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짬그교17] 모험이란 이런 것, 행동하지 않으면 알 수 없는
"6학년들은 수학여행으로 롯데월드 갔다 왔대요. 우리는 안 가요?"
6학년 언니들이 롯데월드에서 사 온 동물 머리띠를 보고 지후 입이 삐죽 나왔다. 지난달 울진엑스포공원에서 슬러시 사 먹고, 원숭이 먹이 주면서 누구보다 즐겁게 놀고 온 그녀였다. 지후는 태어나서 한 번도 롯데월드나 에버랜드에 못 가봤다고 울상이었다.
"학교에서는 맨날 가는 데만 가요."
정곡을 찔렸다. 태백 365 세이프 타운, 수로부인 헌화 공원, 이사부 사자공원... 삼척 주변의 현장체험학습 장소라 해봐야 몇 군데로 한정되었다. 그렇다고 외지인에게는 유명하지만 아이들 입장에서 동네 권역에 불가한 환선굴, 천은사, 무건리 이끼계곡에 갈 수도 없었다. 따분한 소풍에 싫증난 지후에게 들려줄 이야기가 필요했다. 이럴 땐 <아빠가 용을 사 왔어요>가 제격이었다.
그림을 그린 헬렌 옥슨버리는 작가 존 버닝햄의 아내이기도 하다 ⓒ현북스
"여보, 집에 올 때 올란도에게 줄 애완동물 좀 사 오세요."
분쟁의 불을 지핀 건 벨사키 부인이었다. 지극히 평범한 벨사키 씨는 여느 때와 같이 회사에 늦어 뜨거운 오트밀을 후루룩 들이키던 중이었다. 벨사키 씨가 집에 동물 키울 자리가 어딨냐고 하자 아내는 올란도가 원하기만 한다면 코끼리라도 키울 수 있다고 딱딱거린다.
"코끼리? 알겠어요, 알겠다고요!"
"하지만 우리 아들이 코끼리를 키우고 싶어 할 리는 없지요. 당신은 너무 고리타분해요!"
아내의 도발에 발끈한 벨사키 씨는 모험을 감행한다. 애완동물 가게에서 강아지와 새끼 고양이들, 온갖 종류의 새와 물고기를 뒤로 하고 용 한 마리를 집으로 데려온 것이다.
"용이라고요? 그래, 아주 잘 고르셨군요. 그런데 어디서 용을 키울 셈인에요?"
"당신이 코끼리라도 키울 수 있다고 하지 않았소?"
부모님이 티격태격하거나 말거나 용은 올란도에게 딱 맞는 애완동물이었다. 처음에는 신발 상자, 그다음은 새장, 그다음은 개집에서 용을 길렀다. 용을 기른다는 사실만으로 벨사키네는 평범하지 않은 가족으로 대접받는다. 가끔 벨사키 부인의 친구들이 뭐 때문에 용을 키우냐고 물으면 부인은 늘 이렇게 대답했다.
"벨사키 씨는 생각이 있는 사람이라고, 그는 고리타분한 사람이 아니야."
용은 자꾸 자랐다. 연기와 불을 내뿜을 만큼 자란 용은 마당을 꽉 채운다. 벨사키 가족의 친구들은 겁이 나서 더 이상 희귀한 동물을 보러 오지 않았다. 급기야 시장이 용의 몸 크기에 문제를 제기하며 벨사키 씨네 집을 방문한다. 붉은 망토를 걸친 시장은 일주일 안에 거대한 생물을 처리하라고 거만하게 경고한다.
"용이 시장을 잡아먹으면 되지 않나?"
시장을 먹어버리라는 산하의 아이디어에 아이들이 키득거렸다. 상영이가 입을 크게 벌려 무언가를 와구와구 씹는 시늉을 했다. 좀처럼 큰 동작을 하지 않는 가현이가 손뼉을 치며 좋아했다.
고압적인 자세로 손가락질하는 시장을 먹어치우는 용이라니, 상상만으로 통쾌한 모양이었다. 부모님과 선생님의 권위에 눌려 사는 아이들은 권력자인 시장보다 위협받는 용을 지지했다.
용 덕분에 벨사키 가족은 평범함에서 벗어난다 ⓒ현북스
"우리가 용을 판다면, 용은 분명히 가방으로 만들어질 거야! 아, 용을 사랑하는 농부가 있다면, 그곳으로 우리 용을 보내면 될 텐데."
용을 사랑했던 벨사키 부부는 정든 애완동물을 가방 공장에 팔 수 없었다. 그러나 크리스마스 휴가를 가거나 트리 살 여유도 없는 그들에게 거액의 먹이 비용은 큰 부담이었다. 우울한 표정의 벨사키 가족을 바라보던 용이 불쑥 말을 건다.
"저도 당신들을 사랑하지만, 전 다른 곳에서 살아야 해요. 사실 여기가 좀 좁아지기 시작하던 참이었어요. 저와 함께 크리스마스 휴가를 가면 어떨까요?"
여행지는 마법의 섬. 벨사키 가족은 평범한 이웃들에게 손을 흔들며 뜻밖의 휴가를 떠난다. 용꼬리에는 이불과 옷, 골프채를 담은 가방들이 주렁주렁 달렸다. 구름 위로 높이높이 날아오른 용은 한참 뒤 아래로 아래로 내려왔다. 새파란 바다 한가운데서 온통 여름 잎사귀 같은 금빛과 푸른빛이 감도는 마법의 섬이 모습을 드러냈다.
"우와, 디즈니랜드다!"
에메랄드빛 숲 사이로 삐죽 솟은 높은 성을 보며 보희가 함박웃음을 지었다. 월트 디즈니 영화 인트로 영상에 나오는 중세풍 성을 떠올린 것 같았다. 성을 찬찬히 살펴보던 수연이가 창가에 앉은 아가씨를 라푼젤이라 부르자, 머리가 짧아서 아니라는 반박이 즉각 이어졌다. 그럼 저 사람은 누구냐고 묻자 꼬마들은 집단지성을 총동원하여 엘사, 신데렐라, 미녀와 야수를 떠올렸다. 진실이야 어떠하든 내가 좋아하는 인물을 이야기 속에 집어넣는 놀이는 즐거웠다.
"죽기 전에 디즈니랜드 가보고 싶다."
그간 조용히 지켜만 보던 지후가 처음으로 말문을 텄다. 마법의 섬에서 인어 노래 듣고, 해적과 모험 떠나던 벨사키네 가족은 드디어 크리스마스를 맞이한다. 벨사키 씨는 신기하고 다양한 음악이 나오는 피리를, 벨사키 부인은 에메랄드와 상아로 만든 재봉틀을, 올란도는 말이 살아 움직이는 체스를 선물 받는다.
크리스마스 선물을 싣고 돌아오는 벨사키네 가족 ⓒ현북스
"이제 예전 생활로 돌아갈 준비가 된 것 같아. 남편이 고리타분한 사람이 아니라서 기쁘고, 용에게도 고맙지만, 분명한 건 이웃들과 다시 사이좋게 지낼 수 있다는 거야."
완벽한 크리스마스 휴가를 보낸 벨사키 부부는 집에서 만족스러운 티타임을 가진다. 용이 사라진 집은 넓고 조용하다.
"지후야, 집에 돌아온 벨사키 부인은 불행할까? 행복할까?"
"행복할 것 같아요. 친구들하고 다시 놀 수도 있고 편하게 쉴 수 있잖아요."
"그럼 지후는 매일 친구하고 놀고, 집에서 편하게 쉬니까 이미 행복한 거네?"
지후는 잘 모르겠다며 얼굴을 붉혔다. 나는 지후에게 기회가 되면 어디든지 떠나보라고 했다. 그토록 가보고 싶다는 롯데월드도 좋고, 가까운 강릉이라도 괜찮으니 가보라고 부추겼다. 있던 자리를 떠나본 사람만이 옛 자리를 돌아볼 수 있다. 안온한 일상의 소중함은 일상이 깨어진 곳에서 피어난다.
"좋긴 한데, 너무 많이 다니면 힘들지 않을까요? 집 나가면 고생이라는데."
"질문을 바꿔볼게. 벨사키 가족이 용을 키우면서 안 힘들었을까?"
"힘들었겠죠. 먹이 주고, 똥 치우고, 목욕시키고."
용이 아니라 개 한 마리, 고양이 한 마리라도 집에 들이면 손이 간다. 마찬가지로 다리가 전혀 안 아픈 여행, 돈과 시간이 안 드는 여행은 없다. 배낭을 싸기도 전에 거기 가봤자 이러저러할 게 뻔해, 땡기긴 하는데 막상 갔을 때 별로면 어쩌지? 라며 포기해서는 안 된다.
더군다나 가슴속에 불꽃이 파바박 튈 만큼 강렬하게 품었던 꿈이라면 최선을 다해 도전해야 한다. 롯데월드에 가봐야 내가 진짜 원했던 것이 롤러코스터였는지, 일상 탈출이었는지 알 수 있다. 디즈니랜드에 갈지 말지는 그때 가서 고민해도 늦지 않다.
"벨사키 아저씨가 또 용을 사 올까요?"
그건 아무도 모른다. 애완동물 가게 주인에게 수소문해서 새로운 용을 데려올 수도 있고, 한때의 아름다운 추억으로 간직하며 단념할 수도 있다. 적어도 확실한 건 벨사키 씨가 올란도의 애완동물로 용을 택했기 때문에 환상적인 날들을 보낼 수 있었다는 사실이다.
벨사키 씨는 아내 잔소리가 듣기 싫어서 용을 샀다. 이렇게 평범한 사람도 과감한 결정 한 번으로 인생이 바뀌었다. 우리가 걱정해야 할 것은 어디서 용을 사야 할지가 아니라, 용을 눈 앞에 두고도 겁이 나서 돌아설 자신이다. 혹시 아는가? 용이 우리를 등에 태우고 마법의 섬으로 인도할지. 그것도 오직 행동으로 옮긴 자만이 알 수 있는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