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급 민주주의를 위한 넓고 얕은 대화] 3. 규칙 세우기 전에 '이것'부터 해라
'학급세우기=규칙세우기'라는 오해
새학기가 시작되면 '3월 프로젝트' 혹은 '첫 주 살림'이라는 주제로 멤버십 강화를 위한 프로그램, 민주적 규칙제정을 위한 프로그램을 합니다. 많은 교육 서적에서 가장 공을 들여야할 시기이고, 이때에 모든 규칙의 첫 삽을 떠야 한다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그리고 실제로 그 방법은 효율적이고, 학생과 교사뿐 아니라 학생의 보호자에게도 안정감을 줍니다. 3월을 그렇게 잘 보내면 학습을 하는 데 안정적인 기반을 마련한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필자는 이 신화적인 생각에 절반의 찬성과 절반의 반대를 주장합니다. 3월은 학급세우기가 필요한 시기 이지만 규칙 세우기가 곧 학급세우기는 아니며 가장 마지막에 해야하고, 어쩌면 가장 비중과 공을 적게 들여도 되는 부분입니다.
그럼 왜 규칙은 가장 마지막에 그리고 가장 적은 공을 들여야 할까요? 세 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첫번째, 인간은 규칙과 통제 이전에 자유로운 존재입니다. 공동체를 새롭게 구성했다면 그 공동체를 바라 보는 시선이 규칙에 있기 보다 개인의 존엄과 자유에 있어야 합니다. 그러므로 완벽히 이 공간과 공동체안에서 자유롭고 존중받을 수 있다는 확신안에서 규칙을 만들어야 서로를 존중하는 방향과 평화로운 규칙을 만들 수 있습니다.
두번째, 이미 학생들이 기본적인 삶의 규칙을 알고 있습니다. 그 학급만의 독특한 문화와 교사의 개성에 따라 세부적인 규칙이 생길 수 있지만 학기초, 규칙없이 1달을 지내도 사실 아무런 문제가 없습니다. 만일, 문제가 생긴다면 학생들과 토의를 해볼 수 있는 좋은 소재가 됩니다. 규칙만들기 이전에 규칙이 필요한 까닭을 생각해 볼 수 있는 것입니다.
세번째, 필요성의 경험과 민주적 의사결정 과정을 겪어보지 않고 규칙을 성급하게 만들면, 그 규칙의 수호자는 '교사' 개인이 되며 공동체의 약속인 '규칙'에 대한 유연한 '가능성'이 사라집니다. 그럼, 필요성의 경험과 의사결정 과정에 대한 자세한 이야기를 더 나누어보도록 하겠습니다.
민주주의의 핵심은 열려 있는 '가능성'
교사들이 학기 초 규칙 만들기에 많은 에너지를 쏟는 데 여러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우선, 절차적 정당성을 확보하기 위함일 것입니다. 한번 정해서 완벽히 적용시킨 후 1년 동안의 지침으로 삼아 불필요한 논쟁을 막고자함에 있을 것입니다. 함께 정한 규칙, 법에 의한 학급살이는 서로의 권리를 적절히 보호하며 의무를 다하게 할 것입니다. 이런한 법치주의는 민주주의를 달성하는 데 중요한 요소입니다. 그러나 민주주의 반대격으로 취급되는 '독재주의' 또한 법치주의를 표방하고 있습니다. 모든 독재자들이 국민을 통치하는 데 있어서 '법'을 가장 강력한 무기로 삼는 다는 것은 누구나 아는 사실입니다. 다만, 그 법을 누가 만들고, 누구에게 유리하게 작용하며, 어떤 견제를 받고 있는지가 중요하겠지요. 그래서 독재자들의 법치주의에는 '가능성'이 없습니다. 가능성이 없다는 것은 공론화할 수 없다는 뜻이고, 입법의 과정이 없다는 뜻이며 견제를 받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교사는 학급 규칙 제정 이전에 학생들의 학급 살이 속에 '가능성'에 대해 충분히 이야기하고 경험할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학생들은 학급 살이에서 무엇인가를 말할 수 있다는 '가능성', 그 발언으로 인해 실제 삶이 바뀔 수 있다는 '가능성', 한 번 정해진 것이라도 정당한 의사결정 과정을 거쳐 언제든 바꿀 수 있다는 '가능성' 을 충분히 경험해야 합니다.
그렇다면 그 가능성을 경험하기 위해서는 어떤 활동이나 문장이 필요할까요? 크게 두 가지 요소를 제시하고 싶습니다.
첫 번째, 다름을 존중하는 것입니다. 애초에 다른 가능성을 제시하는 일은 '기존의 질서'에 대해 의문을 품고, 불편함을 느끼는 일입니다. 그러므로 불편한 감정을 느끼고 용기있게 대안을 제시한 사람, 그리고 그 의견에 대한 존중과 인정은 학급 민주주의 시작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저는 이러한 다름을 두가지로 나누어 이해가능한 다름과 이해불가능한 다름으로 설명합니다. 두 가지의 차이점을 설명해보겠습니다. 아래 그림을 먼저 보실까요?
착시 그림으로 많이 사용하는 고전적인 작품입니다. 선을 어떤 관점에서 보느냐에 따라 뒷모습만 보이는 여성의 모습이 보이거나, 코가 큰 할머니가 보일수 있습니다. 이것은 두 가지의 관점이 모두 수용 가능하기 때문에 누군가 알려주기만 하면 바로 이해할 수 있는 다름입니다. 그래서 이러한 다름은 학생들이 굳이 노력을 들이지 않아도 쉽게 받아들이고 인정합니다. 사실관계가 명확한 다툼이나 규칙 위반, 이야기 감상평 등 역지사지라는 말도 쓸 수 있을 만큼 공유된 경험과 감정의 다름이죠. 그러나 아래의 그림부터는 양상이 달라집니다.
왼쪽과 오른쪽의 사진은 누리꾼 사이에서 색깔논란을 불렀던 유명한 짤방입니다. 왼쪽 사진은 "파란색과 검은색의 조화 VS 흰색과 금색의 조화"로 사람들이 다투었고, 오른쪽 사진은 "민트와 회색의 조화 VS 핑크와 흰색의 조화"로 논란이 되었습니다. 여러분은 각각 어느색으로 판단하겠습니까? 그리고 주변 지인들과 이 색에 대해 이야기를 나눌 때 다른 색을 주장하는 사람을 만난다면 그 색을 인정할 수 있을까요? 아마도 불가능할겁니다. 왜냐하면 아무리 노력해도 다른이가 주장하는 색은 내눈에 절대로 보이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이러한 사진을 보며 학생들과 의미있는 이야기를 나눌 수 있습니다.
"내 눈에 보이지 않아서 인정할 수는 없지만, 그렇게 색을 느끼고 보는 사람이 반드시 존재한다. 그러므로 그 존재를 부인하거나 배척할 수 없다."
"그 색을 보는 사람이 더 많다고 해서 진리일 수 없고, 다른 색으로 보이는 사람이 소수라고 해서 걱정할 필요없다."
"우리는 우리가 느끼는 색 그대로를 존중받아야 한다."
"우리는 그 모든 가능성을 인정한다."
실제로 빛의 반사 정도에 따라 드레스의 색이 다르게 보였습니다. 그래서 한 드레스 안에 두가지의 관점 모두 인식이 가능해졌습니다. 이해할 수 있는 다름과 이해할 수 없는 다름 모두 공존 가능합니다. 교사 또한 자신에게 보이는 것 만을 최고의 가치로 생각하며 학급을 이끄는 핵심으로 삼을 수 있으므로 "가능성"에 대한 인정은 교사 스스로에게도 늘 지침이 되는 문장이어야 하겠습니다.
가능성을 경험하기 위한 두 번째 활동은 제대로 된 의사소통 방법을 익히는 것입니다. 자신의 감정과 의견을 잘 말하고, 상대방을 설득할 수 있는 말을 할 수 있을 때에 의사결정과정은 더욱 원활해 집니다. 그러므로 의사소통 방법은 어느정도 정형화된 테크닉과 훈련이 필요합니다. 이 방법에 대해서는 다음화에서 자세히 다루도록 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