분한 자율성을 발휘할 수 있습니다.
저희 반의 경우 1학기에 <마법사 똥맨>, <겁보 만보>, <조금만 조금만 더> 이렇게 세권의 책을 읽었습니다. 그중 <겁보 만보> 이야기를 소개해 드릴까 합니다. 제가 맡고 있는 4학년 어린이들은 몸이 급격하게 성장하는 시기를 보냅니다. 키도 쑥쑥 자라고, 여학생들은 2차 성징이 시작되기도 하지요. 겉으로는 훌쩍 큰 것 같지만, 조금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겁 많고 여린 아이가 숨어 있습니다.
책의 주인공 만보도 우리 반 아이들을 닮았습니다. 만보는 엄마 아빠가 느지막이 얻은 외아들입니다. 금쪽같은 늦둥이라 이름이 만 가지 보물, 만보입니다. 그런 만보에게 딱 하나 없는 보물이 있다면 바로 용기입니다. 바람소리만 쉭쉭 나도 화들짝 놀라 이불보를 뒤집어쓰거든요.
저는 만보에게서 제자들의 모습을 보았습니다. 더구나 책 분량도 부담 없고, 구수한 충청도 사투리가 할머니가 들려주시는 옛이야기처럼 정겨워 쏙 마음에 들었습니다. 아이들에게 읽어 주기 전 충청도 방언을 연구하려 ‘전국 사투리 경연대회’ 충청도 편 영상을 찾아 연습하였습니다. 저는 말이 빠르기로 유명한 경상도 울산 출신이라 적응하는데 꽤 시간이 걸렸습니다. 실감나게 읽으려면 다른 도리가 없었지요.
강원도 삼척 촌선생님과 촌아이들은 멀리 충청도 촌놈 이야기에 푹 빠져버렸습니다. 교과서 없이 시작한 독서 수업이었지만, 여느 때보다 책에 몰입하여 뜻깊은 대화가 수없이 오갔습니다. 아이들은 만보의 이름 뜻이 나오자 자신 이름에 담긴 사연을 풀어놓았습니다. 만보가 그림자만 보고도 벌벌 떠는 장면에서는 혀를 차며 진지한 충고를 던지기도 했지요.
“만보가 겁이 많은 건 늦둥이라 부모님이 과잉보호를 해서 그래요.”
아이들은 만보의 모험을 따라 다니며 웃고 숨죽였습니다. 분위기가 무르익으면 저는 준비한 질문을 던지고 반응을 지켜보았습니다. 생각 정리가 필요한 대목에서는 붙임딱지(포스트잇)을 내어주고 문장을 적게 하였지요. 거기에는 만보 동네에 사는 주민들 성격과 만보가 거쳐 온 장소들이 시간 순서대로 분류되어 있었습니다.
평소 국어 시간처럼 교과서 지문을 읽고 질문지에 답을 달지는 않았습니다. 하지만 학생들은 만보가 용기를 얻는 여정을 따라가며, 작품의 의미를 고민하고 등장인물에게 감정이입하였습니다. 교육과정에서 요구하는 핵심 성취기준을 달성한 것은 물론이었습니다.
독서 단원은 교실의 풍경을 바꾸고 있습니다. 아이가 읽는 책이 궁금하시다면, 오늘 한 번 교실에서 어떤 책으로 수업하였는지 물어보는 건 어떨까요? 어쩌면 기대했던 것보다 훨씬 근사한 대답을 듣게 되실 지도 모르겠습니다. 아, 그 책을 직접 읽고 이야기를 나누신다면 금상첨화이구요!
본 원고는 도교육청 소식지 <강원교육맑음> 9월호에 실렸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