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별한 교사] 5. 특별한 자기 선택
중학교 2학년 1학기 기말고사 제 영어 점수는 62점이었습니다. 반 석차는 56명 중 8등이었는데, 그래도 등수는 상위권에 들어가는 편이었는데, 영어 점수가 너무 낮았습니다. 주로 3점짜리 객관식 문항, 주관식이라고 해봐야 같은 배점으로 단어 하나 쓰는 정도의 단답형 문항이던 당시, 영어 시험 평균 점수는 85점을 조금 상회하는 정도였습니다. 정규분포를 배우지 않았더라도 저는 대강 알 수 있었습니다. 이 정도 영어 점수라면 나의 영어 실력은 우리 반에서 최하위권이다.
영어를 조금 더 올리면 석차가 올라갈 것이라는 생각보다는, 내 석차에 영어 점수가 이 정도라면 쪽팔리는 점수다, 라는 생각이 앞섰던 듯 합니다. 중학교 2학년 남학생은 포지티브한 결정이 아닌, 네거티브한 판단으로 엄마에게 말했습니다. 엄마, 나 영어 학원을 다녀야 할 것 같아. 엄마는 눈을 동그랗게 뜨며 반문하였습니다. 그렇게 학원 한 번 다녀보라고 해도 싫다고 하던 애가, 웬일이니?
1989년 7월 25일, 화무십일홍이라며 조금씩 그 야만성이 시들어지던 당시였지만, 서슬 퍼렇던 군사정권이 만든 과외금지법이 아직 문서 상으로나마 그 존재감을 드러내던 시기에, 저는 동네 속셈학원의 중등부 영어 수업에 참여하기 시작했습니다. 과목 당 3만 5천원, 주 3회 한 시간 반 씩 수업하던 그 학원은 마침, 여름방학 특집으로 문법특강을 시작하였고, 저는 그 첫 수업에서 생소한 표현을 마주하였습니다.
S + V
원래 질문을 잘 하지 않는, 약간 눈치보는 편인 저는, 그래도 묻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선생님, 에스 브이가 뭐에요?’ 그 때, 쟤는 뭐지? 하는 표정으로 제일 뒤편에 앉은 저를 뒤돌아보던 아이들의 표정을 잊을 수없습니다. 그것도 모르는, 어처구니 없을 만큼 뒤떨어진 아이가 우리 학원에 왔구먼, 이라는 눈동자들. 저는 그 날, 처음으로 영어에 어순이 있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1991년 8월 27일, 학교 옆 한 달 7만원짜리 독서실에 등록하게 된 까닭은, 방학을 마치고 학교에 등교한 저에게 건넨 담임 선생님의 한 마디 때문이었습니다. ‘반장, 방학 동안에 공부 열심히 했나?’
방학을 돌아본 저는, 친구 따라 한 달에 40만원짜리 영어 수학 학원을 등록했지만, 학원을 다니는 둥 마는 둥 하며 시간을 보냈던 지난 방학 때가 생각났습니다. 학원에 왔다갔다 하는 것 말고는 공부 책은 전혀 들여다보지 않았던 시간들. 이상하게도 담임 선생님의 그 말씀이 너무나도 켕겼고, 1994년 1월 5일, 본고사 시험 전날까지 - 중간에 친구 따라 다른 독서실에 다녔던 두 달 정도를 제외하고는 - 한 번도 쉬지 않은 독서실 생활을 그렇게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학교에서는 4시 20분에 7교시가 끝나면 잠시 쉬었다가 5시 반부터 야간 자율학습을 하였습니다. 10시에 야간 자율학습이 끝나면 바로 독서실로 가서 새벽 한 시까지 공부를 더 하다가 집에 들어가는 생활을 성실하게 하였고, 9월 실력고사, 10월 중간고사에 꽤 좋은 성적을 거두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계속 영어가 발목을 조이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고등학교 와서 처음 치루었던 사설 모의고사 당시 받았던 충격이 어마어마 하였습니다. 중학교 때는 교과서에서 시험이 나왔는데, 첫 사설 모의고사에서는 교과서 외 지문만으로 100% 구성되어 완전 패닉상태에 빠졌던 기억이 납니다. 그렇게 받은 점수 53점에, 그렇게 받은 등수 51명 중 영어 12등의 점수가 더 충격적이었습니다. 아, 나도 어려운데, 다른 친구들도 어렵겠구나.
그렇게 저렇게 1학기를 마친 후, 2학기 때 전반적인 성적이 꽤 높은 수준으로 올라가고 나니까, 고입 당시 느꼈던 그 묘했던 난감함이 머릿속을 맴돌았습니다. 그러면서 고민을 하게 되었습니다. 학교 시험과 학력고사 - 저는 수능 1세대이지만, 당시에는 학력고사를 볼 것으로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 를 둘 다 잡기 위해서, 어떻게 영어 공부를 해야 할 것인가. 그 때 들었던 생각은, 사설 모의고사 문항이 대부분 긴 문장을 읽고 내용을 빠르게 파악할 때 풀이에 유리하다는 것이었습니다. 문법은 독해를 통해 주로 등장하는 사항을 파악하는 것으로 정리하고, 어휘는 독해 속에 나오는 것을 중심으로 활용 예시를 염두에 두며 외워가는 방식으로 정리하기로 하였습니다. 11월의 어느 날, 가까운 곳의 중형 서점에 가서 독해집을 찾아보는데, 당시에는 리더스 뱅크가 거의 유일한 것이었고, 막 리딩 튜터가 새로 나온 것이었던 듯 했습니다. 리더스 뱅크는 글씨가 너무 작고 보기 싫어 제치고, 활자가 시원시원하고 독해 길이가 짧은 리딩 튜터를 사서 독서실에서 혼자 공부하기 시작했습니다. 문제 풀이하고, 단어 찾아가며 완벽하게 독해해보고, 단어 없이 독해하고, 쉽지 않은 단어 다시 확인하는 식으로 하루에 독해 지문을 세 개 씩 보아 왔는데, 처음에는 세 개에 두 시간씩 걸리던 것이, 1권을 마무리하는 시점에서는 세 개에 30분 정도의 시간 만으로도 충분하였습니다. 내친 김에 12월에는 2권, 1월에는 고 3 수준이라던 3권까지 사서 공부하였던 기억도 납니다.
1993년 10월의 어느 날, 8월의 1차 수능을 망친 저는 깊은 고민 가운데 있던 중이었습니다. 모의고사 점수가 저보다 낮았던 친구들은 모두 수능 점수가 잘 나왔는데, 저는 모의고사 점수와 별반 다르지 않은 점수가 나온 것입니다. 내심 수능을 잘 봐서 9월부터는 본고사 준비에 집중하려던 생각은 깨어지고, 11월의 2차 수능 대비를 하지 않을 수 없는 상황이 되어 버렸습니다. 결국 본고사를 위해 국/영/수/독일어를 함께 준비하던 것에서, 독일어를 포기하고 국/영/수만 준비할 수 밖에 없게 되었습니다. 그런 와중에서도 아무래도 신경 쓰이는 과목은 영어였습니다. 마치 트라우마처럼, 영어는 계속 대입 과정에서 제 신경을 긁는 존재였습니다. 급기야는, 단 한 달이라도 학원엘 다녀야겠다는 생각을 하고는, 아는 지인들을 통해 지역에서 한참 뜨는 학원을 찾아가게 되었습니다.
이미 그 학원도 고3 반은 운영하지 않고 있었습니다. 고2 반으로 안내되었고, 그 곳에서도 이미 수능을 앞둔 학생들의 수능 대비 강의가 이루어지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두 시간 동안의 강의를 마친 후 든 생각은, 굳이 학원차 타고 여기까지 왔다갔다하면서 수업을 들을 일이 없다, 는 것이었습니다. 집에서도 스스로 하던 방식과 별반 차이가 없는 방식으로 학원 강의는 이루어졌고, 그 내용도 아주 새롭거나 깊이 있는 것이 아니라 느껴졌던 터라, 여타의 교재를 크로스체크하며 스스로 보면서 할 수 있는 정도의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엄마에게 ‘굳이 학원 다닐 필요는 없을 것 같아’라고 말씀드렸습니다.
가세가 한참 기울어가던 시절, 돈 때문에 너무 힘들어하면서도, 아들이 부족한 과목 때문에 한 달이라도 학원에 다닐까 한다고 했을 때, 한 달 학원비 30만원 정도는 해 줄 수 있다던 엄마는, ‘왜, 학원비가 너무 비싸서 그런거야? 그 정도는 엄마가 해 줄 수 있어. 그러니까 돈 신경쓰지 말고 학원에 다녀’라며 안타까와하셨고, 엄마에게 ‘정말 필요가 없어서 그래. 안 다녀도 이 정도는 나 혼자 독서실에서도 충분히 할 수 있어’라며 엄마가 제 말을 이해 못해주는 것이 조금 의아하던 기억도 납니다.
그렇게 수능을 치루고 본고사까지 혼자 준비하며 독서실에서 열 두 시간씩은 영어를 들여다보았던 기억이 납니다. 본고사 시험 전날, 자정에 영어책을 덮고 독서실을 나서며 느꼈던 기분은 이 정도 했으면 애썼다, 는 자기 만족감이었으며, 다음 날 서관 B110 수험장에서 영어 시험지를 마주하며 느꼈던 감정은, 왜 이렇게 쉽게 읽히지? 라는, 오히려 다른 의미의 불안감이었습니다.
생각해보면, 제 인생의 중요한 결정을 저는 제 스스로 할 수 있는 기회를 많이 얻었더랬습니다. 부모님은 제 삶에 실시간으로 관여하거나 개입하실 만큼의 여유가 없으셨고, 어쩔 수 없이 저는 하나하나 고민하고 생각해가면서 제 삶의 중요한 결정들을 해 왔습니다.
고작 한 세대가 지났을 뿐인데, 요즘 부모님들은 잘 그러시지 않습니다. 아무리 바쁘고 삶에 쫓겨도 자녀의 삶에 함께 하는 것을 당연하게 생각합니다. 저희 아이들을 여기저기 데리고 다니면서, 저 말고도 많은 부모님이 수시로 자녀들과 시간을 보내기 위해 애쓰는 모습을 보면, 항상 자신의 삶에 바쁘셨던 부모님의 모습이 오버랩되곤 합니다.
그러나 한 편으로, 저는 부모님이 너무나도 바쁘셨던 것에 안도하곤 할 때가 있습니다. 덕택에, 수많은 결정을 앞두고 스스로 고민할 수 있었고, 내린 결정에 대해 생각해 볼 수 있는 시간을 가졌기 때문입니다. 아마도, 제가 어리던 그 시절에, 부모님께서 제 삶을 가깝게 지켜보셨다면, 그냥 놔두지 않고 개입하시고 명령하시고 간섭하셨겠지요. 지금 이 시기, 부모와 자녀의 삶이 이렇게 밀접하고 가까운 시기에도 변함없이, 많은 부모는 자신의 주관적이며 일회적이고 특별한 경험을 토대로 경험없는 자녀를 앞에 두고, ‘아빠가 경험해보니’로 시작하는 거부할 수 없는 조언과 충고를 휘두르니 말입니다.
교사도 그렇더군요. 그런 이야기를 종종 들었습니다. 그래도 초중고등학교 때 반듯하게 살아온 사람들이 주로 교사를 선택하다보니, 초중고등학교 시절에 반듯함과 거리있는 학생들의 마음을 잘 이해하지 못한다는. 물론, 그렇다고 반듯함과는 거리가 멀었던 교사들이 이런 학생들을 잘 이해한다는 말은 또한 아닐 것입니다. 우리 반 학생들에게 주어야 할 교사로서의 영향에 대한 고민없이, 자신의 경험에 기인한 독특하고 주관적이며 일회적인 무언가를 말하고 시키는 경우도 많다는 말을 하고 싶습니다.
사회는 또 어떻습니까. 교사는 다 쓰레기에요, 로 시작하는 쓰레드를 읽어보면, 자신이 다니던 학창시절, 그 때의 교사와, 그 때의 교실과, 그 때의 분위기로 현재의 학교를 바라보는 시선을 만날 수 있습니다. 그런 시선들이 얼마나 많은지... 그런 분들에게 '지금의 학교는 다릅니다'라고 말씀드리면 이해하실 수 있을까요? 자신의 특수하고 주관적이며 일회적인 모든 경험으로 판단을 내려버린 분들에게는 어떤 설명과 설득도 의미없을 듯 합니다.
그렇다고 그냥 두는 것은 또 방치나 다름 없습니다. '저희는 아이들에게 모든 걸 맡겨요'라고 말하는 부모 중에 자녀를 방치하는 경우도 많습니다. 방치는, 자녀의 걸어가는 길과는 전혀 다른 편 - 보통 부모 사느라 바쁜 그 방향 - 을 바라보는 것입니다. 항상 자녀 곁에 있지만, 자녀는 자녀대로, 부모는 부모대로 시간을 보내면 그게 바로 방치입니다.
교실에서도 그런 일들이 벌어집니다. 아이들이 활동하면 너무 좋아한다며 사례를 말씀하시는 경우 중에, 가만히 보면 어떻게 활동할지 알려주고 활동하도록 두는 것으로 끝인 활동도 있습니다. 저도 아직까지 종종 그러는 편이라 항상 경계하며 조심하지만, 특히 초등학교 교실에서의 활동은 활동하는 시간동안 교사의 피드백이 학생의 활동에 끊임없이 개입할 수 있는 - 실제로 개입하지 않더라도, 믿고 두더라도 - 세밀한 코스웤으로 구성될 필요가 있습니다. 그게 아니라면, 수업 시작한지 5분 이후에는 교사가 없어도 이루어지는 활동이라면, 그건 방치에 가깝다 할 수 있지 않을까 싶습니다.
선택의 기회가 많아 보이지만, 그것이 다만 착시현상에 불과한 교실이라면, 우리 어린이들은 무언가의 문제를 위해 고민하고 생각할 기회를 갖기 어려울 것입니다.
교사에 의해 일사불란하게 운영되는 학급의 모습은 아름다울지 모르겠지만, 어린이들이 얻는 경험은 그저 무엇을 했다, 는 결과의 기억에 머물 뿐일 것입니다.
학생들에게 정답을 알려주고, 지름길을 보여주어, 대단해 보이고 인정받는 교사는 학생들의 자랑이 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학생들이 스스로 생각하고 고민하여 결정하게 해 주는 교사, 모든 것을 꿰뚫고 있지만 슬쩍 주도권을 학생에게 넘겨주는 교사라면 덜 인정 받더라도, 학생들을 성장시키는 교사가 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제 많은 스스로의 선택 가운데, 제 선택에 울타리가 되어주시는 어른이 계셨다면 조금 더 나은 선택을 하지 않았을까 싶은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아에드 인 마이오렘 델 글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