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녀와 경마장에 간 할아버지, 이토록 우울할 수가
손녀와 경마장에 간 할아버지, 이토록 우울할 수가
[짬내어 그림책 읽는 교실 25] 조은영 글, 그림 <달려 토토>
"조물주 위에 있는 것은?"
믿도 끝도 없이 퀴즈가 훅 들어왔다. 아이들은 수수께끼를 좋아한다. 불쑥불쑥 생각나는 내용을 느닷없이 던지는데, 퀴즈도 어디선가 듣고 와서 하는 말이 틀림없었다. 왜냐하면 올해 단 한 번도 '조물주'라는 표현을 쓰는 애를 본 적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나저나 조물주 위에 누가 있냐니, 신을 창조한 초월체를 설정하는 게 가능한지 고민이 되었다. 마치 빅뱅 이전에 어떤 세계가 존재했냐는 질문과 같은 맥락으로 받아들였다. 담임이 잠시 골머리를 썩자, 성격 급한 녀석이 정답을 먼저 공개해버렸다.
"답 알려드릴게요, 건물주래요."
"건물주? 크하하. 틀린 말은 아니네."
11살 제자와 블랙 유머를 나누게 될 줄이야. 그런데 다른 애들도 '조물주 위에 건물주' 퀴즈를 잘 알고 있길래 물어봤더니 인터넷에서 유행하는 말이라고 했다. 직업병이 발동하여 구체적인 뜻을 물어봤다. 역시나 '조물주'도 모르고, '건물주'의 권리도 몰랐다. 다만 건물 주인이 되면 평생 편하게 살 수 있다고 했다. 인생 한 방이라나.
돈만 있으면 무엇이든 할 수 있다고 믿는 어른이 되기 전에 <달려 토토>를 읽고 나누었다. 여기 나오는 토토는 운동 경기에 돈을 거는 '스포츠 토토'가 아니다. 불행히 나는 책 표지를 접했을 때, 그 토토를 먼저 연상했다. 의도하든 그렇지 않든 우리는 이미 뼛속까지 돈과 연결되어 있다.
달려 토토는 BIB(Biennial of liiustration Bratislava) 그랑프리 수상작이다. ⓒ 보림
내가 제일 좋아하는 인형은 토토다. 나는 말을 본 적은 없지만, 말이 좋다.
손녀는 태어나서 처음으로 할아버지 손을 잡고 경마장에 간다. 말이 어떻게 생겼을지 너무 궁금해서 가슴이 설렌다. 경마장에 들어서자 같이 놀 애들은 거의 없고, 어른들만 잔뜩 있다. 빈 손으로 온 사람은 찾아보기 힘들고 대부분 신문이나 잡지를 본다.
특이한 점은 신문에 날짜 별로 번호 같은 게 매겨져 있는데 어른들은 그 숫자를 뚫어지게 쳐다보며 어딘가로 전화를 걸거나, 고민하며 심각한 표정을 짓는다. 이 과정을 끝낸 이들은 전광판으로 시선을 돌린다.
"나도 경마장 가봤는데 왜 저런 걸 못 봤지? 작은 데라서 그런가."
지환이가 볼에 난 점을 긁적이며 말했다. 사실 지환이는 경마장이 아니라 7월에 동아리 행사로 근처 승마장에 다녀왔다. 승마장 체험에 동행한 성현이도 이상한 어른들을 못 봤다고 했다. 이상한 어른은 즐겁게 동물 체험하러 와서 담배 피우고, 미간에 주름 잡혀가며 마권에 색칠하는 사람들을 가리켰다. 그냥 승마장 사장님이 챙겨준 보호 조끼와 헬멧을 착용한 관광객들만 약간 있더란다.
"당연히 그럴 거예요. 승마장은 말을 타러 가는 곳이고, 경마장은 말 타는 사람 구경 가는 곳이니까요."
"구경만 해도 재밌나? 근데 왜 책을 봐요?"
궁금할 법도 했다. 구경만 하는 게 재밌을 리는 없고, 그 뒤에 관중들을 자극시키는 뭔가가 있을 건데 아이들은 아직 눈치채지 못했다. 책장을 좀 더 넘겨봐야 알 수 있는 내용이었다.
승마장에는 없고 경마장에는 있는 풍경 ⓒ보림
와! 진짜 말이다.
손녀는 드디어 살아있는 말을 발견한다. 진짜 말은 인형 토토처럼 다리가 굵거나 갈기가 길지 않다. 귀엽지는 않지만 반짝반짝 윤이 나고 멋지다. 승표는 개처럼 집에서 말을 키우고 싶다고 했다. 등교하면서 타고 오면 재밌을 거라며 신난 얼굴이었다. 나도 덩달아 승마 출근을 상상해 보았는데 엉덩이가 아플 것 같아 그만두었다.
"제주도 가니까 말이 풀 뜯어먹던데."
이번에는 말먹이 이야기였다. 아이들은 동물을 무척 좋아하고 특히 먹이주기를 즐긴다. 그런데 경마장에 오는 어른들은 누구도 말을 쓰다듬지 않고, 당근도 안 준다. 규칙상 가능하지도 않겠지만 면면들을 보면 먹이를 못 줘서 안타까워하는 일말의 흔적을 찾아볼 수 없다.
기수들이 들어왔다. 말이 타보고 싶은 손녀는 기수를 요리조리 살핀다. 알록달록한 옷이 서커스 단원 같다. 할아버지는 손녀에게 맨 먼저 들어오는 말을 알아맞히면 돈을 많이 딸 수 있다고 알려준다.
경마 투표권(마권) 규칙 설명 장면에서 멈칫했다. 일부러 해당 문장을 천천히 읽었음에도 아이들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단어는 간단한데 그 단어가 설명하는 개념이 생소해서 낯선 문장이었다. 가장 빨리 들어오는 말을 예상하면 돈을 따다니, 초등학교에서 찾아보기 힘든 규칙이었다.
우리 반은 달리기에 돈을 걸지 않는다. 만일 그런 대회가 있었다면 진즉 승우나 정우가 인기왕이 되었을 것이다. 그 둘은 언제나 영점 몇 초 차이로 1, 2등을 다툰다. 4학년 1반 친구들은 승우파와 정우파로 나눠 갈라지지 않는다. 베팅하기에 앞서 선수의 아침 안색을 살피고, 식사 여부와 컨디션을 확인하는 일 따위도 없다. 모두가 즐겁게 뛰고, 안 뛸 때는 다른 애들 뛰는 걸 본다. 마찬가지로 시험 점수나 피구 경기의 배당률을 계산하지 않는다.
손녀를 데려온 할아버지도 처음에는 말 구경이나 시켜주자는 의도였을 것이다. 근묵자흑, 손때가 묻을 정도로 마권을 꼭 쥔 사람들 속에서 할아버지는 흔들린다. 오늘만큼은 뭔가 일이 풀릴 것 같았을까, 할아버지는 턱을 괴고 중얼거린다.
우리 공주님도 말을 꼼꼼히 보고 어떤 말이 잘 뛸지 마음속으로 생각해 봐.
1번 말은 계속 씩씩거리고, 2번 말은 자꾸 떨고, 3번 말은 땅만 보고 걸었으며, 4번 말은 뒷발을 거듭 치켜든다. 손녀는 12번 말까지 찬찬히 살펴보다가 토토를 쏙 빼닮은 9번 말에 꽂힌다. 무슨 이유에 선지 아무튼 9번이 이길 거라고 확신한다. 할아버지는 손녀를 남겨두고 종이와 펜을 들고 밖으로 나간다.
손녀가 고른 9번 말 토토는 순한 눈빛이다. ⓒ보림
마권이 마감되었다는 방송과 함께 할아버지가 들어온다. 손녀는 할아버지가 몇 번을 골랐는지 궁금하다. 그러나 할아버지는 출발 신호를 숨죽여 기다릴 뿐 입을 열지 않는다. 여기서 잠시 책 진도를 멈췄다. 말들이 서있는 장면을 유심히 보라고 했다.
"너희는 어떤 말이 이길 것 같니?"
"2번이요, 빨간 마스크가 멋있어요."
"10번이요, 털이 검은 게 다크호스 같은데요."
애들은 낄낄거리며 아무나 찍었다. 경주마 역대 전적을 알려준 적이 없으니 인상만 보고 어림짐작하는 수밖에 없었다. 영 경마장 분위기가 안 났다. 만일 여기서 참가비 100원씩을 받아 1등 맞추는 사람에게 몰아주기를 했다면 어땠을까? 돈 없는 학생에겐 교사가 하루 이자 50% 고금리로 100원을 빌려주고. 아마 자기가 지지하는 말을 목청 터져라 외치지 않았을까. 발칙한 세계가 대뇌피질에서 생생하게 그려졌다.
환호하는 당첨자와 쓰라린 표정의 나머지 아이들, 본전심리로 한 판 더를 외치는 열혈파와 스스로 머리를 쥐어박으며 자책하는 신중파. 더 나아갔다가는 머릿속에서 청소년 도박 영화 한 편을 찍을 것 같아 그만두었다. 아이들이 얼른 경기 결과를 알려달라며 졸랐다.
부질없는 망상을 얼른 구겨버리고 다음 장으로 넘어갔다. 탕! 짧은 출발 신호음과 동시에 말머리가 튀어나온다. 엄청난 박력이 화면을 그득 채운다. 사방으로 모래가 튀고, 뜨거운 콧김이 뿜어져 나온다. 기수와 경주마는 오직 정면만 사납게 노려보며 고삐를 챈다.
7번, 7번! 62배, 62배, 62배! 가라!
할아버지는 6번 말 똥구멍 냄새나 맡았던 7번을 외친다. 한편 배당률을 이해하지 못하는 아이들은 "62배"를 응원 구호쯤으로 받아들였다. 62배라는 말을 듣고도 아무 반응이 없길래 의미를 천천히 풀어줬다.
"62배는 7번 말이 우승하면 처음 걸었던 돈의 62배를 받을 수 있다는 말이야. 만 원이면 육십 이만 원을 받는 거지."
"와, 쩐다. 핵(치팅-Cheating 부정행위) 유저네."
상영이는 돈 벌기 참 쉽다며 "와~ 대박, 와~ 대박"을 연발했다. 부자 되기가 그리 간단하면 너도나도 경마장에 가야지 뭐하러 공부하느냐 했더니 그제야 멈췄다. 그리고 할아버지의 62배 꿈은 실현되지 못했다.
말은 그저 달린다. 달릴 때 만이라도 자유롭기를. ⓒ보림
우리 토토가 1등으로 들어왔다고 펄쩍펄쩍 뛰는 손녀를 두고 할아버지는 그저 앉아 있다. 손녀는 사람들의 반응이 낯설다. 사랑하는 토토가 이겼는데 기뻐하는 이가 별로 없다. 도리어 패배한 말에게 화를 내고, 할아버지처럼 슬퍼한다. 어째서 명랑한 달리기 경주가 이토록 우울할 수 있는 것일까.
우리 반 애들은 경마장 손님처럼 돈을 걸지 않아서인지 토토가 이겼다고 같이 기뻐했다. 주인공이 승리하는 해피엔딩은 독자를 행복하게 한다. 명훈이는 할아버지가 신경 쓰였는지, 돈을 걸 때 손녀 말을 들었으면 기분이 괜찮았을 거라고 했다.
"다음부터 토토에게 돈 걸면 되지 않을까?"
셈이 빠른 찬혁이가 머리를 굴리자, 다들 눈이 반짝이며 그러면 되겠다고 맞장구쳤다. 흥분의 도가니에 빠진 꼬마들에게 적절한 조언을 해주고 싶었는데 재빨리 떠오르지 않았다. 대신 손녀의 마지막 대사를 또박또박 크게 낭독했다.
다음 주에도 또 그다음 주에도 나는 할아버지와 함께 경마장에 갔다. 그런데 점점 지겨웠다. 그리고 나는 토토를 다시 볼 수 없었다. 사실 토토를 다시 본다 한들 알아볼 수 없을 것 같았다. 왜냐하면 언제부턴가 말들이 다 똑같아 보였기 때문이다.
아이들이 토토를 토토로 볼 수 있는 날이 오래 지속되기를 기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