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백워드 설계의 가치와 방향
교육과정의 교과 내 재구성이 교육과정 재구성의 꽃이라면, 교과 내 재구성을 원활하게 이루는 도구로 가장 많이 알려져 있는 것은 백워드 설계가 아닐까 합니다.
백워드 설계의 가치
백워드 설계가 가지는 가치를 명확하게 이해할 수 있는 사례는, [거꾸로 생각하는 교육과정 개발(G. Wiggins & J. McTighe, 강현석 외 번역, 학지사)에서 소개하고 있습니다.
매년 가을 2주 동안 모든 3학년 학생은 사과 단원(a unit on apples)을 공부하기 시작하였다. 그들은 단원과 관련된 다양한 활동에 참여한다. 국어(영어?)과에서 학생들은 Johnny Appleseed(미국 개척기에 사과 씨를 뿌리면서 성경을 가르쳤다는 인물)에 대해 읽고, 그 이야기를 묘사한 프리젠테이션 자료를 본다. 학생들은 사과를 포함하는 창의적인 이야기를 각자 지어 보고, 템페라 물감을 사용해서 이야기를 그림으로 그려본다. 미술과에서 학생들은 가까이 있는 사과나무에서 나뭇잎을 모으고, 3학년 교실 옆 복도 게시판에 걸려 있는 거대한 나뭇잎 찍기 콜라주를 만든다. 음악과에서는 학생들에게 사과에 대한 노래를 가르친다. 과학과에서는 학생들이 다른 형태의 사과 특성을 세밀해 관찰하고 기술하기 위해 그들의 감각을 사용한다. 수학과에서는 모든 3학년이 먹을 만큼 충분한 양의 사과 소스를 만들기 위해 비율에 따라 증가시키는 방법을 설명하도록 한다. (p18, 약간 변형)
위 사례는 실제의 사례는 아니고, 저자들이 있음직한 사례로 만들어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저희에게는 기시감이 있습니다. 실제 우리나라 교육 현장에서 이루어지는 많은 활동 중심 교육과정 재구성의 모습이 위와 같기 때문인지도 모르겠습니다.
물론 위와 같은 수업도 충분히 의미가 있을 것입니다. 단원이 끝난 후 복도 벽을 가득 메울 콜라주는 아마 학생들이나 교사들로 하여금 무언가 성취하였다는 뿌듯함을 느끼게 해 줄 것입니다. 단원이 끝난 후에도 아이들은 한동안 사과 노래를 함께 흥얼거릴테고, 수업 시간에 문득 교사가 '노래 한 번 같이 부를까?'라고 말하면 모든 학생들이 큰 소리로 씩씩하게 사과 노래를 부를 것입니다. 그리고 글도 썼고, 관찰도 하였고, 실생활 관련 연산도 해 낸 아이들을 보면서 교사는 할 몫을 했다고 생각하면서 안도할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런데 위 책의 저자들은 아래와 같은 질문을 던지면서 문제를 제기하고 있습니다.
교수의 목적이 무엇인가?
단원에서 개발되는 주요 아이디어와 중요한 기능은 무엇인가?
학생들은 학습목표가 무엇인지 이해하고 있는가?
단원에서의 학습 증거(예컨대, 콜라주, 창의적 작문 등)는 어느 정도까지 가치있는 내용 기준을 반영하는가?
어떤 이해가 여기에서 만들어지고 지속될 것인가? (p19)
분명히 위와 같은 교육과정 재구성 수업을 통하여 아이들도 즐거운 시간을 가졌을 것이고, 교사도 제 할 몫을 다 했다고 생각하며 만족감을 느낄 것입니다. 그러나 마음 한 쪽에 찾아오는, 꼭 삶은 계란에 존재하는 빈 공간처럼, 겉으로는 완전한 모양으로 보이지만 속은 무언가 꼭 필요할 것이 빠져있는 듯한 느낌. 아마도 그 이유는 이렇게 진행된 수업이 아이들에게 어떤 의미를 가지는가에 대한 교사만이 가질 수 있는 의문 탓일 것입니다. 이 단원의 수업은 일회적입니까, 아니면 아동이 앞으로의 삶에서 끊임없이 되새겨 낼 수 있는 무언가를 얻는 수업입니까. 물론 아이들은 추억을 얻었습니다. 그러나 이런 추억은 수업이 아니라도 언제든지 만들어 가질 수 있습니다. 학교에서 이루어지는 수업은 이와는 달라야 한다고 교사는 내심 생각하고 있을 것입니다. 애쓰고 힘내고 아이디어를 모아서 다양한 활동 중심의 수업을 했지만 아마 교사는 이것만으로는 무언가 결여되어 있다는 생각을 하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교사의 전문성이 개입된 수업은, 이런 수업보다는 한 발자국 정도 더 나아갔으면 좋겠다고 생각하기 때문일 것입니다.
위 책에서는 다른 사례도 소개하고 있습니다.
'이해'에 관한 워크숍 중, 노련한 고등학교 영어 교사가 자신의 고등학생 시절 경험에 대해 다음과 같은 반성을 학습일지에 기록하였다.
나의 머리는 한쪽 귀로 들어와서는 (시험을 친 후에는) 다른 쪽 귀로 나가버리는 자료의 정거장이라는 느낌이 들었다. 매우 쉽게 기억을 잘 할 수 있었던 나는 졸업생 대표가 되었다. 그러나 점수에 대해 별로 걱정하지 않는 일부 다른 학생들보다 내 자신이 어떤 내용은 훨씬 덜 이해하고 있다는 것이 곤혹스럽고 당황스러웠다. (p18)
위 사례에 대하여 저자들은 '회상 recall'만으로도 충분히 좋은 성취 수준을 드러낼 수 있는 '평가'에 문제가 있는 것이라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이해의 여부를 묻지 못하고, 그저 잘 기억하고 있는가를 묻는 평가.
사실 저도, 중학교 시절과 고등학교 시절에 교실에서 배운 강의식 수업, 그리고 독서실에서 줄곧 풀었던 문제집의 지식들을 잘 기억하고 회상해 낸 결과로 소위 '일류대학'을 진학할 수 있었습니다. 이 때 기억했던 지식들을 아직도 회상할 수 있어서 때론 유용하게 활용하고 있습니다. 덕택에 한 때는, '고등학교는 주입식 교육이지'라고 주장하기도 했었습니다.
그러나 교사가 되어보니, 누군가는 지적 성취를 드러내지만 다른 누군가는 지루하고 따분하여 집중할 수 없는 수업이 이루어지고 있는 상황이라면, 교사는 모두가 지적 성취를 높이면서도 즐겁고 재미있게 참여할 수 있는 수업을 설계해야 할 의무를 가진다는 생각을 해 보게 되었습니다. 적어도 제 교실에서는 누구도 소외되거나 참여할 수 없는 상황이 만들어지지 않도록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는 생각을 점차로 가지게 되었습니다.
백워드 설계는 교사로 하여금 학생이 앞으로의 삶에서 끊임없이 되새겨 낼 수 있는 무언가를 얻는 수업을 설계하고, 이러한 수업을 통해 학생이 도달한 이해의 여부를 확인하는 평가를 설계하는 것을 돕기 위하여 Wiggins 와 McTighe에 의해 제안된 교수-학습 과정과 평가의 설계틀입니다. 이를 통하여 교사는 아동의 삶에 지속적으로 영향을 미치며, 아동이 재미나게 집중하여 참여할 수 있고, 지적 성취도 높일 수 있는 수업을 준비하여 실행할 수 있게 될 것이라고 저자들은 기대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백워드 설계는 브루너나 블룸, 그리고 듀이에게 크게 기대었다고 제안자들도 밝히고 있습니다.
정리하자면, 백워드 설계는 활동 뿐인 수업이나, 일회적이고 일방적인 전달 중심의 수업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도록 교사를 도와주는 교수-학습 과정 설계 틀(form)이자 평가 설계 틀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수업을 마친 후 무언가를 해 낸 듯 싶어 뿌듯함을 느끼지만 그것도 잠시, 무언가 찜찜함이 남는 느낌에 과연 아이들이 해 낸 것은 무엇인가 곰곰이 되짚어 보면서 그 실체에 대한 의문을 가지는 교사라면 백워드 설계에 관심을 가져볼 만 하다고 생각합니다. 또는 이해가 빠진 앎에서 허우적거리거나 그마저도 얻어내지 못해 무기력한 아이들을 바라보면서 안타까움을 가지는 교사 또한 백워드 설계에 관심을 가져볼 만 할 것입니다. 백워드 설계가 가지는 가치는 그 지점에 있다고 생각합니다.
백워드 설계의 방향
타일러의 교육과정 설계는 아래 네 단계로 이루어집니다.
교육 목표 설정-학습 경험 선정-학습 경험 조직-평가
타일러의 교육과정 설계와 백워드 설계의 가장 큰 차이점은 '평가' 단계의 위치입니다. 평가는 학생들의 배움을 확인하는 단계입니다. 타일러의 교육과정 설계 모형은 무엇을 어떻게 배울지 정하고 이를 교수-학습 과정으로 구성하기를 마친 후 평가를 설계하도록 합니다. 반면에 백워드 설계는 조금 다릅니다. 백워드 설계의 단계를 타일러 교육과정 용어로 표현해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교육 목표 설정-평가 요소 선정-학습 경험 선정 및 조직
평가 단계를 앞으로 끌어낸 것과 가장 뒤로 둔 것 사이의 차이는 무엇일까요? 전통적인 타일러 교육과정 설계가 주류를 이루어 온 지금까지의 경험을 되짚어보자면, 타일러 교육과정 설계 모형은 평가 단계가 학습 경험에 종속된다는 문제가 있습니다. '이걸 가르쳤으니 이 정도는 알아야하지 않을까?'로 시작해서 평가를 치룬 후에 '아니, 왜 이렇게 열심히 가르쳤는데 이걸 모르지?'로 끝나는 상황이랄까요.
조금 더 개인적인 경험을 보태어 볼까 합니다. 타일러의 교육과정 설계에 따라 교육 목표에 기반하여 학습 경험을 선정하고 조직한다고 할 때, 교사는 여러가지 참고할 부분 중에 학습자 특성 면도 당연히 고려하겠지만, 자신의 교육철학도 일정부분 가미하게 됩니다. 그런데 설계 구조 상 학습자 특성보다는 교사 자신의 철학이 더 큰 영향을 끼치게 됨을 경험하게 됩니다. 설정된 교육 목표에 따라 교수-학습 과정을 진행하는 도중에 교사의 교육철학이 학습자 특성의 앞서 과정에 끼어들게되고 학생의 배움은 처음의 목표로부터 조금씩 멀어지게 됩니다. 결국 평가 국면에 이르러서는 어떤 국면에서 평가해야할지 방향성을 잃게됨을 경험한 바 있습니다. 실은 많이 경험하였습니다.
백워드 설계는, 교육 목표를 설정한 후 뒤이어 평가 요소를 선정하는 차이가 있습니다. 무엇을 평가할지 정하게 되면, 교사가 가르칠 것도 정해집니다. 참 묘한 차이가 있습니다. 가르치고 나서 무엇을 평가할지 정할 때에는 항상 고민이 앞섭니다. 학습 경험 선정과 조직이 앞서면 아이들이 무엇을 알아야하고, 무엇을 하여야할지에 대한 구체적이고 명확한 고민이 자꾸 희미해집니다. 열정은 앞서는데 학습자 특성을 고려한 아이들 수준에서의 배움에 대한 생각은 자꾸자꾸 사라집니다. 그렇게 가르치고 나면, 열정대로 가르치기는 했는데 막상 평가해야 할 것이 무엇인지 잘 모르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정말 열심히 이것저것 되는대로 가르치고 아이들과 힘껏 활동한 것 같은데, 막상 아이들은 무엇을 배웠어야 하는지, 배우게 되었는지 잘 모르겠다는 것이죠.
교사의 열정에 대해서 고민해봅니다. 항상 느끼는 것은, 왜 나는 열심히 가르치는데, 아이들 중에는 이것을 어려워하고 힘들어하는가의 부분입니다. 내가 열심히 한다고해서 다 되는 것이 아니라, 아이들이 받아들일 수 있는 범위 안에서 열심히 해야하는 것은 아닐까. 그래서 아예 순서를 바꾸어봅니다. 무엇을 가르칠지 정하기 전에, 아이들의 배움을 무엇으로 어떻게 평가할지부터 먼저 정합니다. 그러면 가르치는 것은 그에 따라 정하여집니다. 막연함이 사라지고, 수업 시간에 무엇을 하게 될지 명확해집니다. 그로부터 아이들의 성취에 더 집중할 수 있게 될 것입니다. 이러한 아이디어가 바로 백워드 설계의 방향입니다.
이러한 백워드 설계는 특히 활동이 중심을 이루는 일련의 교수-학습 과정 설계의 측면에서 유용해 보입니다. 아이들이 이 단원을 통해 무엇을 배우면 좋을지 정하고 나면, 그 배움을 위해 어떤 활동을 할지도 결정할 수 있습니다. 아이들의 성취와 활동이 일체를 이룰 수 있습니다. 기껏 사과 노래도 부르고 사과 잎으로 콜라주도 했는데, 활동 자체가 시작이자 끝이라면 교사에게는 뭔지 모를 아쉬움이 남습니다. 아이들의 활동을 통해 아이들의 배움을 명확하게 할 수 있다면 그보다 좋은 수업이 어디 있을까요.
요컨대, 백워드 설계는 무엇을 가르칠지보다 무엇을 배울지를 먼저 정함으로써 학습 경험이 배움과 일체를 이루도록 하는 교육과정 설계 방식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아에드 인 마이오렘 델 글로인
- 이전 시리즈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