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학년 학급운영] 9. 일관
일관
조심스러운 이야기이지만, 몇 년 전 직장에서 겪었던 말씀을 드려야겠습니다.
동료 선생님 한 분이, 술 자리가 불콰하게 달아오른 자리에서, 제 행동 한 가지에 대해서 말씀하시겠다며 이야기를 꺼내어 놓으셨습니다. 그러다가 평소에도 몇 가지 언짢은 것이 있었다며 첨언을 하셨습니다. 그 말씀을 듣고 바로, 웃으면서, 그럼 그런 일이 있을 때마다 바로바로 얘기하시죠, 라고 말씀드렸는데. 집에 와서 곰곰히 곱씹어보니, 그 선생님께서 벼르고 계셨구나 이해하게 되었습니다.
관계를 맺어가는 것은, 너무 뻔한 표현인지는 모르겠지만, 밀고 당기는 것과 다를 바 없습니다. 서로 당겨보고 밀어보면서, 어디까지 당겼을 때 혹은 어디까지 밀었을 때 상대방이 어떻게 반응하는지를 살피면서 적당한 한계를 정해나가는 것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교직에 와서, 저 같은 경우에는 조금 더 과감하게 밀어보고 당겨보곤 합니다. 대체로 밀어보고 당겨보고 하는 것이 나쁜 마음으로 하는 것은 아니라는 제 나름대로의 판단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그리고 보통 제가 과감하게 밀고 당기면서, 당연히 저도 그렇게 밀리고 당겨지는 것을 용인하겠다는 마음가짐이 전제되어 있습니다. 뭐, 가끔 말을 뱉어놓고 아차 싶을 때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그런데, 밀고 당겨지는 순간, 상대방이 벼르고 있었다는 느낌을 받게 되었다면 이제 그 관계 속에서는 더 이상의 밀당이 불가능합니다. 상대편의 말과 행동에 대해 의심이 생겨나게 되고, 그렇게 되는 순간 이전처럼 행동하기는 영영 불가능해져 버리게 됩니다.
교실에서 함께 생활하는 아이들이야말로, 이런 밀당을 더 예민하게 받아들이는 존재들입니다. 특히 급격한 정서적 발달이 이루어지는 초등학교 6학년 여자 어린이들이 더 할텐데요. 아마도 인간관계에 대한 경험의 층위가 옅기 때문이라고 이해할 수 있을 듯 합니다.
물론 경험이 절대선이라고 이야기하는 것은 아닙니다. 다만, 인간관계같은, 딱히 정해진 매뉴얼이 없는, 마치 날씨와 같아서 작은 요인에도 예민하게 변화하는 그런 것은, 그래서 그것을 경험해 온 양과 질이 중요하지 않을까 정도의 생각을 갖고 있습니다. 케이스 바이 케이스라고 하죠. 그 때 그 때의 상황과 형편의 미묘함을 파악하고 대처해야 하는 것. 그것이 인간관계의 기술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초등학교 학생 일반은 그것에 대해 조금 덜 능숙합니다.
이 때, 아직까지 다양 다종의 인간 군상을 경험해보지 못한 아이들에게, 어른들이 해주어야 할 것은 아이들이 인간관계의'예측가능성'을 높일 수 있도록 돕는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비단 학교의 교사가 해야할 일 뿐만이 아니라, 가정에서도 이루어져야 할 일입니다.
저희 둘째 아이가 집에서 짜증을 부린 일이 있었습니다. 아마 학교에서 무언가 언짢은 일이 있었던 듯 싶은데, 그런 둘째를 불러서 이런 이야기를 해 주었습니다.
아빠가 가지고 있는 원칙이 하나 있다면, 감정을 옮겨다니지 않으려고 하는 것이다. 저기에서 누군가에 의해 무엇인가의 영향을 받아 기분이 나빠졌다고 해서, 여기로 그 감정을 가지고 와서 그것을 드러낸다면, 여기에 있는 사람들은 당황스러움을 느끼게 될 것이다. 우리가 그것을 화풀이라고 한다. 아빠도 집 바깥에서 기분 나쁜 일이 있고, 속상하거나 화나는 일이 있지만, 지금까지 너희와 지내면서 줄곧 지켜왔던 원칙은, 바깥에서의 그 감정을 집 안으로 가지고 들어오지 말자, 였고 아빠는 지금까지 그 원칙을 어기지 않고 잘 지켜왔다. 화풀이는, 내 감정의 변화의 모습을 미처 알 기회가 없었던 여기의 사람들에게 범하는 무례함이다. 감정의 변화를 보여 줄 기회는 없이 그저 감정의 결과만 보여주는 것은 상대방을 배려하는 것이 아니다.
어른들이 아이들에게 가장 많이 저지르는 무례함은 바로 화풀이입니다. 아이들이 가장 민감하게 받아들이는 부분도 그렇습니다. 화풀이라는 것, 결국 감정의 예측 불가능성을 높이는 가장 대표적인 일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런 사람들에게 '히스테리를 부린다'라고 말하곤 하죠.
이것이, 아직까지 인간관계의 경험이 일천한 초등학교 6학년 아이들에게 얼마나 큰 혼란스러움일지 어른들은 알아야 합니다.
그래서 초등학교 6학년 교실에서 담임 교사가 해야할 일은, 내 감정의 일관성을 지키기 위하여 끊임없이 자기 감정을 돌아보는 일이며, 자신의 반응을 관리하는 일입니다.
아이들의 어떤 감정과 행동에 대하여 용인하는 태도를 보였다면, 다음에도 용인하여야 합니다. 저번에는, 저 아이에게는 그냥 넘어갔는데, 이번에는, 자신에게는 그냥 넘어가지 않으면, 아이들은 이런 담임 교사의 행동을 규정하여 버립니다. '편애'. 차별은 무언가 굉장히 눈에 띄는 어떤 행동에서 오는 것이 아닙니다. 담임 교사가 일관성을 잃어버릴 때, 그래서 아이들의 예측 가능성에 혼란을 주었을 때, 그것이 바로 부작위의 차별입니다.
항상 기억하고 있어야 합니다. 어떤 상황에서 아이들에게 어떤 반응을 보였는지 말입니다. 그러면, 가장 편해지는 것은 담임 교사 자신입니다.
간혹 그런 경우가 있습니다. 저도 사람인지라, 정서적으로 조금 더 가까운 아이들이 있고, 조금은 덜 가까운 아이들이 있습니다. 그런데 조금 더 가까운 아이들이 어떤 문제 상황을 일으켰을 때, 머리와 마음이 상황을 기억하고 있다면 바로 단호한 대처가 나오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러면 모든 아이들이 느낍니다. 우리 담임은 한결같다. 그런 신뢰가 학년 초에 쌓이면 그 다음에는 아이들과의 관계 맺음이 쉽습니다. 왜냐하면 아이들이 담임 교사와의 관계에 대해 예측 가능함을 느끼고 담임 교사와 그 범위 아래에서 관계 맺음을 맺어가기 때문입니다.
물론, 이러한 일관성은 아이들을 잘 훈련시키기 위한 것이 아닙니다. 아이들은 훈련의 대상이 아닙니다. 아이들은 관계맺음의 대상입니다. 물론 아주 수평적일 수는 없습니다. 어른으로서 아이들을 도와야 할 것들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그 도움은 훈련과 훈육의 목적이 아닙니다. 아이들도 - 비록 서툰 부분이 있지만 - 충분히 판단하고 결정할 수 있는 존재입니다. 어른들은 이런 아이들의 판단과 결정이 사회적으로 용인될 수 있는 것이 되도록 조언하고 도와야하는 것일 뿐, 훈련하고 훈육하여야 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런 가운데, 아이들이 학교 생활에서 담임 교사와의 관계 만이라도 예측 가능함을 가지고 살아간다면, 다른 인간 관계의 예측 불가능성을 어느 정도 희석시킬 수 있을 뿐만 아니라 - 또래 간의 다툼 - 아직까지 인간 관계의 다종 다양함을 경험하지 못한 탓에 서툴게 관계망을 유지하고 있는 아이들이 자연스럽게 관계 맺음을 연습해갈 수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이것은 비단 학교에서만의 일은 아닙니다. 부모도, 자신의 자녀와의 관계에서 이런 예측 가능함이 이루어지도록 신경쓰고 노력해야 합니다. 마찬가지로 이런 가정 생활은 훈련과 훈육을 목적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아이들이 주도적으로 성장하고 발달해나가는 가운데, 부모로서, 어른으로서의 조력과 도움 - 스캐폴딩 - 의 모습으로 이루어져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런 가정 생활을 위해서 대화가 필요한 것이겠지요. 대화는, 내 메시지를 아이가 '알아듣도록' 목적하는 일방향적인 것이 아니라, 의사 소통을 위해 끊임없이 자신의 위치를 확인하고 자신의 감정의 상태를 확인하고자 하는 아이들의 불안함을 안정시켜주는 어른으로서의 도움과 조력의 방식이라고 생각합니다.
아에드 인 마이오렘 델 글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