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의 식물 project] #2 또 다시, 동백
"당신의 동백을 저에게 보내주세요."
라는 글을 올린 건 2월 말, 그 기간 동안 정말 많은 동백 사진을 받았습니다.
사람들의 사진을 받고, 저장하고, 고르고, 글을 쓰는 사이 저는 완전히 동백에 포위됐습니다.
평생동안 한달간 이렇게 동백만 생각할 수 있는 때가 또 오기나 할까요?
제가 자처한 일이지만, 이것은 정말 지독한 행운이었습니다.
(1편 링크 : https://www.educolla.kr/bbs/board.php?bo_table=Author_KimYeojin&wr_id=453)
제주도에서 아이들을 가르치는 김은주님이
"선생님, 동백 모집 끝났나요?" 하며 눈부시게 아름다운 동백 사진을 한 장 보내 오셨습니다.
선생님과는 한 번도 직접 만난 적 없는 사이지만, 벌써 여러차례 걸쳐 동백 사진을 보내주신 덕에
왠지 무척 친숙해진 느낌이 들었죠. 어디서 찍은 사진인지 물어보니 쇠소깍이 있는 동네, 하효라고 합니다.
'동백 모집'라는 말이 참 귀엽지 않나요.
"자, 이제부터는 벚꽃 모집이다."
"내일부터는 능소화 모집이야."
올해는 은주님 말씀대로 꽃을 마음껏 모집하고 다닐 생각입니다.
사실 위의 핫핑크 동백을 보자마자 바로 이 브랜드가 생각났지요. 바로 샤넬입니다.
브랜드 샤넬의 전설적인 디자이너 코코 샤넬의 동백꽃에 대한 사랑은 대단했죠.
현재 샤넬의 시그니쳐이기도 이 꽃장식 또한 물론, 동백입니다.
그래서 가끔 사람들이 동백꽃을 보고 "와, 샤넬 꽃장식 같아!"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사실은 샤넬 브로치를 보고 "진짜 동백같아!"라고 해야 하는 거 아닌가요? (하하)
실제로 저는 멜론을 처음 먹을 때 "이 멜론 정말 메로나랑 맛이 똑같아!"라고 한 적도 있습니다.
샤넬은 동백의 이미지를 차용한 것이 아니라 실제로 화장품에 동백 성분을 이용한다고 해요.
샤넬 전용 종묘장에는 3000여 종의 꽃이 있는데 그 중의 280종이 동백이라고 하니까요.
무엇이든 질려버리도록 좋아하는 사람들, 그런 사람들에게 저는 속절없이 끌립니다.
제가 받은 100여장에 가까운 동백 사진 중에 압도적으로 많은 것은 무엇이었을까요?
역시 가족, 친구들과 함께 보낸 소중한 한때를 찍은 사진들이었습니다.
종관님이 아내와 함께 찍은 사진은 사랑스런 표정으로 시선을 끌었습니다.
하지만 더욱 사랑스러운 것은 종관님이 아내를 위한 마음이었어요.
사진을 몇 장 보내시고 나서 다서 다급하게 한 장을 보내시며,
"선생님! 이 사진으로 부탁드릴게요. 그 전 사진은 아가씨 표정이 이상해서요. 아가씨는 아내의 애칭이랍니다."
결혼하고 나서도 여전히 아가씨라고 부르는 그 맘, 이왕이면 아내가 좀 더 예쁜 표정을 한 사진을 보냈으면 하는 그 맘.
그 마음이 동백보다 훨씬 예뻤습니다.
각자 모르는 두 분의 사진이 비슷하기도 해서 무척 즐거웠습니다.
왼쪽은 이은진님의 가족 사진, 오른쪽은 류민혜님의 친구들과의 여행 사진입니다.
피카소는 이렇게 말했죠.
"아이들은 누구나 예술가다. 문제는 어른이 되어서도 어떻게 예술가로 남아 있냐는 것."
꽃을 찍는 것이 단순한 기록을 넘어, 놀이가 된다는 걸 보내주신 사진들을 보며 알았습니다.
이서로님은 툭툭 떨어진 동백을 모아 하트를 만들고, 그것을 찍는 모습을 또 찍었습니다.
프레임 속의 프레임은 그것 자체로 작품 같은 느낌을 줍니다.
동백을 배경으로 손으로 별 모양을 만들고, 꽃으로 모양을 만들어 작품을 완성합니다.
이것이 놀이이 아니고, 예술이 아니면 무엇이겠습니까?
내 안의 아이는 소멸되지 않았을 거예요, 잠시 숨어 있을 뿐.
조영옥님은 꾸준히 드로잉을 하는 분입니다.
한 번 일상 속 예술을 해 본 분들은 알지요.그것이 얼마나 지속하기는 버겁고, 그만두기는 손 쉬운지요.
어쩌면 이미 영옥님에게는 드로잉을 멈추는 일이 버거울지도 모르겠습니다. 또한 예술로 자신을 표현하는 일은 중독이기도 하니까요.
통영에 있는 박경리 선생 묘소에 핀 동백을 그려주셨습니다.이로써 통영에 꼭 가야만 하는 이유가 하나 추가되었습니다.
꿀빵 먹으러, 회 먹으로, 박경리 선생님을 기리러, 작고 아담한 서점 '봄날의 책방' 에 들르러, 매년 봄마다 있는 통영국제음악제를 보러, 겨울엔 동백을 보러.
이왕 이렇게 된 것 어쩔 수 없네요. 계절할 것 없이 가야겠습니다.
김신혜님은 색다른 동백을 그려주셨습니다.
동백의 잎은 굉장히 매끈매끈하고 반들거리지요. 색연필로 그 윤기까지 그려내다니! 한두달 그린 솜씨가 아닌 듯 싶습니다.
우리는 아주 새빨간 빛의 동백을 떠올리지만 사실 동백의 색은 굉장히 다양합니다.
핑크, 빨강 뿐만 아니라 이런 얼룩무늬도 있지요.
한국에도 저런 무늬의 동백이 있나 싶어 검색을 하는 차에 때마침 박혜일님이 울산에서 사진을 보내주셨습니다.
울산선암호수공원에 이런 화려한 동백이 있을 줄이야.
인터넷에서 찾아보니 제주도를 비롯한 전국 각지에서 얼룩 동백을 찍어올린 사람들이 적지 않습니다.
이름을 알아내겠다는 심산이었는데 다들 "참 특이한 동백도 있다." 로만 그치네요. 식물 이름을 알아내는 일은 가끔은 수수께기 같기도 해요.
송양숙님은 그라데이션이 매력적으로 물든 분홍 동백 사진을 보내오셨어요.
사진 보내오신 모든 장소 통틀어 가장 큰 지분을 차지하는 제주 남원읍 위미리 동백군락지!
오목하게 쏘옥 들어가 있는 동백도 있지만, 이렇게 밖을 향해 활짝 열려 있는 동백도 있다는 걸 미처 몰랐습니다.
식물 찾아주는 어플 '모야모'를 다시 깔아야겠습니다!
스스로를 '제주소녀' 라고 지칭하는 임서현님은 서귀포에서 찍은 흰 동백 사진을 보내주셨습니다.
이렇게 하얀 동백이 가득한 사진은 참 신선하고도 새로웠어요. 작정하고 동백을 들고파고 싶다는 생각이 스물스물 드는 식물덕후의 덕후력!
19년간 사진을 찍어온 제 친구 정혜란도 동백 사진을 보내 주었습니다.
제게 사진을 보내기 위해서 외장하드를 다 털었(?)다는데요. 덕분에 간만에 동백 사진을 보게 됐으니 정말 고맙다고 감사의 인사까지 들었습니다.
아니, 제가 되려 감사할 일 아닌가요?
친구 정혜란은 아름다운 모든 것을 사랑합니다.
아름다운 빛, 아름다운 미소, 아름다운 색과 아름다운 하늘, 에펠탑과 같이 평생 짝사랑하는 건축물도 있으니까요.
그 중에서 가장 아름다운 것은 꽃이니 그녀의 앵글에 빠짐없이 포착됩니다.
사진쟁이 친구를 만나 덩달아 늘 카메라를 들고 다닙니다. 벌써 53일째!
편의점을 갈 때도, 주민센터에 갈 때도 들고 갑니다. 언제 어떤 장면을 만날지 모르니까요.
최윤경님은 대한민국 역사 박물관에서의 4.3 전시 사진을 보내주셨습니다.
담벼락에 꽃인 줄만 알았더니, 한동안 바라보니 전시회 벽 디자인이군요.
4.3 사건과 제주, 제주와 동백은 떼어 놓을 수 없다는 걸 다시 한 번 느낍니다.
오승주님은 "꽃 사진은 찍지 못했지만 제 가슴에 달린 동백을 보냅니다." 하고 가슴팍에 달린 뱃지 사진을 보내주셨습니다.
제주도에서는 역시 슬픈 꽃이라고요.
동백꽃이 툭툭 떨어지는 소리를 가지고 <동백꽃 무덤>이라는 동화 습작도 하셨다고 해요. 언젠가, 책으로 꼭 읽을 날 있었으면!
유새영님은 전남 강진에서 찍은 동백 사진을 보내오셨습니다.
꽃을 클로즈업해서 화려하게 찍은 분들과 달리 은근하게 드는 볕에 드러나는 누워 있는 동백들을 찍으셨어요.
어린이책을 만나러 어린이책 전문 서점을 기웃거리고, 포르투갈 여행을 갈 때도 굳이 필름 카메라를 챙겨가는, 새영님과 참 닮은 사진입니다.
사진을 찍는 시선은 그 사람 자체이기도 합니다.
유지선님은 제주 신례리에서 찍은 꽃 전체가 아닌 꽃잎 사진을 보내오셨어요.
그녀는 무엇이든 뜨겁게 만나고 뜨겁게 달려가는 사람. 함께 힘들었던 시기를 털어놓으며 저희의 관계는 훨씬 두터워졌지요.
열정이라는 말을 남발하고 싶지 않지만 그녀를 표현하기에 passion이라는 단어보다 적절한 것이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사진을 다시 들여다보니, 꽃잎은 정말 홀연하고도 아름답네요.
전부경님은 부산 동백섬에서 사진을 보내주셨습니다.
부산이 고향인 친구 김수연도 "부산에는 동백이 지천에 깔려 있어서 귀한 줄도 몰랐어."라고 했습니다.
저는 동백이 많은 제주, 부산에 사는 사람들이 늘 부럽습니다.
최슬기님은 제주 카멜리아힐에서 찍은 찬란한 동백 샤워씬을 사진으로 보내주셨습니다.
너무 아름다워 꼭 마지막 사진으로 삼고 싶었지요 :)
겨울은 정말 자취를 감추고, 두꺼운 외투도 어느새 장롱 속으로 들어가 버렸습니다.
과거의 동백은 이렇게 글과 사진으로 남기고, 미래의 동백을 기다립니다.
애니메이션 '시간을 달리는 소녀' 의 가슴 떨리는 그 언덕씬에서 치아키의 명대사를 빌려 글을 마무리해 볼까요.
이제부터는 당신이 만난 노란 꽃을 기다리겠습니다.
치아키:未来で待ってる。
미래에서 기다릴게.
마코토 : うん、すぐ行く。走って行く。
응, 바로 갈게. 달려서 갈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