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짬그교15] 별이 되고 싶은 아이들에게
"아이 희망은 축구선수, 부모님 희망은 교사. 다음 아이 희망은 가수, 부모님 희망은 외교관"
이러다 대한민국에 공무원이랑 전문직밖에 없겠네... 한숨을 쉬며 장래희망이 적힌 종이뭉치를 덮었다. 한 두해 겪는 일은 아니었다. 한국에 있는 직업이 만 가지가 넘는 다는데 부모님이 학교에 적어 보내는 직업은 많아봐야 오십 개 내외였다. 평균 이상의 소득과 직업 안정성 그리고 사회적 선호도라는 촘촘한 거름망을 통과한 엄선 직업들이었다. 남 탓할 처지가 아니었다. 나도 어린이집 선생님이 딸을 어떻게 키우고 싶냐는 질문에 '자기 하고 싶은 거'라고 답했지만, 속으로는 돈도 좀 잘 벌고 근무 여건 괜찮은 직업을 얻었으면 했다.
반면 학생들은 더 용감했다. 선생님이나 부모님 눈치를 살피긴 했어도 재미있어 보이는 일들을 비교적 소신껏 선택했다. 농구선수, 게임 BJ 또는 화가라는 직업을 또박또박 힘주어 쓰는 눈빛이 자못 진지했다. 다한이는 최고의 농구선수가 되겠다고 했고, 승표는 화가가 되어 걸작을 그린다고 다짐했다. 어차피 꿈이야 살면서 조금씩 바뀔 테지만 현재의 결정을 존중해주고 싶었다.
"정말 훌륭한 꿈이에요. 그런데 어떤 직업을 가지든 모두 최고가 될 수는 없어요."
학생들에게 노력만 하면 누구나 성공할 수 있다고 차마 거짓말할 수 없었다. 대신 각자가 잘 하는 일을 좋아하게 된다면 더 쉽게 꿈을 이룰 수 있다고 천천히 설명했다. 내 말뜻을 아는지 모르는지 아이들은 표정 변화가 없었다. 속세에 찌들어 걱정이 앞서는 사람은 선생님 혼자인 듯했다. 여전히 축구 선수가 되고 싶은 녀석은 크리스티아누 호날두를 외쳤고, 연예인이 되고 싶은 아이는 트와이스를 연호하며 입이 귀에 걸렸다. 스타는 초등학생들을 꿈꾸게 했다.
이해할 수 있었다. 사람들은 특출 난 재능을 지닌 유명인을 동경한다. 스타들은 부와 명예, 명성을 누린다. 그러나 별이 괜히 별이겠는가? 모두가 되고 싶어 하지만 되는 사람은 극소수인 것을. 정상에 오르기를 염원하는 아이들에게 들려주고픈 그림책이 있었다. 어두컴컴한 골목길을 지키는 어느 케케묵은 가로등의 이야기였다.
가로등은 오랜 세월 좁은 골목길을 지켰다 ⓒ이마주
어떤 마을 끝자락. 인적 드문 골목 모퉁이에 가로등 하나가 서 있었다. 관리가 안 된 탓에, 여름이 되면 가로등의 정강이까지 풀이 무성하게 덮였다. 가로등은 겉으로 땅에 단단히 박혀 있는 듯 보였지만 실은 속부터 삭아있었다.
'이제 내 외다리를 가눌 수가 없어. 밤중에 바람이라도 몰아치면 모든 게 다 끝나겠지.'
아무도 들어주지 않는 신세타령에 수민이는 가로등이 할아버지 같다고 했다. 가로등은 자신의 죽음을 직감하며 다시 쓸쓸한 생각을 떠올린다.
'어쩔 수 없어. 늙어서 쓰러지는 건 나 혼자만이 아닐 테니까. 모두가 다 그러겠지. 다리가 둘인 인간도 마찬가지일 거야.'
나는 고향에 계신 아흔 넘은 할머니가 떠올라서 가슴이 아팠다. 담임과 달리 타인의 죽음을 연상하기에 너무 어린 3학년 학생들은 눈만 끔뻑거렸다. 생을 누리기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은 어린이에게 인생은 그저 살아가는 것이었다. 한편, 가로등은 죽음의 문턱에서도 마음속 깊이 묻어 둔 소원 하나를 포기할 수 없었다. 가로등의 소원은 별처럼, 단 한 번이라도 별처럼 밝게 빛나는 것이었다. 그 소원이 기나긴 세월 동안 가로등을 한 자리에 계속 서 있을 수 있게 해 준 동력이었다. 하지만 농담이라도 별 같다고 말해 주는 사람은 없었다.
여름이 지나자 가로등 허리까지 솟아올랐던 풀들이 이파리 끝부터 누렇게 시들어 갔다. 이제 가로등 불빛은 쓸쓸하고 초라해 보이기까지 했다. 바람이 스산하게 부는 어느 해 질 녘, 날개가 파란 풍뎅이가 얼굴 앞 유리에 날아와 탁 부딪혔다. 자신의 소망을 확인하고 싶었던 가로등은 풍뎅이를 불러 세웠다.
"내 불빛이 저 별처럼 빛나니?"
"허 참, 이 가로등이 이상해졌네. 날씨가 추워져서 그런가."
풍뎅이는 몇 마디 중얼거리더니 무언가 생각난 듯 휙 날아가 버렸다. 그 장면을 보고 지환이랑 서진이가 킥킥 웃음을 터뜨리다 손으로 입을 막았다. 이번에는 나방이었다. 하얀 나방 한 마리가 말없이 가로등 이마 주위를 맴돌았다. 희망을 놓지 않은 가로등이 나방을 불렀다.
"혹시 저 별처럼 빛나 보이니?"
"흥, 이딴 불빛이 어떻게 별처럼 보인다는 거야!"
나방은 파르르 날개를 떨면서 쏘아붙였다. "불쌍한 가로등"이라며 은비가 탄식했다. 늙어서 곤충들에게 저런 수모를 당하니 10살 먹은 꼬마들 눈에도 가로등이 안쓰러워 보였나 보다. 읽던 책을 덮고 질문했다.
"가로등이 가여워 보이지요? 그런데 만약에 여러분이 나이가 들어서 장래희망으로 적어냈던 인기 가수나 노벨상 받는 과학자가 못 되었어요. 그러면 어떨 것 같아요?"
아이들은 입을 꾹 다물었다. 마치 단 한 번도 그런 상상을 해본 적 없다는 눈치였다. 다소 부산스러운 분위기에서 시후가 용감하게 한마디 뱉었다.
"그냥 뭐라도 해요."
"빙고! 어떻게든 살겠지요. 가로등도 처음에는 자기가 꼭 별이 될 줄 알았을 거예요."
별이 되면 좋겠지만 대다수는 그러지 못한다. ⓒ이마주
가로등도 어린 시절이 있었다는 사실을 뒤늦게 깨달았는지 지후가 손뼉을 세차게 쳤다. 우리도 별이 되지 못하고 대부분 가로등처럼 살게 될 거라고 속내를 털어놓았다. 애들은 무덤덤하게 그 말을 받아들였다. 어렵게 꺼낸 말이었는데 반향이 없었다. 아이들이 기죽을까 봐 염려했으나 결과는 의외였다. 세상 물정을 모르는 것인지 아니면 평범하게 살아도 상관없다는 의미인지 알 수 없었다.
"그럼 딱한 가로등은 어떻게 되었는지 살펴볼까요?"
나방에게 무시당한 가로등은 꾸중을 들은 것 마냥 침묵을 지킨다. 자그마한 벌레 눈에도 별처럼 보이지 않는 현실에 감정이 북받쳤는지 가로등 눈에 뜨거운 액체가 차오른다. 눈물의 힘일까? 서러움이 약간 가시자, 불현듯 깨달음이 찾아온다.
"별처럼 보이지 않으면 어때. 그냥 조용히 빛나고 있으면 되지. 그게 내 할 일이잖아. 내 할 일만 다 하면 되니까 내 역할은 그걸로 충분해."
가로등이 이렇게 다짐하고 번쩍 머리를 들자, 희미한 불빛이 확 밝아진 듯했다. 날이 완전히 저물어 주위가 깜깜해졌다. 바람이 서걱서걱 나뭇가지를 흔들어 대는 모습을 보며 가로등은 곧 폭풍우가 올 것임을 예상한다. 어쩌면 마지막이 될지도 모를 험난한 밤이었다.
"가로등은 별처럼 보이겠다는 장래희망을 포기했어요. 그런데 어때요? 초라해 보이나요?"
"아니요. 아까보다 더 환해졌어요!"
"나중에 혹여나 꿈을 못 이루게 되어도 너무 실망하거나 슬퍼하지 말아요. 가로등처럼요."
전인미답, 어른도 앞일을 알 수 없어 헤매는데 어찌 아이들에게 한 가지 목표만을 쫓을라 말할 수 있겠는가? 꿈을 못 이루어도 세상은 살아갈만하다는 얘기가 듣기 나쁘지 않았는지 채연이가 씨익 웃었다. 매사에 열심이고 책임감 강한 반장이 저렇게 웃으니까 등에서 날개가 돋은 듯 마음이 가벼워졌다. 별처럼 빛나겠다는 무거운 꿈을 벗어버린 가로등의 기분이 이랬을까? 남은 이야기가 궁금하여 얼른 뒷장을 들추어 보았다.
자기 자리를 단단하게 지키는 삶. 그것만으로도 훌륭하다. ⓒ이마주
어둠이 깊게 내려앉은 시각, 골목 어귀에서 남자 어른과 열 살쯤 되는 남자아이가 걸어왔다. 둘 다 옷차림은 허름했지만 인상이 맑아 보였다. 남자아이가 가로등 옆을 지나며 주위가 밝다고 하자 곁에 선 아버지가 밤중에 가로등이 없으면 이 길을 다닐 수 없다고 알려주었다. 하늘을 올려다본 남자아이는 낮게 깔린 구름 사이에서 반짝거리는 별을 본다.
"우와, 가로등이 저 별보다 밝은 것 같아요."
이윽고 가로등의 가슴 벅찬 휘청거림이 이어진다. 책에 그림을 그린 시마다 시호 씨는 이 장면을 강렬한 노란색 붓질로 화면을 가득 채웠다. 아이들도 왕자님과 결혼하는 신데렐라를 바라보는 흐뭇한 심정으로 가로등의 환희를 감상했다.
"이루어졌어! 내 소원이 이루어졌어!"
모든 걸 내려놓고 소박한 역할에 충실하겠다 결심한 순간에 거짓말처럼 가로등의 꿈이 이루어졌다. 꺼지기 직전 가장 화려하게 타오르는 촛불처럼, 가로등은 평생 지켰던 그 자리에서 후회 없이 갔다. 우리 삶에도 나를 별이라고 말해주는 소년이 찾아올까? 오면 더할 나위 없이 좋겠지만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
솔직히 말하면 우리는 높은 확률로 소년을 만나지 못하고, 고만고만한 가로등 인생을 살 것이다. 이름 모를 골목과 공터를 지키는 허다한 가로등들. 하지만 잊지 말자. 멀리서 보면 불 켜진 동네의 야경이 별처럼 예쁘다는 사실을. 그런 의미에서 우리는 모두 지상의 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