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당학, 학당교]#8 평등과 형평
체육 시간, 공을 던져 과녁을 맞추는 활동이 한참이다. 어디선가 분노에 찬 항의소리가 들린다.
“선생님! 왜 여자애들은 우리보다 앞에서 던져요?”
“아, 그런가? 하긴 평등해야지. 그럼 여학생들도 남학생과 같은 줄에 서서 던지세요.”
그리고 한참 뒤, 의기양양한 남학생들과 달리 여학생들은 어깨에 힘이 축 빠져 주저앉아 버렸다.
“선생님, 저희는 한 개도 못 넣었어요. 저희는 체육을 못하나봐요.”
당황스럽다. 교사도 학생들도. 모두가 원한건 이런게 아닌데 말이다. 오늘 다룰 이야기는 평등과 형평에 대한 이야기다. 이 이야기를 하기 위해서는 우선 ‘소수자’에 대한 이야기를 해야 한다. 초등학교 사회교과에는 양성평등과 소수자의 권리에 대한 이야기가 담겨있다.
교과서의 ‘소수자’정의에 대하여
‘대다수의 사람이’로 시작하는 이 정의에 의문을 품고 질문을 던졌다. 말 그대로 소수인 경우 대부분 ‘소수자’가 되는 것일까? 아이들은 그렇다고 했다. 권력과 재산을 많이 가진 사람은 소수일까? 다수일까? 학생들은 혼란을 느끼기 시작했다. 소수자는 ‘정해져’있는 것일까? 대한민국에서 흑인은 소수자가 될 수 있을까? 그렇다고 한다. 그럼 우리가 아프리카에 간다면? 질문의 의도는 ‘우리도 시대의 상황과 맥락에 의해 언제든지 소수자가 될 수 있다’는 것을 이해하는 것이었다. 이러한 생각을 통해 궁극적으로는 "소수자라는 말이 없어져야 하지 않을까?" 주장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소수자는 그 숫자와 상관없이 차별과 부당한 대우를 받는 개인 혹은 집단으로 이해를 해야 한다. 수천만의 국민을 개돼지로 보는 누군가에게, 혹은 1명에게 우리는 소수자였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는 언제나 소수자가 될 수 있으며 그로 인해 사회적, 문화적, 경제적으로 차별을 받을 수 있는 것이다. 누구나 소수자가 될 수 있다.
평등(Equality)과 형평(공평,Equity)에 대하여
놀이를 할 때 남학생들은 불만이 많다. 왜 여학생에게 ‘이점’을 주느냐하고 말이다. 여학생이 넣을 때 추가 점수를 주거나 도전거리를 좁혀주는가 묻는다. 똑같은 기회를 주는 것은 평등(평등에는 과정과 결과의 평등도 내포하지만 현실에서 주로 사용하는 평등을 기회의 평등으로 더 많이 인식하므로)이다. 그러나 평등은 출발선이 같을 때 유효하다. 여기서 출발선은 단순히 ‘선’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신체적 능력, 자본, 환경 등을 모두 포함한다. 학생들은 평등을 '똑같이 대우하는 것'으로 생각하지만, 실제로 이렇게 하면 많은 사람이 불편함과 부당함을 느끼게 될 것이다. 소득이 다른 사람에게 똑같은 세금을 걷고, 장애인과 비장애인에게 똑같은 업무를 주고 성과에 따라 성과급을 다르게 지급한다든지 타고난 신체적 능력과 상관없이 같은 육체 능력을 담보하는 것이 그것이다. 형평은 목표에 도달할 수 있도록 최소한의 보조를 맞추어 주는 것이다. 수능시험에 저시력자 혹은 시험문제를 제대로 풀 수 없는 이에게 보조도구 및 여유시간을 주는 것이다.
그래도 학생들은 불만을 토로한다. “선생님, 그래도 솔직히 억울해요. 저보다 혜택을 더 받는 거잖아요.” 고 말한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나보다 덜 노력한 사람이 나와 비슷한 대가를 얻어 간다는 것을 감안하라는 것을 설득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그러므로 소수자에게 혜택이 돌아가는 것이 나에게 불이익이 된다고 생각하는 점을 깨뜨려야 한다. 모두가 멋진 풍경을 보는 일이 인간이라는 낱말을 인간답게 만들고 사회 전체 이익을 가져온다는 것을 알려주어야 한다. 어떻게 해야 할까?
모두가 같은 풍경을 볼 수 있도록 돕는 것은 이상주의일뿐인가?
형평은 사회전체의 이익을 달성하는 데 도움이 된다
다시, 체육시간으로 돌아가 보자. 과녁에 공을 맞추기 위해 필요한 힘을 사람마다 다르게 가졌다는 것은 서로가 합의가능한 일이다. 다만 힘이 약한 개인이 여학생 중에 많을 뿐이다. 그리고 상대적이다. 교사가 과녁과 출발선의 거리를 2배정도 늘리면 아무도 과녁에 공을 넣을 수 없기 때문이다. 이때 교사를 제외한 모든 학생이 소수자가 되어 버린다. 아무리 노력해도 과녁에 공을 맞출 수 없을 것이다. 그러므로 모두가 노력하면 공을 맞출 수 있는 거리를 각자 정해 보는 것이다.
우리의 목표를 ‘누가 더 공을 과녁에 잘 넣느냐’가 아니라 ‘내가 공을 과녁에 넣는 경험하는 것'으로 수정하면 된다. 그리고 개인의 평가가 아닌 모두의 평가로 바꾼다. “학급 구성원이 넣는 공의 개수가 개인의 평가”가 되도록 한다. 그러자 불만 많던 남학생들도 여학생의 출발선이 아닌 그들의 노력과 방법에 더 집중하기 시작한다. 어떻게 하면 더 잘 던질 수 있는지 알려주기 시작한다. 남학생 중에서도 과녁에 공을 맞추지 못하던 학생들이 조금씩 출발선을 앞당기기 시작한다. 출발선을 조절할 수 있다는 시스템과 사회적 합의를 연습하고 익숙해지면, 이러한 활동이 사회전체이익 실현을 위한 보조장치로써 볼 수 있는 마음이 생긴다. 우리가 소득에 따른 혜택이나 장애인을 위한 세금감면, 시설이용에 혜택을 주는 데에 아무런 심리적 거부감이 없듯이 이 생각이 더 넓게 퍼져 일상의 활동에 자리 잡는 것이다.
'나는 차별에 찬성한다'는 학생들에게
형평을 뜻하는 영어 Equity는 자본, 가치를 뜻하기도 한다. 부루마불 보드게임이 떠올랐다. 같은 자본을 가지고 같은 출발선에서 시작하지만, 주사위 운에 따라 승패가 갈리는 게임이다. 이 게임의 결과를 무난하게 받아들일 수 있는 까닭은 모든 조건이 같은 상황에서 시작한다는 것 때문이다. 그리고 대부분 부 획득의 상황이 운에 따라 결정된다. 운이 나쁜 것을 누구에게 탓하겠는가? 그런데 이것을 현실로 바꾸면 어떤 일이 일어날까? 가지고 출발하는 돈이 다르고, 주사위를 던질 수 있는 횟수가 달라진다. 심지어 누군가는 황금열쇠를 몇 개가지고 시작한다. 그러나 같은 선에서 출발하니까 공평하다고 말할 수 있을까? 이러한 사실을 인정하고 합의를 통해 부조리를 줄여나가는 것이다. 그런데 이 사실을 알지만, 인정하기 어려울 때가 있다. 가장 평범한, 그래서 어떠한 혜택도 못받고 있는 위치에 놓여 있을 때이다.
체육시간으로 돌아오자. 위와 같은 구구절절함에도 불구하고 가장 먼 출발선에서 어떠한 혜택없이 과녁에 공을 넣는 학생들이 있다. 그들의 마음속에는 어떤 의문이 떠오를 것이다. “어쨌든 나는 아무런 혜택을 받지 못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노력해서 성과를 내고 있다.” 그들에게 어떤 가치 평가를 내릴 지는 교사의 목표가 무엇인지에 달려있다. 그냥 무시할 수도 있고, 공개적으로 학생들 앞에서 칭찬을 해 줄 수도 있다. 혹은 평가점수를 더 줄 수도 있다. 그러나 '소수자가 받는 혜택'이 나에게 불이익이 되는 것이 아니라는 점은 확실히 해둘 필요가 있다. 이후의 결정은 구성원간의 합의 후에 이루어져야 한다. 이러한 과정의 반복 속에서 구조와 시스템에게 '형평'을 요구할 수 있는 학생들을 키워나가야 한다.
필자도 알고 있다. 이것은 초등학생의 체육시간일 뿐이다. 현실은 이것보다 복잡하고, 해결하기가 쉽지 않다. 학생들에게 형평을 이야기할 때 우리나라 대학입시제도 지원유형의 다양함을 예로 든다. 일반전형 외에 다문화학생, 농어촌전형, 각 종 소수자를 배려한 전형을 통해 공평한 교육기회를 얻지 못한 학생들에게 주어지는 혜택을 이야기한다. 그러나 그 학생들이 실제 입학을 하고나서 그 ‘전형’ 때문에 다른 학생들로부터 멸시와 혐오의 시선을 받는다는 이야기는 하지 못했다. 내가 저들보다 더 노력했는데 내가 힘들게 얻은 것을 저들은 거저(?)가져단다는 생각이 참 그럴듯하다. 그러나 이 두 집단은 잘못한게 없다. 층간소음으로 싸움이 붙은 윗집, 아랫집이 함께 모여 구조의 결함에 책임이 다분한 시공사에게 분노해야 하듯 노력을 통해 얻을 수 있는 열매를 한정지어놓고 그 열매의 신기루를 만들어 경쟁시킨 기성세대에게 분노해야 한다. (여기에 사회적 합의 과정없이 대중주의와 정치적 올바름만 따져 실제 형평과 어긋나는 전형을 만들어낸 것에도 분노해야 한다.) '뭔가 잘안되고 있다면 그건 너의 노력이 부족해서'라고만 떠드는 스피커에 분노해야 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차별에 찬성한다.' 는 자의식에 공분해야 한다.
수 많은 배려 전형이 학생들에게는 낙인이 되어 또 다른 차별과 멸시의 원인이 되고 있다.[출처 EBS, 공부의 배신 -나는 왜 너를 미워하는가]
체육이 끝나고 난 뒤
“남학생들도 힘이 약하면 앞으로 더 나와서 공을 던지세요. 여학생 중에서도 더 뒤로 물러가 던지고 싶으면 뒤로 가세요.” 아무도 나오지 않는다. 체육이 끝난 후 볼멘소리가 또 나온다. 모두에게 출발선을 바꿀 기회를 줬는데 말이다. 그런데 줄 서면서 “남자는….” “여자가….”라는 말이 나왔단다. 남학생 중에서 앞으로 가서 던지고 싶은 사람도 있었지만 그러지 못했다고 한다. “그래도 남잔데….” 하면서 말이다. 시스템으로 형평을 강조했음에도 학생들은 내면화된 고정관념으로 인해 자신의 자유로운 선택과 의사 표현을 제대로 하지 못했다. 어쩌면 여기서부터 또 다시 시작인지도 모르겠다. 이렇게 뿌리깊은 차별의 언어와 생각의 출발점이 어디서부터 였는지 모르겠다. 여기까지 생각이 뻗다보니 최초의 물음이 나에게로 왔다. '나는 편견없는, 차별하지 않는 교사인가?' 은연중 교사의 언어 선택과 행동에서, 일상적 몸짓에서 상대방과 스스로는 차별안에 가두고 있지는 않은지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