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권친화적인 교실 꾸리기 - 열두번째 이야기: 미디어, 미디어, 미디어!
3월초부터 아이들과 열심히, 최선을 다해 인권친화적인 교실을 꾸려봅니다.
물론, 인권교육의 목표가 아이들을 '착하게' 만드는 것에 있지는 않지만,
그래도 우리가 교사인 이상, 아이들의 변화를 기대하는 건 당연한 바람일테지요.
그러나 공들인 것에 비해 아이들은 '인권친화적'인 생각과 행동을 보이는 것 같지 않습니다.
여전히 아이들은 서로를 '놀리고',
서로의 신체를 '함부로' 때리거나 건들고,
장애인 등을 '비하'하는 표현을 '거침없이' 사용합니다.
이런 아이들의 모습을 보면, 실망도 되고 좌절스럽기도 하고,
이게 아닌가? 내가 뭘 잘못했나? 싶은 마음이 들기도 합니다.
때론, 예전처럼 '소리를 꽥' 질러서 아이들을 제압하고,
내 눈앞에서 일명 '문제행동'을 하지 못하게 힘을 쓰고 싶다는 욕구가 불쑥불쑥 올라오기도 합니다.
그러나, 아이들의 이런 모습은 어쩌면, 무척 당연할지도 몰라요.
아무리 교실에서 인권교육을 잘 한다한들,
아이들은 나와 함께 지내는 시간보다
가정과 사회에서 지내는 시간이 절대적으로 많기 때문이지요.
그 중에서도 아이들에게 크나큰 영향을 미치는 건 바로 TV, 인터넷 등의 '미디어'.
그렇기에,
미디어를 통해 전파되는 '인권침해적'인 시각에 대해 고민하지 않는다면,
인권교육은 말짱 도루묵이 될 때가 많습니다.
최근 핫한 인기를 모으고 있는 드라마, '또 오해영'의 한 장면입니다.
보신 분들, 계시나요?
주인공들이 다툽니다.
그러다가 남주인공이 '싫다고 말하는' 여주인공의 손목을 휘어잡고 키스를 합니다.두 사람은 언제 서로 다퉜나 싶게 진한 키스를 나누지요.
그러다가 남주인공은 갑자기 여자의 손을 놓고는 그 자리를 떠나버립니다.
이 장면, 어떻게 보셨나요?
'잘생긴' 남자배우가 감미로운 '배경음악'과 함께 보여주는 '박력있는' 모습에
시청자들은 설레는 감정을 느낍니다.
게시판의 반응도 대체로 비슷합니다.
섹시하다, 심장이 두근두근, 잠 못자겠다 등등,
이 장면에 대해 환호의 박수를 보내는 반응이 대부분입니다.
한창, 감수성 예민한 사춘기 청소년들은 이 장면에 더더욱 설레는 마음을 느꼈을 수도 있습니다. (저의 청소년기 시절, 드라마 속 주인공에 '빙의'했던 경험을 되돌아보면, 충분히 그렇지 않았을까 싶거든요. ^^)
'인권의 눈'으로 보는 이 장면은 무척이나 위험하고 불편하게 다가옵니다.
톡 까놓고 말해서, 이 장면은 '데이트 폭력'이거든요.
'싫다'고 말하는 여자를 '힘'으로 제압해서 키스를 하지요.
뭐... 그 전에 여자 역시 수도 없이 남자에게 가방을 휘두르는 등의 행동을 하더군요.
여자의 행동 역시 정당화될 수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키스신이 더 위험한 건,
NO를 NO라고 받아들이고 물러서는 것이 아니라,
'힘'을 사용해서 제압하는 모습이 나타나는 것과
그 후, 여자의 분노가 녹아내리는 장면이 결합되었기 때문입니다.
어떤 수위의 성적 행위든, 그 행위는 '자기결정'에 의해야 합니다.
그러나 드라마의 이 장면은
'자기결정권'을 침해하고도 좋은 결과로 이어진다는 왜곡을 불러일으킵니다.
잘 연출된 드라마를 통해 시청자들에게 '설레는' 감정을 불러일으키는 이 장면은
그래서 무척 위험합니다.
키스를 잘 하기만 하면,
우선 키스를 하기만 하면,
상대방의 마음을 되돌릴 수 있을거고,
그러니까 키스하기 전의 싫다는 말은 들을 필요가 없다는 걸
무의식중에 학습하게 되니까요.
미디어에 드러나는 '남녀관계'는 이런 장면이 참 많습니다.
남녀를 불문하고 왜곡된 성 인식을 심어주지요.
이런 성 인식에 자주 노출되고, 이를 당연하게 받아들이는 사회에서 살아가는 아이들이MISOGYNY를 내면화하는 건, 어쩌면 너무나도 당연한 일이 아닐까요?
** MISOGYNY: 미소지니. 성차별, 여성에 대한 성적 대상화, 폄하와 비하 등의 사회 현상을 일컫는 말. 우리나라에서는 '여성혐오'로 번역되었다.
그리고 이런 MISOGYNY가 아래와 같은 사건으로 드러나는 것 역시,
그 또한 어쩌면 자연스러운 귀결이 아닐까 합니다.
그렇기에 인권교육은
'미디어'에 대해 이야기를 빠뜨릴 수가 없습니다.
'또 오해영'의 키스신을 보고
자연스럽게 '설레는 감정'을 느끼도록 놔두는 것이 아니라,
그 속에 담겨진 의미와 폭력에 대해 생각해볼 기회를 주는 것.
그래서 그런 장면을 보았을 때 설레는 것이 아니라
'불편함'을 느낄 수 있게 해주는 것.
그게 미디어를 통해 할 수 있는 인권교육의 내용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