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 아이는 배제된 결정 - 너무 빠른 바깥살이
아이는 배제된 결정 - 너무 빠른 바깥살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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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공부에는 왕도가 없다
2. 학부모의 공포심
과대대표되고 포장된 성공사례를 보면서 그 사례가 내 아이의 사례가 되길 바라지만, 그러지 못하는 - 그럴 수 없는 - 현실 앞에서 그저 내 아이만을 탓할 뿐인 학부모님들을 종종 봅니다. 그러나 그것을 학부모의 탓으로만 돌릴 수는 없습니다. 그저 어떻게 펼쳐져갈지 모를 내 아이의 미래, 그것을 앞에 둔 부모의 책임감이 공포가 되어 잘못된 선택으로 이끄는 것입니다.
3. 학원의 방식
4. 학원의 눈속임
5. 언제부터 학원인가
그래서 보내는 학원. 그러나 학원의 방식은 천편일률적일 뿐 아니라 과도하기까지 합니다. 그걸 다 버티는 아이들은 무조건 성공할 수 밖에 없어 보일만큼 무지막지한. 그럼에도 (소위) 실패하는 아이들이 어마어마합니다. 그 수고가 무색할만큼. 일대일과외마저도 한결 같습니다. 과외 강사가 아이에게 맞추는 것이 아닌, 아이가 과외 강사에게 맞추는. 일제식 교육이라고 (과도하게) 비난받는 학교 교육이 무색할 정도로 더더욱 일제식인.
선제적으로 학원을 투입하든, 부족함을 메우기 위해 학원을 투입하는 것이든, 본질은 내 아이를 이해한 후에 이루어져야 합니다. 혹은 아이를 이해시킬 만큼의 시간을 함께 보낸 후에 이루어져야 합니다.
너무 이른 나이에 학원(혹은 과외)을 시작하는 아이들은 셋 중 하나로 보입니다.
1. 남들 다 하는데 우리 아이도 하지 않으면 뒤쳐질 듯 해서
제일 흔하게 보이는 학부모의 선택은, 우리 아이가 뒤쳐지지 않는 아이가 되었으면 하는 바램을 투사한 것입니다.
저희 둘째 아이 동료(?) 이야기를 두드려볼까 합니다. 와이프가 둘째를 데리러 어린이집에 갔을 때 본 이야기라고 하니 한 7~8년은 지난 이야기이며, 어린이집 이야기이니까 미취학 아동의 이야기, 정확하게는 어린이집 5세반 시절의 이야기입니다.
와이프가 벨을 누르고 하원 요청을 한 후 어린이집 앞에서 기다리고 있는데, 마침 먼저 기다리던 엄마의 아이가 나왔다고 합니다. 저희 둘째 아이 담임 선생님 손에 잡힌 아이이니, 저희 둘째 아이와 같은 클래스의 아이였겠지요. 그런데, 한사코 엄마를 따라가기 싫어하면서, 어린이집 선생님 손을 잡고는 놓질 못하더랍니다. 급기야는 집에 가기 싫다며 우는 일이.
엄마와 아이가 하는 이야기를 대강 들은 후, 어린이집 선생님에게 넌지시 물어보아 확인한 결과, 그 아이는 집에 가서 학습지를 하는 아이였습니다. 수학과 영어, 한자 학습지를 하는 것으로 와이프는 짐작하였는데... 다섯 살 학습지, 어떤가요. 이 아이는 다섯 살 때의 학습을 통해서 남들보다 한 발자국, 두 발자국 앞서갈 수 있게 되었을까요?
앞서가든 아니든, 아마 위 이야기를 보신 분들은 다들, 다섯 살은 너무하다, 생각하실 겁니다. 그럼 초등학교 5학년 정도 된 아이에게라면 저 정도의 투입이 적절할까요? 아니, 과연 어느 시점이 적절할까요?
그 적절한 시점에 대하여, 대부분의 학부모님들은 외부적 요인을 통해 결정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내 아이가 준비되었다는 판단을 통해서가 아니라.
보통은 먼저 달려가기 시작한 아이에게서 좋은 성과가 나타난다는 이야기를 전해 듣거나 직접 듣기 시작하면 부모의 마음도 안달복달합니다. 혹시... 우리 애는 너무 늦은거 아냐? 아니면 학교 교사의 이야기가 이유를 제공하기도 합니다. 학부모 상담에 가서 학교에서의 아이 모습에 대한 이야기를 담임 선생님으로부터 듣고 온 후, 아, 이제는 시켜야하나보다 생각하면서 마음이 급해지기 시작하기도 합니다. 또는 가끔 어떤 모임에를 갔는데, 우리 아이에 대해 잘 모르는 이가, 아직까지도 그렇게 두면 어떻게 해, 라고 말하는 것을 들으면 괜시리 지금 너무 느긋하게 구는 것은 아닌가싶은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혹은 학부모 자신의 경험을 통해서, 나는 이 때 쯤 시작해서 늦었다는 생각을 했던 기억이 있는데, 우리 애는 그것보다는 조금이라도 빨리 시켜야겠다, 생각한 것을 그대로 실천에 옮기기도 합니다.
이 모든 경우가 우리 아이의 상황에 따라 결정한 것이 아니라, 우리 아이와는 전혀 무관하게 외부적 요인에 의해서 우리 아이의 필요를 결정한 것입니다.
그랬는데 일이 잘 풀렸다. 그건 정말 천운이 따랐다고 보셔야 할 일입니다. 내가 우리 아이를 이렇게 저렇게 핸들링했더니 성공했다, 라는 성공경험을 여기저기 팔 일이 아니라는 말씀입니다. 이는 마치, 아프지도 않은 아이, 미리 대비한다고 약 먹이는 것과 똑같습니다. 대부분은 탈이 나게 마련입니다. 그런데 가만 살펴보면 왜 내 주변에는 그렇게 미리 약을 먹였는데 다 잘 풀린 아이 이야기 밖에는 없는가 싶기도 합니다.
이는, 잘 안 풀린 아이의 부모는 말이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 아이가 망했다, 고 어디가서 말하기 쉽지 않은 까닭입니다. 제가 고3, 재수 시절 2년을 가르쳤던 아이가 생각납니다. 목표도 없고, 동기나 의욕도 없는. 그 어머니께 조심스레 말씀드렸던 기억이 납니다. 아이 수학 과외는 더 시키실 필요가 없는 듯 하다고. 어머니께서 한숨을 깊게 쉬시면서, 침울한 목소리로 말씀하셨던 것이 기억납니다. 자기도 아는데... 마지막까지 이거라도 안 시키면 죄를 짓는 것 같아서 그만 둘 수가 없다고... 그런 학부모님들은 그저 자신의 아이가 가진 필요를 따르지 못하신 채 계속 자신의 선택대로, 하지만 그 선택이 계속 절벽으로 내몰리는 것같은 기분을 지우지 못한 채 그 선택을 이어가십니다. 어디 가서 하소연하기도 어려운, 자신의 선택.
그러니 잘 풀린 아이가 과대대표되고, 그 사례가 지속적으로 소비되면서, 여타의 학부모를 들쑤시게 되는 셈입니다. 그래서 지금 아이를 시키고 계신 많은 학부모님께서 관심두고 살펴야 할 지점은, 잘 안 풀린 사례여야 합니다. 그런 사례까지 종합적으로 염두에 두고 고민한다면, 지금 학부모의 선택은 조금 달라질 수도 있습니다.
2. 시키고 싶지 않은데, 부모가 돌봐 줄 수가 없어서
위와 같은 내용을 학부모님께 말씀드리면, 뒤따라오는 학부모님들의 하소연이 바로 이것입니다. 우리 아이도 좀 내버려두고 싶은데, 우리는 맞벌이라 누군가 아이를 돌볼 필요가 있고, 기왕이면 공부라도 한 글자 더 배울 수 있는 학원을 선택하게 된다는 말씀.
돌봄이 사교육의 주된 이유가 되는 것 또한 우리 학부모님들의 어려움이기도 합니다. 참 어쩔 수 없습니다. 아이들을 방치할 수는 없으니까요.
2014년도에 만났던 아이 하나가 기억납니다. 부모님이 장사하시다가 잘 안 된 탓에, 두 분이 저녁 늦은 시간까지 일할 수 밖에 없는 형편이 되어버렸죠. 그래서 부모님 들어오시는 시간까지 그 두 자매는 그저 집에서 방치되어 있었습니다. 저는 그 동생을 담임했었는데... 부모님 오실 때까지 뭐하니, 라고 했을 때 핸드폰... 이라고 했던 것을 잊을 수가 없습니다.
그래도 아이를 무언가 시킬 여유를 가진 집에서는 방과후의 아이에게 무언가를 시키면서 아이의 시간을 보호하고자 합니다. 그런데 그 때 학습을 위한 사교육이 아이들에게 약이 되는지는 모르겠습니다. 목적이 전도된 투입은 목적과 무관한 결과를 낳겠지요. 아니면, 돌봄이라는 핑계를 깔지만, 학부모 내면의 목소리는, 그러다가 공부에 취미를 붙이면 더 좋고, 라는 생각도 있으실 것입니다.
돌봄 목적으로 보내는 학습 사교육, 과연 효과가 있을까요? 효과를 보려면 저는, 아이러니하지만 학습적 요인보다는 비학습적 요인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관계망(래포)의 형성이 더 중요한 요인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초등학생의 학습은 학습 자체가 동기를 주는 경우는 거의 없습니다. 아이들을 생각해보면 됩니다. 아이들이 성취하는 이유는, 부모와 교사, 혹은 가까운 어른에게 자랑하기 위해서입니다. 어떤 초등학생이, 주어진 과제를 수행한 후 혼자만의 성취감에 뿌듯해하면서 내적 만족을 누리겠습니까. 아이의 성취감이 관계를 향하다가 내면을 지향하는 그 순간을 잘 포착하는 것이 중요하겠지만, 일단은 학습 사교육이라도 과도한 과제, 혹은 학습을 위한 학습이 이루어지는 학습 사교육이 아닌, 관계 지향적인 학습 사교육이 아이의 만족감과 동기에 더 나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초등 수준에서 그런 학습 사교육을 찾기가 쉽지 않죠. 그리고 중등까지 이어지기 쉽지 않기도 하구요.
저는 학부모님께 공부 아닌 돌봄을 권해드리곤 합니다. 특기활동이 차라리 낫다는 말씀을 드리곤 합니다. 제일 좋은 것은 놀 수 있는 방과후 활동이 아닐까 싶습니다. 초등학교 아이들의 놀이에 대한 강력한 욕구를 고려한다면, 조금이라도 더 놀 수 있는 시간을 만들어 주는 것이 훨씬 더 낫지 않나 싶은.
그러고보면, 사교육이 대부분 그저 노는 것은 영유아 수준에서 있을 뿐, 초등 수준에서는 참 찾아보기 힘든 것이 사실입니다. 어찌보면, 교육 현장에서 진짜 고민해야 할 일은 학습 효율이 아닌, 놀이에 대한 인식의 대전환인지도 모르겠습니다.
3. 아이가 원하거나, 혹은 부모가 봤을 때 재능이 있는 것처럼 보여서
과외 강사로 일할 때, 학부모에게서 많이 들었던 이야기가 '우리 아이는 머리는 좋은데 노력을 안해요' 같은 것이었습니다. 지능에 대해 공부하면서 위 이야기가 어떤 의미인지 조금 더 명확하게 알 수 있었습니다. 발달에는 개인차가 있다.
가드너의 다중지능이론은, 지능(머리)에도 아홉 가지 영역이 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 발달은 제각기 다른 양상으로 이루어지구요. 어떤 아이는 수리 지능이 다른 아이들보다 빠르게 발달할 수도 있습니다. 어떤 아이는 신체 지능이 남다를 수도 있습니다. 그런 모습을 보면서, 우리 아이는 '총체적으로' 남달라, 라고 판단하는 셈입니다.
그러나 발달의 귀결은 거의 평균적인 모습에 가깝습니다. 드물게 더 올라갈 수 있는 아이들이 있고 더 올라가는 아이들이 있지만, 그게 누구인지 알기 어렵습니다. 단편적인 모습을 보고 쉽게 판단할 뿐, 그 판단이 제대로 된 판단인지 알기 쉽지 않습니다.
그런 시점에서 혹시 모르니 아이를 시킨다. 보통 다른 경우에서는, 하지 않고 후회하는 것보다 하고 후회하는게 낫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교육에서는 하지 않고 후회하는 경우는 없습니다. 그 해야할 시기를 잘못 판단해서 하는 후회가 대부분일 뿐.
드물게 아이가 하고 싶어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학습에 관련된 경우, 저는 최대한 지연을 시키는 것이 낫다는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쉽게 하고 싶다 말하는 아이는, 쉽게 그만 하겠다 말하곤 합니다. 쉽게 시작했다가 쉽게 그만 두는 경험은, 학습 경험에서는 부정적인 영향을 미칠 뿐입니다. 다시 시작하는 것을 망설이게 만드니까요. 그만 두는 것은, 많은 경우 실패 경험이 될 뿐입니다. 실패 경험이 다음의 성공을 위한 발판이 될 것이라는 생각은, 어른들에게나 적절할 뿐입니다. 아이들은, 실패하면 손을 놓습니다. 그렇지 않은 아이들은... 글쎄요. 드물게 있겠지만, 일상적으로 만날 수 있는 아이들은 아닙니다. 저도 한 번 만나보고 싶네요. 그런 아이들.
예전에 영재 연수 갔을 때 들었던 사례가 생각납니다. 십 수 년을 영재 교육에 몰두한 교수님 이야기였는데, 정말 영재라고 생각되는 아이는 자기 교육 사상 한 명 밖에 만나질 못했다는 이야기. 초등 영재 교육 하는 일반 강사들은, 영재가 되길 바라는 (부모님에 의해 이끌려 온) 아이들이 모인 그냥 교육, 이라고 말하곤 합니다. 교대에서 운영하는 영재 학급은 조금 다르다고 말하긴 하는데... 저는 그 아이들이 영재라서 남다른 것인지, 어릴 때부터의 투입에 대해 잘 훈련받은 덕에 돋보이는 것인지 모호하다는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그걸 바라는 많은 학부모님들이 이른 때부터 아이들에게 투입하지만, 대부분은 언젠가는 될 것이라는 바램을 끌어쥐고 지금의 모습을 그저 버티는 경우일 것입니다.
무엇이 되었든, 진짜 문제는, 아이들에 대한 이 모든 선택이 - 아이 스스로가 원하는 경우를 제외한, 실은 아이 스스로 원하는 것 같은 경우에서 조차도 종종 - 아이들로부터 나오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아이들을 위해 필요한 것은 처방이 아니라, 아이들의 모습을 관찰하고 살피고 면밀하게 체크해가면서 갖추어야 할 내 아이에 대한 현상 인식입니다. 그리고 그것이 계속 누적되어 가면서 아이들과 부모가 함께 협의하고 상의하여 결정할 수 있는 기반이 되어 줄 것입니다.
그에 대한 구체적인 이야기를 다음에 두드려 볼까 합니다.
아에드 인 마이오렘 델 글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