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학년 학급운영] 10. 욕망은 인정하고, 방법을 지도하는
욕망은 인정하고, 방법은 지도하는
보통은 반대로 아이들의 욕망과 방법을 대하는 듯 합니다.
아이들의 욕망은 학교(나 가정)에서 보통 가로막힙니다. 저도 그렇게 대할 때가 많습니다. 프로게이머가 되고 싶어요. 음... 선생님 막내 동생 이야기를 해야겠네. 프로게이머가 되겠다고 고등학교 1학년 때부터 학업을 접었는데 블라블라블라. 그러면서 ‘바른 길’을 지도하고 싶어합니다. 우리나라 형편에서는 공부가 제일이야. 그러니 그런 꿈을 꾸기보다는 공부에 조금 더 매진하는 블라블라블라.
교사는 남이니 그렇게 친절하게 - 거리를 두고 - 말을 건네지만, 가족인 경우에는 보통 단답형으로 이야기하고 말게 됩니다. 쓸데없는 소리하네.
혹은, 그럴 수도 있습니다. 저 스마트폰으로 공부해요. 웃기네. 누가 스마트폰으로 공부하냐, 게임이나 안 하면 다행이지, 같은.
아이들에게 향하는 어른들의 이런 반응은 도대체 무엇에서 기인하는 것일까요?
아마도, 어른이 지내온 시대와 아이들이 지내는 시대의 차이 때문이 아닐까, 라는 생각을 가장 먼저 해보게 됩니다. 저희 때는 데스크탑도 스마트폰도 없었습니다. 틴트도 비비크림도 없었죠. 아이돌도 콘서트도 없던 시대를 살던 지금의 어른들에게 요즘 아이들의 욕망은 생소하게 다가서는 것이 그 이유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도 듭니다.
더 나아가, 어른들의 경험에서 오는 충고 - 혹은 잔소리 - 일 수도 있겠지요. 선생님도 너 나이 때 콘서트 쫓아다녀봐서 아는데, 다 부질없어. 선생님도 스마트폰 쓰는데 맨날 게임만 하게 되더라, 같은 피드백. 아이들이 굳이 살아봐서 알 필요 없으니까, 먼저 지내 본 어른으로서 아이들에게 간접적인 경험을 돌려주는 것입니다. 어찌보면 독서하는 것과 유사한, 하지만 훨씬 더 내밀한 조언이 될 수도 있겠네요.
‘아이다움’에 대한 확고한 신념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그게 아이들에게 건네지는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듭니다. 애들이 무슨 벌써부터 립스틱을 바르고 다니냐! 또는, 애들이 가지고 다니기에는 너무 비싼거 아냐?, 애가 가긴 어딜 가냐! 같은 것은, 아이들은 아이다워야 한다는 양육관에 기인한 반응이라고 볼 수도 있겠지요.
이런 반응은 어찌보면 당연한 것입니다. 어떤 분들은 ‘세대차이’라고 일컬을지도 모르지만, 살아온 환경과 접해온 경험이 다르기 때문에 이러한 차이는 당연히 발생할 수 밖에 없습니다. 문제는, 이를 ‘세대 간 갈등’으로 만드는, 꽉 막히고 일방적인 의사 전달의 흐름입니다.
어찌보면 아이들의 욕망은 순수하고 단순합니다. 하고 싶은 것이 생기고, 그것을 하고 싶고, 해야겠다는 생각에 사로잡혀서 그것을 하고야 마는. 어른들의 욕망이 중층적이며 다양한 방향을 향하고 있는 것과는 다르게, 아이들은 정말 ‘해 보고 싶다’는 그 생각이 전부인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해 보고 싶다, 는 자신에게로부터의 욕망이, 부모나 선생님의 생각과 맞아 떨어지면 그보다 더 좋을 수는 없겠지요. 그러나 보통, 부모나 선생님이 아이들에게 가지는 생각은 거의 대동소이합니다. ‘공부’. 그러나 아이들 중에서 공부를 하겠다는 욕망을 가지는 학생들은 거의 없으니, 항상 부딪힐 수 밖에 없는 노릇입니다.
그런데 다시 생각해보면, 지금의 어른들도 아이 시절에 그런 갈등을 겪은 분들이 적지 않을 것입니다. 싸우고 부딪히고 서로 반목하는. ‘요즘 어린 것들은’ 이라는 표현이 문명 사회가 생기기 전부터 있어왔다는 것을 보면, 이런 갈등의 모습은 어찌보면 인간 본질적인 모습이라고 할 수도 있습니다. 결국 어찌보면 아이들과 어른의 세대 간 갈등은 자자손손 계속 될 수 밖에 없으리라 예측할 수 있는데 말입니다.
다만, 지금까지는 다른 양상의 갈등이 진행될 여지가 다분합니다. 이전 세대의 아이들과는 다르게, 지금 세대의 아이들은 ‘광역 네트워킹’이 가능한 세대를 살고 있습니다. 바로 십 수년 전까지만 해도, ‘엄마 친구 아들은 말이지’라는 말로 시작하는, 부모의 인적 네트워크로 자녀들을 압박할 수 있었지만, 요즘은 오히려 아이들이 가진, 광역 네트워크 안에서 맺어진 사례가 아이들의 방어막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자신들이 가진 순수하고 단순한 욕망을 강화합니다. 특히 어른들과 부닥치면 부닥칠 수록 이 욕망은 더 강화됩니다. 저희들이 그랬던 것처럼. 게다가 어른들이 자랄 때 보다는 더 강력한 우군을 가진 상태에서.
이 순수한 욕망 앞에서, 이제 교사(와 부모)들이 취해야 할 태도는 조금 더 달라져야 합니다. 아니, 실은 이전부터도 달라졌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다만 지금은 더 확고하게 변화의 모습을 가져야 합니다. 아이들이 가진 욕망을 인정하는 태도가 필요합니다. 아이들이 욕망하는 것을 할 수 있어야 합니다. 이것이 디폴트가 되어야 합니다.
아이들이 하고 싶어하는대로 내버려두라, 는 말을 하고자 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것이야말로 무책임한 태도입니다. 아이들의 욕망을 마주했을 때, 그에 대응하는 시작점이 달라야 한다는 말을 하고 싶은 것입니다. 그건 안돼, 로 시작하는 것이 아니라, 적어도, 그래? 정도로는 시작할 수 있어야, 더 나아가서 그거 좋은데? 로 시작할 수 있어도 좋겠다는 생각을 말하고자 합니다.
6학년 교실에서 가장 티나게 드러나는 욕망 중 하나는, 틴트입니다. 빨강 틴트. 남자 교사라서 저는 반응이 늦은 편입니다. 아니, 남자 교사라서라기보다는 제 개인적인 특성일 수도 있겠지만, 어쨌든 저는 틴트 바른 아이들을 잘 못 알아봅니다. 매년 옆반 선생님들이 넌지시 말씀해주셔야, 아, 그렇고나 아는 수준. 처음에는 하지마라, 로 시작했더랬는데 하지 않는 것이 잘 안 됨을 보면서 고민이 따르게 되었습니다. 저게 뭐라고, 저게 뭐가 중요하다고, 하지 말라는 것을 하지? 그런데, 좁은 세계 속에서 살아가는 아이들에게, 그다지 많이 갖고 있지도 않은 욕망 중 하나인 틴트는, 쉽게 포기할 수 없는 욕망이 됩니다. 어찌보면 자아정체감하고도 맞물리는. 틴트 안 바른 나는, 내가 아닌 것 같은.
그것을 쉽게 포기할 수 없지만, 교사로서는 이에 대해 말하지 않을 수는 없습니다. 틴트는, 순수한 욕망 하나를 넘어서서, 무리짓기라는 다른 욕망으로 확장되기도 하기 때문입니다. 무리짓기가 나쁘지 않습니다. 그러나 무리짓기가 원인이 되는 편가르기가 문제가 되겠지요. 아이들이라서 더 문제가 클 수도 있습니다. 아이들은 적어도 어른들처럼 가식을 부리지는 않으니까. 악어의 눈물 같은 것을 줄줄줄 흘릴 수 있으니까. 아이들은 그게 잘 안됩니다. 그래서 초등학교 교실이 사랑스러운지도 모르겠습니다. 교사이자 어른인 나만 가식을 부리지 않으면, 이 공간에서 지내는 누구도 가식 없이 서로를 솔직하게 대할 수 있는 공간이기 때문에.
그래서 아이들의 욕망을 우선 인정하는 태도로 다가설 필요가 있습니다. 2019년도에 아이들에게 호평을 들었던 제 반응 중 하나가 바로, ‘그럴 수도 있지’ 였습니다. 그럴 수도 있지. 하고 싶을 수도 있지. 하고 싶지 않을 수도 있지. 어른도 그런데. 선생님도 그런데. 그리고 가능하다면 저는 허용할 수 있어야 한다는 생각도 갖고 있습니다. 틴트 그까이꺼, 뭐 중요하다고.
그런데, 아이들의 욕망을 모두 허용할 수는 없습니다. 그래서도 안됩니다. 물론, 아이들에게서 나오는 것은 모두 소중하긴 합니다. 그러나, 요즘 아이들에게서 나오는 것 중에, 정말 아이들 내면에서 오롯이 비롯된 것이 얼마나 됩니까. 매체의 영향으로, 아이들 것 아닌, 어른들의 것이 아이들로부터 욕망되는 것은 또 얼마나 많습니까.
우리가 쉽게 하는 ‘아이다움’이라는 말에 들어있는 생각들은, 요즘의 상황을 미루어 보건대, 아이들 속에 들어있는 욕망 중에 어른들로 부터 비롯된 가짜 아이 욕망을 걸러낼 생각이 없는, 무책임한 것입니다. 아이답게 지내도록 내버려두라, 는 말이 아이들을 신뢰하는 표현이 아니라 아이들을 방치하는 표현이 될 수도 있음을, 아이가 스스로의 아이다움을 뽐내는 것이 아니라 누군가에 의해 이식된 욕망을 뽐내면서 자기 스스로의 모습을 고민하고 드러낼 기회를 잃게 만드는 것임을 고민해 보아야 합니다.
그래서, 욕망을 인정하는 태도 전에, 어디까지, 무엇까지여야 하는가에 대한 고민도 필요합니다. 당연하겠지만, ‘훔치고 싶다’는 욕망을 인정할 수는 없습니다. 그건 안 되는 것이구요. 그런데 그에 대한 고민이 참 개인적입니다. '라떼는 말이야'. 사실 많은 교사와 부모는, 자신의 생각대로'만' 움직이곤 합니다. 이해는 합니다. 답은 없으니까요. 답이 있었다면, 진즉에 그대로 했겠지만... 사람을 대하는 일에 어디 답이 있겠습니까.
그렇다면 필요한 것은 아이들과 솔직한 대화입니다. 대화, 항상 하는 것 아냐? 하지만 대부분의 어른들은 잘 모릅니다. 자신의 생각이 아이들에게 흘러갈 뿐, 아이들의 생각이 흘러올 기회는 별로 없다는 사실을. 솔직한 대화는, 설득을 위한, 답정너의 대화가 아니라, 아이들과 의사를 주고받는 대화입니다. 욕망의 이해 당사자인 아이의 욕망에 대해, 그 크기와 넓이, 그 깊이와 방향을 듣는 것은 중요합니다.
그런데 어른들은 아이들과 대화하는 법을 잊곤 합니다. 왜냐하면 어느 시점부터인가, 어떻게 가르쳐 주었는지 잊기 때문입니다.
'너가 알아서 해'. 참 재미있는 아이러니입니다. 욕망은 제어하지만, 방법은 방치하는. 사실은 그것이 거꾸로 되어야하는데 말입니다.
막상 하고 싶은대로 이것저것 하다보면, 아이들은 금새 벽에 막힙니다. 왜냐하면 욕망하던 것이 실제로는 보기보다 쉽지 않기 때문입니다. 단순한 것을 욕망한다면 이는 쉽게 성취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조금씩 원하고 바라는 것들의 깊이가 깊어질수록, 이것을 이루기 위해서 들어가는 노력과 품의 질과 양도 더 커진다는 것을 아이들은 쉽게 알게 됩니다.
이 때 사실은 아이들에게 코칭이 필요한데, 교사도, 부모도 이 때부터 내버려둡니다. 알아서 하는 것 같으니까. 진짜 도움이 필요한 것은, 이렇게 스스로 무언가를 향해 움직일 때, 제대로 하고 있는지, 열심히 하고 있는지, 잘 해 나가고 있는지, 끊임없이 관찰하고 살피면서 혹여라도 어려워하는 기색이 보일 때 바로 도움을 요청할 수 있도록 옆에서 스탠바이하고 있어야 하는데, 보통은 몰두하고 있는 아이들로부터 떨어져나와, 자기 일을 합니다.
2019년도에는, 제 교실에서 그걸 고치고 싶었습니다. 아이들에게 미술 모둠 활동을 주고, 모둠끼리 열심히 하고 있으면 저는 슬며시 제 자리로 와서 업무를 하고, 과제 검사를 하고, 무언가 해야 할 일을 했었는데, 작년에는 그런 제 모습을 고치고 싶었습니다. 왜냐하면, 아이들에게 어른들이, 교사가 정말 필요할 때는, 바로 그 때 이기 때문입니다.
재미있지 않습니까? 하고 싶어하는 것은 못하게 하고, 막상 억지로 시키고 나면 내버려두는. 하고 싶어하는 것을 하게 하고, 할 때 겪는 어려움을 위해 스탠-바이하면서 안내하고 알려주고 도와준다면, 그게 아이를 훨씬 더 잘 자라게 하는 것일텐데요.
아이들의 욕망을 인정하고 허용하면서, 하지만 그 과정을 함께 해 나가면, 아이들은 또 쉽게 자신의 욕망을 더 높은 층위로 키워갑니다. 왜냐하면, 아이들도 성장하고 발전하고 자라고 싶어할 것이 분명하기 때문입니다.
혹은, 그러지 않더라도, 그저 제자리에 머무르더라도, 교사(와 부모)는 아이들의 든든한 지지대가 되어주어야 합니다. 어른들이 가리키는 방향으로 아이들을 달려나가게 하는 것이 아니라, 아이들이 뿌리내리고 양분 삼아 자라갈 수 있도록 어른들은 토양이 되어줄 필요가 있습니다.
아이들과 대화하는 법을 잊었다는 말은, 아이들의 욕망을 꺾고, 부모의 혹은 교사의 원하는 바를 아이들에게 흘려보내기만 하면서, 그렇게 어른의 바램대로 움직이기 시작한 아이들을 그저 내버려두기 시작하면서 시작됩니다. 나중에 문제가 생겼을 때 어찌할 바 모르게 되는 이유는 이런 태도와 자세에서 기인합니다.
물론, 모두가 그렇지는 않습니다. 부모가 공부를 원했는데 아이들이 부모의 바램에 잘 따르고, 그저 스스로 알아서 잘 하는 아이들도 있습니다. 그런데, 모든 아이들이 그렇지는 않습니다. 또한 그렇게 지내던 아이들이 모두 끝까지 - 대학 갈 때까지? - 그렇게 지내는 것도 아닙니다. 사실, 우리 아이들 중에 1%나 될까요? 그런데 우리 주변에서는 그런 아이들이 과대소비됩니다. 항상 입에 오르내리고, 항상 주목받고, 항상 대표적인 사례가 되고.
어차피 인생에 정답이 없다면, 좋은 대학도 정답이 될 수는 없습니다. 사실 대부분의 아이들에게는, 목표 지향보다는 위기 관리가 더 필요하고 의미있는지도 모릅니다.
재미있는 현상이 하나 더 있습니다. 사회는 창의성 - 독특한, 남과 다른 - 을 원하고 우대하는 듯 하지만, 어른들의 입에 오르내리는 사례는 대부분 시키는대로 잘하고 반듯한, 1%도 안되는 사례입니다. 아이들을 대하는 태도는, 나머지 99%의, 우리 교실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내 아이들의, 위기 관리를 위한 것이어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아에드 인 마이오렘 델 글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