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의 교실이 실패하는 이유] 4. 프레임에 휘둘리는 교사
오랜만에 다시 시작하는 이번 시즌의 집중연재 '당신의 교실이 실패하는 이유'가 돌아왔다.
당신의 교실이 실패하는 이유를 다시 시작하며
야심차게 10회에 걸쳐 연재하겠노라 마음을 먹고 10개의 주제를 미리 작성해두었는데, 안 하던 짓을 하면 안되는 모양이다. 열심히 쓰고 보관해 둔 한글파일의 제목을 그냥 '제목없음'으로 해두었다가 필요없는 문서인줄 알고 날려버렸다. 한동안 망연자실하여 글쓰기에 재미가 뚝 떨어졌다가 다시 힘을 내서 '나의 교실 실패기'를 이어나가고자 한다. 다시 한번 말하지만, '당신의 교실이 실패하는 이유'의 연재목적은 정말로 당신의 수업이 잘못되었다는 말을 하려는 것이 아니다. 이것은 철저히 나의 개인적인 실패 경험이야기이며 많은 시간이 지나 뒤돌아 본 지금 '그 때 알았더라면...'하며 회고하는 글이다.
프레임(FRAME)은 틀이다.
언어학자 조지 레이코프는 '특정한 언어와 연결되어 연상되는 사고의 체계'라고 정의했다. 인간이 성장하고 학습하며 경험을 통해 매번 같은 생각의 처리 과정을 단순화하고 효율적으로 하기 위해 '생각의 처리 방식을 공식화'한 것이다.
가끔 패러다임(Paradigm)과 프레임이 혼동, 혼용되는 데, 간단하게 차이를 설명하면 프레임은 '개인의 사고'를 패러다임은 '대규모의 인식체계'를 뜻한다. 천동설이 진리로 여겨지던 시대에는 천동설의 패러다임 속에서 개개인의 과학적 사고가 작동하였고, 지동설이 확정된 이후에는 기존의 패러다임이 폐기되고 지동설을 중심으로 과학적 사고가 발전하였다.
이에 반해 프레임은 좀 더 개인, 일상생활에 근접한 용어이다. 우리에게 어느날 모바일 청첩장이 도착했다고 가정해보자. 현재 모바일을 활발하게 사용하고 있는 사람에게 모바일 청첩장은 날짜나 약도를 편하게 확인할 수 있기 때문에 좋은 초대 방법이다. 그러나 모바일 사용에 익숙하지 않은 분들이나 격식을 갖춘 종이 초대장에 익숙한 분들에게는 '무례한' 방법이 될 수 있다. 이렇듯 '모바일 청첩장'이라는 하나의 방법에 대한 생각의 차이를 '프레임'에서 찾을 수 있다. 우리는 그 프레임을 통해 세상을 보고 모든 중립적인 것에 대해 의미를 부여한다.
교실 속 프레임(FRAME)을 말하다.
많은 교사들은 교실 속에서 프레임을 만들고 작동시키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한다. 다양한 프레임 구축을 위해 온통 노력을 쏟는다. '3월 첫 주는 황금의 주'라는 말을 만들어 낸 사람은 우리에게 3월이 얼마나 중요한지에 대한 프레임을 만들어 버렸다. 이 프레임에 동의한 교사는 3월을 '황금'으로 만들기 위해 철저하게 준비하고 실행한다.
나의 신규 시절, 교실을 바라보는 프레임은 '질서'였다. 질서가 없는 학급은 공부도 제대로 안되고, 인성이나 배려도 안 생길 것이라는 믿음 때문이었다. 그래서 30쪽짜리 학급헌법을 직접 제정 및 반포(?)하기도 했고 항상 각잡힌 자세와 대답, 일사불란한 행동과 줄맞추기가 주요 과제였다.
교사의 프레임을 통해 학생들은 어떻게 행동해야 '교사의 마음에 드는지' 알게 된다. 그리고 자연스럽게 프레임을 동의하고 1년 간 교실을 움직이는 힘이 되는 것이다. 이것을 어떤 교사는 '울타리'라고 부르기도 하고, '약속'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하지만 결국 본질은 교사의 '프레임'이다.
지금, 당신의 교실은 어떤 프레임으로 움직이는가? 학생들의 자율에 의한 능동적으로 자발적으로 만든어진 프레임이라는 것이 가능할까? '너는 능동적으로 스스로 할 수 있어'라는 것도 결국 누군가의 힘이 아니면 불가능하다. 왜냐하면 어찌되었든 학생은 학교와 교실이라는 장소와 시간, 용어의 '틀'안에서 존재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한 프레임에서 강한 동기화가 되었던 학생들은 다음해에 전혀 다른 프레임을 제공하는 교사와 마찰을 빚거나 적응하는데 어려움을 겪기도 한다.
그래서 교사들은 늘 고민 한다. 어떤 프레임으로 학교와 교실, 학생을 바라보아야 할 것인가?
어떤 프레임이 우리의 교실을 행복하게 만들 것인가? 어떤 프레임이 학교교육의 본질을 달성하게 만들 것인가?
그러나, 우리는 이 문제에 대한 신선한 프레임을 가지기 어렵다. 우리도 익숙한 프레임의 학교 교육에서 자라온 세대들이니까.
프레임하면 떠올리는 모양은 '네모'이다. 그러고 보니 교실은 온통 네모천국이다.
나는 프레임에 마음껏 휘둘리는 교사
재난대피 훈련이 끝나고 운동장에 있던 학생들이 우르르 현관문으로 모여들었다. 서로 들어가겠다며 밀치고 아우성이다.
이때, 한 교사가 소리친다.
"왜 이렇게 질서가 없어? 천천히! 조용히!"
주범으로 붙잡힌 학생은 교사에게 붙잡혀 몇 분의 훈계를 듣고 억울함을 감추지 못한다. '제가 민게 아니라, 뒤에서 먼저 밀었어요. 전 억울해요.'
"그래도! 네가 잘못한건 잘못한거야."
학교의 교사는 기본적으로 학생에게 '개인의 도덕성'을 요구한다. 학생은 배려해야하고, 질서도 잘 지켜야 하며, 공부도 열심히 해야 한다. '순응하는 학생=착한 학생'이다. 교사의 프레임이 여기에 머물러 있는 동안, 학생들은 언제나 부정적인 행동을 하기 위해 준비되어 있으며 우리는 그것을 눌러줘야 하는 존재가 된다. 돌이켜보니 나는 그 프레임에서 아주 행복한 교사였다.
학급 규칙의 대부분은 '~을 하면 안된다. ~을 금지한다.'로 끝맺는다. 이게 편하다. 학생들도 뭘 하면 안되는지 아니까 단순하게 사고를 처리할 수 있다. 그런데 정말 학생들은 그 프레임 안에서 행복했을까?
다시, 그 날의 운동장으로 돌아가본다. 학생들은 여전히 현관문으로 우르르 모여든다. 역시 서로 들어가겠다며 밀치고 아우성이다. 나는 조용히 걸어가 닫혀있던 반대편 문의 걸쇠를 풀고 양쪽문을 활짝 열었다. 좁아터지던 입구가 넓어지고 아우성은 멈췄다. 아이들의 고함소리는 잦아들고 각자의 교실로 평화롭게 들어갔다.
늘 학생들을 실컷 혼내고 나서야 후회가 밀려온다. 과연 학생 만의 문제였을까? 나에게는 문제가 없었을까? 그 밖에는?
프레임 안에서 벗어나는 학생은 기어코 눌러 담아야 하는 교사라는 직업이 원망스러울 때가 많았다. '교사니까 당연히 이런 말은 할 수 있어야 해.'라고 스스로를 다독였다. 어이없게도, 나는 내가 원하지 않은 프레임에도 마음껏 휘둘리는 교사였다.
휘둘리지 말고 휘두르자?
결론에 다다르니, 겁이 난다. 내가 결국 하고자 하는 말이 뭔가? 프레임에 휘둘리지 말고 휘두르자는 건가? 그것도 개인의 프레임일 뿐 아닐까? 나의 프레임 고민의 종착역은 '늘 다른 면을 생각해보기', '비판적으로 생각해보기'를 의도적으로 해보는 것이다. 예를 들면 컵의 물이 반이 있을 때 '반이나 남았네?', '반밖에 없네?' 에 덧붙여,
'왜 반만 들어있지?' '누가 반을 마셨을까?'
를 생각해보는 것이다. 나는 이것을 프레임을 가지고 논다는 표현으로 해보고 싶다. 이런 과정을 통해 학생들 개개인이 보여주는 프레임을 다각도로 생각해보고 받아들일 수 있는 마음가짐도 생각해 본다. 우리가 한가지 틀에 집중할 때 우리의 눈과 뇌는 한 가지만 인식한다. 그리고 십수명의 삶과 인격이 있는 교실에서 그것은 매우 불행한 몇 명을 만들어 낼 수 있다.
일명 고릴라 테스트, 우리가 가진 시각과 사고의 한계를 잘보여주는 예이다.
프레임은 사고의 틀이다. 어린 학생들일 수록 교사의 프레임에 매우 큰 영향을 받는다. 심지어 인생을 바꾸어 놓을 수도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교사로서 자신의 생각을 한곳에 정착시킬 때 결과를 고민하고 예측할 수 있어야 한다. 배려와 정직, 규칙과 질서. 세상이 만들어내고 합의된 당연히 가르쳐야 할 덕목일지라도 다르게 생각해보고 비판적으로 생각해볼 수 있어야 한다. 학생들이 다양한 사고의 틀을 경험하고 어떤 명제도 비판적으로 생각해 볼 수 있는 기회를 주어야 한다. 기성세대인 우리가 겪지 못할 패러다임과 프레임속에서 생존해야 할 학생들에게는 그럴 권리가 있다. 다음 편에서는 학급안에서 프레임의 변화를 통해 알게 된 경험담과 방법을 나누고자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