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도, 창작은 처음입니다만] #7 낯선 곳에서 새로운 일 벌이기
“어디서 들었는데 말야. 인간을 바꾸는 데는 세 가지 방법 밖에 없대.”
몇 년 전이었나. 친구가 뜬금없이 말을 꺼냈다.
“세 가지 방법뿐이라고? 그게 뭔데?”
“공간을 바꾸는 것, 만나는 사람을 바꾸는 것, 시간을 바꾸는 것.”
“누가 한 말이야?”
“누구더라. 하루키였나.”
그게 누가 한 말인지는 중요하지 않았다. 머리를 댕! 하고 얻어맞은 것 같았으니까.
바로 저거였어!
내가 좀 더 창조적인 방식으로, 다른 사람이 되려면 저 방법들을 어떻게든 써야만 했다.
그리고, 이내 그 해답을 찾아냈다. 세 가지를 한꺼번에 얻을 수 있는 방법. 여행이었다.
(참고로, 저 말을 한 사람은 일본의 사상적 리더이자 경영학자인 오마에 겐이치이다. 한참 후에야 알아냈다.)
2011년에 혼자 처음으로 여행을 떠났다. 한달, 동유럽이었다.
되려 주변에서 걱정이 많았다.
“여진아, 동유럽 위험하지 않을까?”
“혼자 괜찮겠어?”
난 그런 건 겁나지 않았다. 내가 걱정하는 건 딱 하나. 혼자서 따분하면 어쩌지.
심심하지 않을 거리를 마련해야 했다.
나는 문구점으로 달려가 A5 사이즈의 수첩과 매직 펜 한 자루를 샀다. 그리고 다음날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수첩 표지에다 굵은 글씨로 썼다.
“Love project”
와, 그럴 듯하다. 러브 프로젝트. 내가 생각해도 제목이 정말 근사했다.
“당신이 생각하는 사랑이란 무엇인가요? 그대의 나라 언어로 써 주세요.”
여행자들을 만나면 자연스럽게 인사하면서 이걸 물을 생각이었다. 그럴 생각이었다. 정말 정말 그럴 생각이었는데…
입이 떨어지질 않았다.
여행자끼리 흔히 묻는 질문들이 있다.
“어느 나라에서 왔어?”
“몇 개국을 여행했어?”
“이 마을 둘러봤니? 뭐 좀 볼만한 게 있을까?”
“가까운 마트 어딨는지 알아?”
그런 질문은 얼마든지 좋았다.
이 질문은 어떤가.
“사랑이 뭐라고 생각하니?”
여행 하다 말고 웬 봉창 두드리는 소리. 내가 생각해도 뜬금없는 질문이었다.
도저히 아무나 붙잡고 물을 용기가 나지 않았다.
여행을 떠나온 지 일주일이 지나도록 내 수첩은 백지였다.
불가리아의 벨리코 투르노프라는 도시의 유스호스텔에 머물고 있었다. 그 날도 난 허탕이었다.
수첩을 들고 숙소 거실에 나왔지만, 혼자 눈치만 잔뜩 본다.
마침 미소가 아름다운 여성이 마루에 앉아 책을 보고 있었다.
‘에라, 모르겠다. 저 사람이라면 내 질문을 거절하진 않겠지.’
눈을 질끈 감고 물었다.
“저, 저기?”
“응, 무슨 일?”
“잠시 시간 좀 내 줄 수 있어?”
“물론이지. 뭔데?”
“저, 내가 작은 프로젝트를 하나 하고 있거든. Love project라고. 당신이 생각하는 사랑은 무엇인지, 당신 나라의 언어로 적어줄 수 있는가 해서 말야.”
그녀가 잠시 수첩을 만지작거리더니, 눈을 맞춘다.
“세상에!”
“왜……?”
“어떻게 이런 멋진 프로젝트를 생각해 낼 수가 있어?”
“혼자 여행하면 심심할까봐!”
“놀랍도록 아름다운 아이디어야. 근데, 수첩이 비었네. 내가 처음이야?”
“응. 맞아. 네가 처음이야. 적어줄 수 있어? 넌 어느 나라 사람이야?”
“이탈리아.”
“그럼, 꼭 이탈리아어로 써 줬음 좋겠다.”
“물론이지.”
이사벨라의 목소리는 포근한 이불같이 사뿐사뿐했다.
이렇게 아름다운 미소를 가진 여행자와 마음을 나누고 있다니.
그리고 내가 Love project 1페이지를 누군가에게 얻었다니, 야호!
심장은 두근두근, 뭔가 해냈다는 생각에 가슴이 벅차올랐다.
그때, 이사벨라가 누군가를 불렀다.
"아르체니! 여긴 한국에서 온 Jin (내 영어 이름) 이야. 잠시 좀 와 봐. 정말 멋진 프로젝트를 하고 있으니까."
키 큰 남자가 우리 쪽으로 다가왔다.
"내 남자친구 아르체니야. 러시아 사람인데 이탈리아 국적으로 귀화했어."
우주인 가가린 티셔츠를 입은 아르체니한테 내가 물었다.
"혹시, 너도 사랑이 뭔지 써 줄 수 있을까."
"물론이야. 근데..."
"근데...?"
"5분 정도 필요해. 이건 정말 중요한 질문이잖아. 담배 한 대 태워야겠어."
이사벨라와 나는 박수를 치며 박장대소를 했고, 아르체니는 정말 담배 한 모금 하러 밖으로 나갔다.
얼결에 또 2페이지가 채워버렸다!
난생 처음이었다. 여행을 가서 낯선 언어로 모르는 사람과 인생을 이야기하는 건. 비현실적으로 즐거웠다.
나는 자꾸만 페이지를 더 채우고 싶었다. 아니, 그 핑계로 더 많은 사람들을 만나고 싶었다.
나는 겁이 없었다. 숙소 예약 따위 미리 하지 않았다.
하루나 이틀 전, 마음 내키는대로 컴퓨터가 있는 곳에서 즉석으로 예약하는 게 다였다.
헝가리, 불가리아, 루마니아를 거쳐 어디로 갈 지 고민하고 있었을 때 헝가리에서 만난 한국인 친구에게 문자가 왔다. (그땐 스마트폰 쓰던 때가 아니었던지라 문자로 연락을 주고 받았다.)
"언니, 세르비아 올래?"
자기 워크 캠프에서 공짜로 재워주겠다고. 안 갈 이유가 없었다.
그리고 그 곳에서 러시아, 이탈리아, 스페인, 폴란드 할 것 없이 많은 나라에서 온 친구들을 만났다.
흐릿한 사진으로 남은 마테오. 이탈리아 사람이었다.
원래 직업은 뮤지션이라고 했다. 그는 워크 캠프 일이 끝나면 저녁마다 거실에서 재미삼아 기타를 쳤다.
그게 멋져서 나는 기둥 뒤에 숨어서 몰래 기타 치는 마테오를 훔쳐보곤 했다.
"Jin! 숨어서 보지 말고 이리 나와."
"헉!!!"
"언제까지 몰래 보려고?"
"마테오, 내가 몰래 보는 거 알고 있었던 거야?"
"처음부터 알았어 바보야. 신청곡 있어, 혹시?"
"신청곡?"
"좋아하는 뮤지션 있냐고. 내가 즉석에서 연주해 줄게."
"글쎄.... 나, Queen 좋아해!"
"Queen! 접수."
마테오는 Queen의 Crazy little thing called love를 연주해줬다.
너무 크지도 작지도 않게. 우리 둘만 들을 수 있을 정도로 경쾌하지만 아늑하게.
지금도 라디오에서 이 곡을 들으면 자동으로 마테오가 떠 오른다.
내가 이탈리아에 가거나 마테오가 한국에 오면 기타랑 우쿨렐레로 콜라보 하자던 약속은 아직 유효한 걸까.
아주 이상하고 기묘한 일.
알지 못하는 나라에서 낯선 언어를 귓가에 흘려들으면서 처음 보는 사람과 인생을 나누는 일.
오로지 홀로 여행을 가서야만 곤두서는 안테나로 더듬어 보는 새로운 감각들.
그렇게 30일 동안 마음 껏 낯선 나라에서 헤매고, 새로운 사람들을 만나고 싶어 맘껏 두리번 거렸다.
그땐 몰랐다.
그때 마주친 여행자들과의 모든 순간이 바로 나만 쓸 수 있는 소설이었다는 걸.
이제 Love project 수첩은 4권째다. 120명이 넘는 사람을 만났고, 25개가 넘는 언어를 모았다.
당연하게도 Love project는 아직 완결되지 않았다. 다행스럽고 설레는 일이다.
ps. 그 안의 이야기들이 혼자 알기 아까워 2탄을 기약한다.
(To be continu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