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직 교사 눈에 띈 교사들, 이 장면에서 뜨끔
[서평] 마르쿠스 베른센 글, 오연호 기획 편역 '삶을 위한 수업'
사람마다 독서 취향이 있겠지만, 교사인 나는 아무래도 교육 도서를 자주 펼친다. 자기 연찬, 전문성 향상 같은 웅대한 목표를 의식하며 읽는 건 아니고 그냥 내 얘기 같아서 읽기 편하다. 허영만의 식객 된장찌개 편을 읽은 후 냉장고에서 묵힌 강된장을 꺼내게 되는 것처럼, 교육 도서는 나를 좀 더 움직이게 만든다. 당장 교실에서 실천할 수 있는 이야기를 하기 때문이다.
"삶을 위한 수업" 책 표지, 마르쿠스 베른센 (지은이),오연호 (편역)
이번에 만난 책은 <삶을 위한 수업>이다. 부제가 끌린다. 행복한 나라 덴마크의 교사들은 어떻게 가르치는가. 학부모와 교사들이 좋아할 만한 키워드를 잘 버무려 놨다. 북유럽, 행복, 교육. 에덴동산 같다.
세 가지 키워드를 한국인 필터로 해석해 본다. 부유하고 사회복지 빵빵해서 부럽기만 한 스칸디아비아 국가, 대한민국이 뭐든 잘하는데 이것 만큼은 잘 못 챙긴다는 행복, 부동산과 더불어 잘못 건드리면 거물 정치인도 추락시키는 교육.
한국에서 삶, 행복, 교육은 서로 사이좋게 지내기 힘든 단어다. 그래도 나의 직업적 소망은 배움으로 행복해지는 교실이다. 이유는 단순하다. 배움은 배우기 이전의 나보다 더 나은 인간을 만들어 준다. 그래서 교육은 행복과 연결되고, 행복한 시간은 좋은 삶으로 이어진다.
덴마크 학교가 정말 잘하고 있는 점
초중등학교 크로고르스콜렌 Krogardsskolen의 과학 시간. 헬레 호우키에르(Helle Houkjær) 선생님이 아이들과 함께 수업을 하고 있다.
첫 번째로 소개할 교사는 헬레 호우키에르다. 그녀는 52세이며, 32년째 교사로 일하고 있다. 과학 수업 프로젝트와 우수한 교재 개발로 몇 차례 수상한 경력이 있고, 2018년에 '훌륭한 교사상'을 받았다. 호우키에르는 시험을 자주 보지 않고, 점수를 매기는 방식에 회의적이다.
"전국적으로 일제히 치러지는 시험의 출제자들은 외부 교육기관 사람들이죠. 그들은 학생들을 개인적으로 모릅니다. 그들이 낸 시험문제로 학생들의 지식을 평가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습니다. 그런 방식이 아니어도 학생들의 지식을 평가할 수 있는 더 좋은 방법은 얼마든지 있으니까요." - 51p
덴마크의 학생들은 우리나라 중학교 2학년에 해당하는 8학년이 될 때까지 시험 점수를 개별적으로 받지 않는다. 교사들이 다양한 방법으로 학생이 제대로 배우고 있는지 확인하지만 이를 점수화하거나 등급을 매기지 않는다. 시험을 위한 공부가 비교육적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호우키에르는 학생들이 단순 지식을 암기하는데 시간을 쓰기보다, 독립적이고 비판적인 방법으로 지식을 얻는 과정을 즐기길 바란다.
불현듯 과거의 어떤 시점이 떠올랐다. 나는 강원도형 혁신학교인 '행복더하기 학교' 두 곳에서 근무했다. 학급운영의 기본 모토 중 '정답이 여럿인 교실'이 있었다. 일제고사 형태의 시험을 최소화하고 프로젝트 발표, 토론 등의 평가 방식을 적극 도입하였다. 그러던 중 학부모 한 분의 전화를 받았다. 조심스럽고 예의 바른 목소리.
"선생님, 반에서 시험을 안 보신다고 하셔서요. 죄송하지만 아이에게 시험지를 따로 인쇄해서 주실 수 있나요? 제가 노파심이 많아서요."
거기다 대고 내가 무슨 교육철학 강의를 하겠는가. 양해를 구하듯 학교와 나의 교육방침을 설명하고 다음날 단원평가 문제를 뽑아 드렸다. 아이가 풀어오면 채점은 내가 했고. 유사한 사례가 여럿 있었다.
논지는 거의 동일했다. 입시가 당장 급하지 않은 초등학교니 혁신학교에서 이런저런 행사 열고 체험학습 가는 건 좋다. 다만 중학교만 가도 시험지 인생이니, 따로 대비를 안 할 수 없다. 헬레 호우키에르는 챕터 말미에 이렇게 조언한다. "점수에 너무 연연하지 말자. 학교 시험과 성적이 실제 사회생활에 미치는 영향력은 크지 않다. 사회에서 실제로 부딪혀 보는 것이 더 중요하다. 결과보다는 과정이 중요하다는 것을 잊지 말자"라고. 발언의 취지에 동의하지만 나는 이 말을 온전히 실현하는데 어려움을 겪었다.
두 번째로 소개할 교사는 킴 륀베크다. 그는 48세이며 19년째 교사로 일하고 있다. 보드게임을 활용한 '민주주의' 수업으로 주목 받았으며, 2017년 '훌륭한 교사상'을 받았다. 륀베크는 학생을 교실의 주인으로 만들고 싶어 하는 선생님이다. 교사의 말을 일방적으로 듣고 있어야 하는 학생이 아니라 참여하는 학생이 되도록 학급을 꾸려간다.
"가장 중요한 것은 스스로 자신의 길을 선택하고 삶을 관장하는 힘이죠. 스스로 선택하는 데 익숙하지 않으면 어느 날 갑자기 선택을 강요당하는 상황이 생겼을 때 당황하고 압도당할 수 있잖아요. 진짜 무서운 게 뭘까요? 스무 살이 넘었는데도 어느 날 아침에 생각해보니 내 인생에서 스스로 선택해본 적이 별로 없는 경우가 아닐까요?" - 100p
덴마크는 공립학교에 다닐 경우 유치원부터 대학교까지 학비가 무료다. 공립학교는 폴케스콜레로 불리며 시민 모두를 위한 학교라는 뜻이다. 대부분의 덴마크 부모들은 폴케스콜레에 자녀를 보낼 때 부모의 사회적 지위에 따른 어떠한 특권도 기대하지 않는다.
킴 륀베크는 어떤 학생이든 특별 대접을 받아서 좋을 게 하나도 없다고 생각한다. 인생을 살다 보면 자립해야 하는 시기가 오는데, 줄곧 특별 대접을 받아왔다면 스트레스를 받을 수밖에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덴마크 학교가 정말 잘하고 있는 점이 무엇이냐고 묻는다면 나는 '서로 협력을 잘하는 사람들을 양성하는 것'이라고 말하고 싶어요. 초중등학교에서 9년을 보낸 우리 학생들은 남의 말을 경청하고 다른 사람과 협력하는 일을 매우 잘합니다. 이런 노력은 공짜로 이뤄지는 것이 아닙니다. 그렇게 되기까지 학생들의 의견을 들어주고 안내해 주는 교사의 역할이 있죠." - 107p
나는 잘 들어주는 교사의 역할을 강조하는 대목에서 뜨끔했다. 아이들 말에 귀 기울이기는 굉장한 인내심과 노력을 요구한다. 교실에는 스무 명이 넘는 아이들이 생활한다. 말은 차고 넘친다. 중요한 건 서로의 말을 경청하고 규칙과 매너를 지키는 대화인데, 상당기간 훈련이 필요하다. 주도권을 쥐고 싶어서 다른 친구의 말을 끊는 아이, 쑥스러워서 한 마디도 안 하려는 아이 모두 민주적인 대화에 적응하는데 시간이 걸린다.
민주주의의 기본은 대화이다. 륀베크는 학생에게 일상과 관심거리에 대해 이야기 나눌 시간과 공간을 주라고 충고한다. 돌이켜보니 나는 듣기보다 말하기를 더 많이 했다. 일부 학생이 전체를 주도하거나, 대화의 내용이 선을 넘지만 않는다면 개입을 최소화 해야 한다는 그의 조언은 교사와 부모 모두에게 유용할 듯하다.
교육으로 좋은 시민을 길러낼 수 있다는 믿음
이 책에 등장하는 열 명의 교사는 모두 개성이 뚜렷하고, 열정적이다. 그럼에도 그들은 행복과 삶을 중시하는 덴마크인의 정신을 공유하고 있다. 나는 덴마크의 교육이 그리 특별하지는 않다고 생각한다.
이미 수십 년간 학교 현장에서 교실을 바꾸어 보고자 했던 선생님들이 소리 없이 해온 활동과 흡사하다. 비록 여기 책에 나오는 분들처럼 주목받고 격려 받지는 못했지만, 교실의 변화는 진행형이다. 숱한 오해와 비난을 감수하면서.
교육으로 좋은 시민을 길러낼 수 있다는 믿음, 그런 시민들이 모여 좋은 사회를 만들 수 있다는 믿음이 있기에 학교는 굴러간다. 이런 믿음에도 불구하고 <삶을 위한 수업>을 읽는 내내 훌륭한 사회가 훌륭한 학교를 만들어 내는 것이 아닌가, 하는 의문이 떠나지 않았다.
닭이 먼저냐, 알이 먼저냐의 문제인 걸 안다. 당연히 학교와 사회는 상호 유기적으로 작동한다. 그러나 덴마크 시민사회의 협조적인 분위기와 교사의 자율성을 존중하는 태도는 숨기기 힘들 만큼 부러웠다. 아마 일반인들은 덴마크 교사에게 교육받는 아이들을 훨씬 더 부러워하겠지만.
학교 이야기라 그런지 읽는 내내 사유와 감정이 이리 튀고, 저리 부딪혔다. 결국 마지막 책장을 덮었을 때는 밑줄과 메모가 지나쳐 남에게 빌려줄 수 없는 상태가 되고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