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를 조건 없이 믿나요?
어쩌다 보니 발령 이후 3, 4학년 담임을 연거푸 맡았다. 올해는 여섯 번째 4학년 담임이었다. 학교 사정과 학생 특성에 따라 다소 차이는 있겠지만 3, 4학년은 교사들에게 선호도가 높다. 왜냐하면 저학년을 거치며 어느 정도 학교에 적응했고, 사춘기의 격렬함이 폭발하기 전의 아이들이라 비교적 평화롭고 즐겁게 학급 운영을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아이와 부모의 관계도 크게 삐거덕거릴 일이 적다. 일단 부모 손이 예전보다 덜 간다. 머리 감고, 이 닦고, 옷 입기 같은 기본 생활을 스스로 할 수 있다. 또한 인지능력이 발달해 추상적인 개념을 조금씩 이해하고 말하거나 문장으로 쓴다. 물론 여전히 실수도 잦고, 고차원의 추상적 사고를 능숙하게 할 수는 없다. 그렇지만 유아 시절의 순수함과 풋풋함이 묻어나는 가운데 성장하는 아이의 모습을 보는 건 뿌듯하고 기쁘다.
ⓒ박해성
황금기는 오래가지 않는 법, 4학년 2학기가 되면 미묘한 변화가 찾아온다. 나는 4학년 2학기를 마법의 시간이라 부른다. 이때는 여학생들 얼굴이 바뀐다. 자연스럽고 생기 있던 입술이 반짝거리는 붉은색, 핑크색 틴트로 덮인다. 다양한 톤의 피부는 미백 기능이 강화된 선크림의 힘으로 모두 희고 뽀얗게 된다. 마법의 시간에는 자연의 얼굴이 사회의 얼굴을 닮아간다.
외모 꾸미기야 그렇다 치고, 진짜 변화는 집에서 일어난다. 온순하게 품 안의 자식으로 커오던 내 새끼들이 갑자기 독립선언을 시작한다. 혼자만의 공간이 필요하다, 샤워를 따로 하겠다, 엄마 모임에 따라가지 않겠다, 스마트폰 암호를 걸겠다 등등. 기미년 만세운동처럼 엄청난 외침의 형태가 아니더라도 과거에는 찾아보기 어려웠던 선택과 취향이 도드라진다.
“선생님, 요즘 아이가 학원도 가끔 빼먹고, 화장품을 사달라고 조르네요. 방문도 계속 닫고. 그런 적이 없었는데. 수업 시간에는 좀 어때요?” 아이의 변화 속도가 빠를수록 부모의 마음은 복잡해진다. 성장기니까 이런저런 일들을 겪으리라 예상했지만, 어느 방향으로 튈지 모르는 아이는 부모를 불안하고 당황스럽게 만든다. 돌다리도 무너질까 호호 불며 챙겨주던 자식인데, 이제 열한 살 먹었다고 스스로 하겠다고 나선다. 좋아서 만세라도 불러야 정상인데 이상하게 고민이 깊어진다.
어떤 경우에도 내 아이를 긍정하고 응원할 자신이 있는가
자녀 교육에 관심이 많은 가정은 이미 영유아 시기부터 수많은 교양 강좌, 양육 서적을 거쳤다. 부모 역할은 아이가 홀로 설 수 있도록 뒷받침하는 지원자라고 누누이 들어와서 잘 알고 있다. 그런데도 아이의 자립이 두렵다. 나는 이런 부모들에게 진지하게 묻는다. “아이를 진심으로 믿으세요? 원하시는 만큼 아이가 따라와주지 않아도 기다려주시나요?” 순간 정적이 흐르며 부모 눈동자가 흔들린다. 누가 이 질문에 “그렇다”라고 쉽게 말할 수 있겠는가.
아이를 조건 없이 믿어주느냐 그렇지 않으냐의 문제는 실로 중요하다. 자식을 사랑하는 사람은 흔해도, 온전히 존재로서 믿어주는 사람은 드물다. 자식을 믿는다고 대답하는 경우에도 대부분 부모가 설정한 ‘옳은 행동’의 범위가 정해져 있으며, 자식의 소신 선택은 ‘언젠가 고쳐야 할 일시적 방황’으로 간주한다.
무조건, 어떤 경우에라도 내 아이를 긍정하며 존재 자체로서 응원할 자신이 있는가. 어떤 학부모는 힘겹게 입술을 떼다가 “그럼 선생님은 자식을 100% 믿느냐”라고 반문했다. 마른 침을 삼키고서 대답했다. 속으로는 수천 번, 수만 번 흔들리지만 적어도 겉으로는 안 그런 척 일관되려 노력한다고. 가르치는 걸 업으로 삼아 자식 밥을 먹이는 처지면서도, 아이가 본심을 알아챌까 봐 겁이 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