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76] 2. 첫 날
2021학년도의 시작은, 작년과 달랐습니다.
작년 3월 2일을 생각해 보자면, 그 전주의 갑작스런 휴교로 인하여 텅 빈 교실과 함께 기약없이 새학기의 시작을 기다릴 수 밖에 없었습니다. 고작해야 3월 2일을 한 해 걸렀을 뿐인데, 올해의 3월 2일이 이렇게 새롭고 생경할 수가 없습니다.
저희 학교 6학년 어린이들은 오전 9시까지 등교하였습니다. 2학년 어린이들은 9시부터 11시까지, 3학년 어린이들은 9시 20분부터 11시 20분까지, 6학년 어린이들은 9시부터 11시 40분까지, 각각 3시간과 4시간 동안 교실에서 배우고 돌아갔습니다. 이 에피소드도 좀 웃픕니다. 원래는 2, 3, 6학년이 동일하게 9시부터 11시까지 3시간 동안 교실에서 배우는 것이었는데, 학교 식당에 인원 전체가 한 번에 들어갈 수 없다보니 등교 시간도, 배움 시간도 제각기 운영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4, 5학년 어린이들은 11시부터 13시까지. 그렇게 첫 날의 등교는 제각기 시간을 나누어 이루어지게 되었습니다.
그러다보니 6학년 어린이들은 2시간 40분을 쉬는 시간도 없이 꼬박 앉아 있다가 갔습니다. 아동학대가 아닐까 싶기도 하지만, 대신 옆반 선생님들과는 세 시간 같은 네 시간을 운영하자, 자유롭게 화장실도 다녀오게 하고 천천히 쉬엄쉬엄 첫 날을 보내자, 이야기 나누었습니다.
저희 교실의 3월 2일은 다른 학급과는 많이 다른 모양새를 가지는 듯 합니다. 매년 1학기가 지나갈 무렵, 어린이 중 제게 와서 다음과 같이 말하는 친구가 꼭 하나씩은 있습니다.
- 새학기 첫 날 선생님 혼자 몇 시간이나 말씀하신 것은 올해가 처음이었어요.
- 그래서, 별로였어?
- 아뇨, 재미있었어요
한 번은 이렇게 말하는 어린이에게 물은 적이 있습니다.
- 그럼 다른 때는 첫 날 뭘 했었는데?
- 뭐 자기 소개도 하고 이름표도 만들고 학급 약속도 정하고 그러면 하루가 다 가요.
교사 연수 같은 곳에서도 자기 소개를 할 때가 있습니다. 놀라운 경험 중 하나는, 보통 처음 소개하는 분의 카테고리가 다음 분들에게 이어진다는 점입니다. 처음 하는 분이 이름, 나이, 근무지, 참여 동기를 말하면, 다음 분들도 그 카테고리를 그대로 가지고 갑니다. 어린이들이야말로 더 할 것입니다. 언젠가 저도 발령 초기에 둘째날인가 자기 소개를 시켜본 적이 있었던 기억이 납니다. 첫 어린이가 소개한 그 카테고리 그대로 마지막 어린이까지 이어지는 것을 보았습니다.
교사가 소개할 카테고리를 제공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러나 저는 조금 더 '자연스러운 만남'으로 서로가 서로를 알아가면 좋겠다는 생각을 갖고 있습니다. 아마도 저는, 다른 분들과는 조금 다른 생각을 가진지도 모르겠습니다. 다른 분들이 제공하는 것에 대해 저는 자유로움이 필요하다 생각하고, 거꾸로 다른 분들이 자유롭게 두고자 하는 것에 저는 울타리를 치고 있는 모습이 있음을 깨닫곤 합니다
조금 더 나아가, 교사 연수 나 모임 같은 곳에 가면, 멤버간 유대감을 개시한다는 이유로 꼭 뭔가 활동을 하곤 합니다. 보통 아이스 브레이킹이라는 이름을 붙이는데, 저는 이런 활동을 좋아하지 않습니다. 낮가림이 심한 편이기 때문입니다. 대부분 처음 보는 분들인데, 그리고 어쩌면 다시 보지 않을 수도 있는 분들인데, 굳이 이 자리에서 뭘 깨겠다고 이런 것들을 해야하는가 싶은 생각을 갖는 것이죠. 조금 다른 이야기이지만, 1박하며 일하는 자리가 있어 갔다가 일을 마친 후, 같은 방을 쓰는 선생님과 맥주 한 잔 마시게 되었습니다. 보통은 학교 이야기나 업무 이야기를 하면서 이야기를 끌고가다 적절히 마무리하는데, 이 때의 선생님은 통성명 후 바로 나이를 묻더니, 서로 같은 나이인 것을 확인하고는 '야, 우리 그럼 친구네, 서로 말 편하게 하자.'면서 쑥 들어오셨더랬습니다. 교사로 10년차를 시작하고 있지만, 저는 어떤 선생님께도 말을 놓지 못합니다. 아무리 경력이 짧고 저보다 나이가 어린 선생님이라도, 동학년을 2년씩, 3년씩 같이 하더라도, 저는 말을 놓지 못하고 존대하는 성향을 갖고 있습니다. 그 밤의 경험이 얼마나 난감하고 불편했는지, 저희 와이프에게만 말했습니다.
저는 서로 자연스레 알아갈 기회를 따라, 서로에 대해 조금씩 맞춰가는 것을 편하게 생각합니다. 과연 어린이들 중에서 저와 같은 성향이 있지 않을까. 그 어린이들에게 첫 날부터 서로를 드러내는 경험은 과연 긍정적일까 하는 의문도 듭니다. 아니나다를까, 저희 옆 반에서는 한 어린이가 자신에 대해 써 보도록 제공된 소개지에, '발표 시키지 마세요', '묻지 마세요', '오늘처럼 쭈욱 그냥 놔 둬 주세요'라고 썼다고 합니다. 물론, 어느 순간에는 시켜야 할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그게 굳이 첫 날일 필요는 없습니다. 시간의 여유를 가지고, 천천히 서로에 대해 알아갈 필요도 있습니다. 그렇게 생각하면 일반의 공동체들이 이상하게도 느리게 관계 맺어가는 이들에 대한 배려 없는 모습을 종종 보게 됩니다.
그래서, 160분에 걸친 시간동안 저희 교실은 담임 교사가 내내 혼자 떠들었습니다. 그렇다고 어린이들에게 '우리 학급에서 지켜야 할 규칙 목록'을 늘어 놓은 것은 아닙니다. 어찌보면, 우리 교실의 모토와 우리 교실이 지향하는 바에 대해 담임 교사가 프레젠테이션 하고 어린이들은 추인하는 모양새로 흘러갑니다. 그 와중에서 선생님은 그 동안의 교실 살이와 육아 살이에서 나오는 다양한 경험들을 이야기해주며 어린이들의 호감(!)을 쌓아갑니다. 그렇다보니 어린이들은 담임 교사의 이런 이야기들에 즐거움을 드러내기도 합니다.
어린이들에게 이렇게 이야기해 주었습니다. 개학 첫 날 서로 자기소개 안해도, 우리 천천히 조금씩 알아가고 친해져가면 돼. 선생님은 졸업하는 그 날까지 우리 교실의 모두가 함께 친해져 갈 수 있도록 노력할거야.
대부분은 준비한 것들을 이야기하는 편입니다.
교실의 모토로는 '너, 나, 우리'를 제안합니다. 교실 생활의 울타리로 '배려'와 '존중', '예의'를 제안합니다. 배움을 완성하지 않아도 좋지만, 자신의 배움에 대한 '성실함'과 '책임감'을 당부합니다. 이를 위한 '독서감상글'과 '내 이야기 쓰기', '배움일지'를 안내합니다.
교실에서 꼭 지켜야 할 규칙으로는, 뛰지 않기, 높은 곳에 올라가지 않기, 싸우지 않기, 욕하지 않기를 말해줍니다. 이는 제안이 아니라고 말합니다. 어린이들의 동의가 없더라도 선생님이 이에 대해서는 어린이들이 꼭 실천하도록 하겠다고 말합니다.
올해는 온라인 등교에 대한 설명도 준비하였습니다. 온라인 등교 플랫폼으로 위두랑을 활용하며 실시간 쌍방향 원격 수업 툴로 e학습터 화상수업 툴을 활용한다고 안내하였습니다. 프로젝트 활동을 위하여 구글 클래스룸을 활용할 것과 패들렛(또는 위두랑팝)으로 배울 것이라는 안내도 잊지 않았습니다.
혹시 올해는 학술지를 준비하게 될 수도 있다는 언급도 했습니다. 이에 대한 이야기는 이후에 두드릴 기회가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이런 이야기를 하느라고 네 시간이 훌쩍 가곤 합니다. 아마도, 중간중간 준비하지 않은 말들이 불쑥불쑥 튀어나오지만 않으면 이렇게 길게 말할 것들은 아니긴 합니다. 그 중에서, 올해의 어린이들에게 가 닿은 말이 하나 있었습니다. 작년에 정말 많은 것을 준비했는데 제대로 된 하나를 해 보지 못한 아쉬움을 말하면서, '올해도 정말 많은 것을 준비했으니 재미나게 해 볼거야'라는 말이었습니다. '재미나다고 해서 수업 시간에 논다는게 아니라, 너희가 배우는 과목이 가진 재미를 발견하고 느끼도록 선생님이 더 많이 준비해서 배울 수 있도록 해 줄거야'라는 말이었습니다.
배움의 재미. 온라인 상에 떠도는 많은 교실 활동 중에, 재미 쪽에 쏠려 있으면서 배움은 없는 것들을 접할 때가 있습니다. 저는 어린이들에게 약속했습니다. 글을 읽고, 수학의 원리와 방법을 배우고, 사회 현상을 배우고, 체육과 그림과 실과를 배우는데, 그런 것들 속에 담겨 있는 재미를 느낄 수 있는 배움을 준비하여 함께 하겠다고. 이렇게 말해놓고 나니, 정말 더 많이 준비하여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제게 주어진 850시간 중에, 한 시간도 허투루 보내지 않고 배움 속에서의 즐거움과 기쁨을 우리 교실의 어린이들이 누릴 수 있게 해 주기 위해서 노력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학생 하나가 아래와 같이 첫 날의 느낌을 말해 주었습니다.
이 어린이를 위해서라도, 더 많이 준비하겠습니다.
개학 첫 날 마지막 행사(!)로, 앞으로 1년 동안의 기대, 다짐, 마음가짐을 써보도록 하였습니다. 졸업할 때, 이 종이를 돌려주며, 선생님의 메시지를 담아 어린이들에게 축하의 메시지로 전달하곤 합니다.
어린이들에게 기대, 다짐, 마음가짐을 쓰라고 하면, 기대는... 다짐은... 마음가짐은... 하고 쓰곤 합니다. 아직까지 글로 자신의 생각을 표현할 준비가 제대로 되어있지 않은 덕이라고 봐야겠지요. 자신의 생각을 개조식으로 담는 것이 아닌, 총체적으로 표현하는 것에 대한 배움을 준비할 필요가 있어 보입니다.
이와는 별도로, 6학년을 맞이하는 어린이들의 의젓한 모습을 볼 수 있어서 즐거웠던 시간이었습니다.
우리 교실의 첫 네 시간은 이렇게, 교실과 공동체와 배움과 가치에 대한 교사의 생각을 어린이들에게 추인받는 시간으로 흘러 갔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