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가 '착해서' 노심초사하는 부모
“다른 아이의 말을 귀 기울여 듣고, 공감합니다. 남에게 양보하는 태도가 몸에 배어 있습니다.” 학기말 행복성장기록부(통지표와 유사)를 작성하다가 키보드 누르는 손가락을 자주 멈춰야 했다. 아이마다 생활 모습과 특징을 적어줘야 하므로, ‘착하다’를 구체적 맥락을 살린 표현으로 바꿔야 했기 때문이다. 착한 아이를 ‘착하다’라고만 적으면 오해의 소지가 있었다. 상담 주간에도 비슷한 일이 벌어진다.
“선생님, 우리 아이가 혹시 맞고 다니거나 그런 건 아니죠?” 나는 그저 아이가 학교생활 잘 하느냐는 질문에 “착해서 친구들과 원만하게 지낸다”라고 답했을 뿐이다. 착한 아이를 둔 부모는 표정이 어두워지며 걱정스레 추가 질문을 했다. 온갖 수식어와 집안사, 양육 환경 이야기 등을 빼고 핵심만 간추려보면 “우리 애가 손해 보고도 가만히 있는가?”였다.
ⓒ박해성
물론 “활달하고 씩씩하다”라고 대답해도 “다른 애들 괴롭히거나 그러진 않죠?” 같은 반문이 나온다. 그렇지만 목소리나 표정에 담긴 불안감이 “착하다”에 비해 훨씬 덜하고, 도리어 자부심과 만족감까지 느껴진다. 요즘같이 위험천만한 세상에 착한 건, 순진해 빠져서 남 좋은 일 시키고 손가락 빨기 좋은 속성인 걸까?
학부모만 탓할 수 없었다. 아이가 선량하고 사려 깊다는데 싫을 리 없다. 다만 ‘헬조선’, 각자도생으로 대표되는 무한경쟁 사회에서 불이익을 당할까 봐 노파심이 드는 것이다. 모두가 10대들의 인성 문제를 심각하게 받아들이지만 정작 본인 자녀에게는 ‘만에 하나라도 잘못되면…’ 하는 심리로 타인을 견제하는 방법을 가르친다. 반칙을 조금 쓰더라도, 사회 전반이 도덕적으로 바뀔 때까지 스스로를 보호하는 편이 낫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다른 사람의 마음을 헤아리고 배려하는 착한 마음은 경쟁이 일상화된 한국 사회에서 하등 쓸모가 없는 것일까? 결론부터 말하면, 절대 그렇지 않다. 도덕과 신뢰가 없으면 이 사회는 잠시도 버티지 못한다. 아니, 오히려 타인의 심리와 욕구를 잘 읽고 적극적으로 대처하는 사람이 성공적인 삶을 살아갈 가능성이 훨씬 높다. 착한 아이가 생존에 유리하다는 의미다.
학교만 봐도 그렇다. 우리 반에는 학생 22명이 있다. 나는 열 명 내외의 학부모와 잠깐씩 대면했을 뿐 잘 알지 못한다. 그럼에도 학부모는 학교와 교사를 믿고 아이들을 장시간 맡긴다. 아이들이 하교하고 들르는 분식집 아저씨는 3000원을 받고 기꺼이 맛있는 떡볶이 한 접시를 내어준다. 우리가 당연하게 여기는 금융, 복지, 상업, 치안 등 사회의 모든 영역이 사람들 간 신뢰와 협동을 바탕으로 한다.
‘착함’은 타인의 처지에서 생각하고 행동하는 훌륭한 자질
아이들은 장차 기업가나 노동자가 되어 경제생활을 할 것이다. 물건을 팔거나 서비스를 제공하는 사람이 다른 사람의 필요나 취향을 고려하지 않으면 사업은 망한다. 기업가는 내가 필요한 것이 아니라 남이 원하는 것에 초점을 맞춰야 한다. 노동자도 마찬가지다. 노동자는 선호하는 직장에 취직하기 위해 적극적으로 자신이 조직에 필요한 인재임을 강조해야 한다. 결국 우리는 타인을 위한 생활을 함으로써 자신의 삶을 꾸려나갈 수 있는 셈이다.
착한 아이는 타인의 처지에서 생각하고 행동할 수 있는 훌륭한 자질을 지니고 있다. 역지사지의 미덕은 인간관계뿐 아니라 경제적 관점에서도 긍정적이다. 도덕적 삶, 착하게 사는 인생을 효용성에 비추어 설명하고 설득하는 게 언짢고 불편하다. 그럼에도 아이가 착하다는 말에 가슴 한편이 무거워지는 학부모를 자꾸 만나게 되는 교사의 마음은 더 착잡하다. 착한 건 나쁜 게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