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깔때기 독서시간] #3. 수업은 누구를 위한 것일까
'곤이'는 어렸을 적에 부모를 잃어버리고, 혼자서 자랐습니다.
소년원에도 들어갔다 오고, 꽤 '거친' 삶을 살았지요.
그러다가 우연히, 아빠를 다시 만나게 됩니다.
대학교수이자 사회적 지위가 있었던 아빠는 아들의 지난 과거를 인정하지 못합니다.
함께 살게 된 아들이지만, 그 둘의 관계는 극도로 나쁩니다.
곤이는 아빠가 자신을 인정하지 않는다며 이렇게 말합니다.
생각해보면, 꼭 곤이와 그의 아빠 사이에서만 있는 일은 아닙니다.
대부분의 많은 부모들이 자녀에게 이렇게 대하고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자녀의 생각과 삶에 진심으로 관심이 있다기보다 자녀에게 자신의 욕망을 투사하고 있을지도 모릅니다.
'다 너를 위한 일이야' 라는 말로 포장했지만요.
교사의 수업에서도 어쩌면 그런 비슷한 장면이 나타날지도 모릅니다.
교사가 생각하는 가장 좋은 방식의 수업, 좋은 방식의 배움을 설계해둔채,
학생들의 흥미와 관심이 흘러가는 방향을 틀어쥐고,
미리 설계해둔 그 방향으로 '몰아가는' 수업을 하고 있지는 않을까요?
사전에 정해진 수업 목표를 달성하는 것이 좋은 수업일까요,
아니면 학생들의 흥미와 관심이 흘러가는 방향에 따라 수업 목표를 수정할 수 있는 것이 좋은 수업일까요?
사실 잘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한 가지, 확신하는 것은 학생 한 명 한 명의 배움과 성장에 초점맞춰진 수업이 아닌
교사의 현란하고 능수능란한 수업기술에 초점맞춰진 수업은
좋은 수업이 아닐 것이란 점입니다.
손원평씨의 <아몬드>라는 책에 나오는 주인공, 윤재는 알렉시티미아 장애가 있습니다.
기억하기도 힘든 장애명이지만, 우리 말로는 '감정표현불능증'입니다.
대개의 사람들이 보이는 감정반응이 드러나지 않습니다. 감정을 '머리'로 압니다.
윤재의 엄마는 윤재에게 감정과 관련한 모범 답안을 가르칩니다.
일종의 '공감교육'입니다.
하지만 윤재의 엄마가 한 공감교육은 윤재에게 별다른 변화를 가져오지 못합니다.
일정 부분, 사람들 사이에서 그나마 도드라지지 않게 어울리는 '방법'을 알기는 하지만요.
윤재가 정말로 감정을 깨닫게 되는 순간은 사람과 사람을 마주하게 되면서입니다.
학교에서의 공감교육도 마찬가지일 것 같습니다.
교사로서 우리는, 학생들 한 명 한 명을 진실되게 마주하고,
또 학생들도 서로를 그렇게 마주할 수 있는 기회를 만들어주어야 하지 않을까요?
'방법'을 배우는 것이 무의미하다는 뜻은 아닙니다.
하지만 '방법'에 천착하는 것도 유의미하지 않습니다.
공감교육에 관심있으신 분들은 한번쯤, 읽어보실만한 책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