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각지대의 발생
지난여름 둘째를 낳고 얼마 되지 않았을 때의 일이다.
신랑은 일을 하러 나가고, 친정엄마와 함께 두 아이를 돌보기로 한 날이지만 친정엄마의 갑작스런 개인 사정으로 함께 할 수 없게 되었다. 신랑은 또지가 어린이집 등원 전에 집을 나서야 하는 상황,
oh my God!
또지의 어린이집 등원은 어떻게 해야 할지에 대해 신랑과 여러 방법을 생각해보았지만, 대책이 떠오르지 않았다. 아무리 생각해도 태어난 지 한 달도 채 안된 둘째를 데리고 함께 등원을 할 엄두가 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난 과감히 또지와 또규를 함께 집에서 데리고 있기로 결정했다. 그야말로 쓸데없이 미친 결단력! 출산한지 얼마 안 돼 손목이나 골반 등 몸이 온전하지 못한 상황에서 내가 왜 그런 결정을 했을까 싶었지만, 신랑은 점심쯤 귀가할 예정이니 둘을 동시에 케어해야하는 상황을 예고편처럼 경험해보고 싶었다.
둘째를 낳기 전 애둘맘(‘아이가 둘인 엄마’를 칭하는 용어) 선배들은 애가 둘이면 두 배가 힘든 게 아니라 네 배가 힘들다는 말을 많이 했었다. 그래서 난 그때마다
“하아……. 그래서 전 여덟 배가 힘들 거라고 생각하려고요. 그러면 네 배만 힘들어도 살만 하겠죠.”
라는 웃픈 대답을 하곤 했다.
하지만 오늘 신랑이 현관을 나서기도 전에 예상보다 훨씬 빨리 두 아이가 동시에 기상하는 까닭에 그야말로 멘붕이었다. 한쪽에서는 둘째가 배고프다고, 기저귀 갈아달라고 울고 있었고, 다른 한쪽에서는 잠기운이 남아있는 첫째가 안아달라고 보채고 있었다. 그렇게 한 손은 둘째에게 수유를, 다른 한 손은 첫째의 등을 쓰다듬으며 우리 셋의 하루는 시작되었다.
한 녀석이라도 아침잠을 조금 더 즐겨주길 바랬는데, 어쩜 그리 우리 아이들은 아침형 인간이란 말인가. 둘째를 잠시 내려놓고 첫째 아침밥을 차려주고, 둘째를 한 손에 안은 채로 첫째와 인형 놀이를 했다. 그러다보니 신랑이 차려주고 나간 내 밥은 당연히 건너뛸 수밖에 없었다. 그때서야 다시 한 번 실감했다. 정말 조리원은 천국이었구나.
그러다 배가 고파진 둘째가 울기 시작해 방에 들어가 수유를 시작했고, 첫째는 거실에서 혼자 놀고 있었다. 사실 그동안 또지가 혼자 놀더라도 대부분 내 시야 안에 있었는데, 오늘은 철저히 아니었다. 여유가 없어진 나는 자연스레 첫째에게도, 둘째에게도 건네는 말수가 적어졌다.
그때, 거실에 있던 첫째가 혼잣말처럼 내뱉은 말이 내 마음에 화살로 꽂혔다.
“엄마, 나랑 놀아줘요.”
“엄마가 내 옆에 있으면 좋겠다.”
이건 내가 전화통화 할 때 옆에서 놀아달라고 매달려 보채거나 울 때 내가 알려줬던 방법이었다.
‘또지야, 엄마가 전화통화 안하고 또지랑 놀아줬으면 좋겠어?’
‘응!’
‘그랬구나, 그런데 또지가 울거나 보채면 또지가 뭘 원하는 지를 엄마는 정확하게 알 수가 없어. 대신 또지가 말로 표현해주면 엄마는 전화 끊고 또지랑 놀아줄 수 있어.’
그 이후로 몇 번의 시행착오를 거쳐 내가 통화를 하고 있을 때 나와 함께 놀고 싶은 또지는 말로 표현하기 시작했고, 그럴 때 나는 양해를 구한 후 전화를 끊고 또지에게 집중했었다. 그러다 보니 정말 중요한 용건의 전화는 또지가 나를 기다려주는 고마운 상황이 되기도 했었다.
그렇게 가르쳐준 방법을 다른 상황에, 특히 동생을 안고 있는 엄마에게 적용한 것이었다. 울거나 보채지 않고 혼잣말처럼 차분히 말하는 첫째를 보며 참 고마웠지만 한편으론 짠했다. 어디에선가 동생을 본 첫째의 심정은 첩을 데리고 들어와 같이 살자는 남편을 보는 본처의 마음에 견줄 수 있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었다. 그리고 삼남매의 맏이로 자란 나는 또지가 첫째로서 느낄 부담이나 상실감 등을 항상 염려하고 있었기 때문에 더 그랬을 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신생아 또지’에게는 집안일도 뒤로 할 만큼 끊임없이 눈맞춰주고 이야기를 해주었었는데, ‘신생아 또규(둘째 아이의 애칭)’에게는 그렇게 못해주는 것 같아 미안하고 애잔한 마음이 들었다. 태담이나 태교도 제대로 못했었는데, 태어나고도 이런 상황이라니. ‘둘째는 그럴 수밖에 없어, 그래서 둘째인 아이들 성격이 원만하고 알아서 순하다고 하잖아~’라고 말해주는 이도 있었지만, 전혀 위로가 되지 않았다. ‘둘째이니까’라는 것이 이 상황을 정당화할 수는 없었기 때문이었다.
어쩌면 네 배로 힘들다는 건 체력적인 것 이상으로 마음이 힘들다는 의미가 아니었을까?
그렇게 ‘육아 사각지대’는 발생하고 있었다.
어떻게든 시간을 때워야 했기에 또지가 욕조에서 물놀이 할 수 있도록 준비해주었고, 나는 또규를 안고 욕조 옆에 앉아 있으면서 많은 생각이 들었다. 앞으로 더 행복한 일도 많이 있겠지만, 그만큼 힘들고 다이나믹한 일들이 나를 기다리고 있지 않을까? 하지만 같은 에너지를 두 아이에게 나눠줘야 함을 앞서 걱정하기보다는 두 아이에게서 나올 시너지와 행복에 더 집중해보려 한다.
그동안 우리 집에서 볼 수 없었던 새로운 장면,
울고 있는 또규에게 ‘괜찮아. 누나가 있잖아!’라고 말해주는 또지를 바라보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