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학년 학급운영, 完] 12. 어떻게 살아가게 할 것인가
어떻게 살아가게 할 것인가
처음 교직에 들어왔을 때만 해도, 아이들은 그저 ‘가르쳐야하는’ 존재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첫 해를 보내면서 생각을 조금 다르게 하는 계기를 가졌더랬습니다.
저는, 9월 1일, 6학년 과학 전담 교사로 발령을 받았습니다. 전체 8반 중, 6변에 들어가는. 그런데, 발령 한 주 후, 6학년 담임교사로 다시 보직을 변경하게 되었습니다. 기존 6학년 담임 선생님께서, 아이들과의 어려움으로 병가를 들어가시고, 제가 담임으로 그 아이들을 맡게 된 것입니다. 그 아이들을 데리고 수학여행도 다녀오고, 결국 졸업까지 시켰습니다.
저는, 원래 담임 선생님이셨던 선생님도, 또 아이들도, 모두가 피해자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원래 담임 선생님은, 정년을 3년 앞둔 여 선생님이셨습니다. 아이들의 할머니보다 연배가 조금 낮은 정도의 연령이셨습니다. 그러니 아이들이 얼마나 예쁘셨을까요. 그런데 아이들은 그걸 잘 못 받아들였던 듯 싶습니다. 선생님께서 아이들에게 하시는말씀들이, 아이들에게는 그 의미대로 받아들여지지 않은 것이죠. 반대의 경우도 있었습니다. 아이들의 말과 행동이선생님에게는 그 의미대로 전달되지 않는 일들. 오해는 쌓이고, 갈등은 짙어지다가, 결국 선생님도, 아이들도 폭발하고 말았습니다.
그 때 그 아이들과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면서, 진의가 전달되는 방식에 대해 생각해 볼 기회를 많이 가졌습니다.
그런데, 교사가 가진 마음가짐이 아이들에게 제대로 전달이 되기만 하면, 아이들과 교사는 더불어 성장할 수 있을까요?
많은 담임 교사들이 ‘일인일역’을 운영하며 아이들의 교실살이를 운영하고 있습니다. 스물 몇 명의 아이들에게 제각기 교실에서의 ‘임무’를 부여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제비를 뽑든, 합의를 하든 아이들에게 무언가 할 일을 줍니다.그런데, 그 ‘일인일역’ 때문에 갈등이 생긴다는 이야기를 심심찮게 듣습니다. 저희 첫째 아이가, 작년에 일인일역에 대한 이야기를 집에서 자주 했었습니다. 중학교 교실에서 저희 아이가 맡은 일인일역은, ‘수업종 쳤는데 제자리에 앉지 않은 학생 체크하기’ 였습니다. 저희 아이는 그래도 나름대로 담임교사와 아이들에게 신뢰를 받았나 봅니다. 그 일인일역을 1년간 했었으니까요. 그럼에도 밥상머리에서 교실에서의 고충을 이리저리 많이 이야기하곤 했습니다. 애들 중에 제때 앉지 않으면서 자꾸 앉았다고 우기는 아이들과의 실랑이가 있었던 날이면 자신의 어려움을 저희들한테 토로하곤 하였습니다.
일인일역 종목도 담임에 의해 결정되는 경우가 많으며, 일인일역 수행은 교육적 의도로 아이들에게 부여되는 것이 일반적인 듯 합니다. 그런데, 그런 교육적 의도는 누가 결정하는 것일까요? 과연 담임의 교육적 처방이, 아이들에게실제로 교육적 효과를 거둘 수 있을까요? 교사가 교실에서 수행하는 굉장히 많은 교실살이 프로그램들. 그것이 교육 목적이라는 이름으로 혹시 아이들에게 강요되는 것은 아닐까요? 일인일역을 준비하면서 교사도 골치아픈 일이 한 두 번이 아닐 것입니다. 아이들이 공정함을 느낄 수 있도록 경중 없이 일인일역을 만들어야 하니까요. 그런데, 그렇게 만든 일인일역이 진짜 교육 효과를 거두고 있는지에 대한 반성은 없습니다.
저는, 한 번도 일인일역을 운영한 적이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아이들에게 교사 마음대로 무언가를 하라고 시키는 것 자체에 대한 거부감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저는, 아이들에게 심부름도 시키지 않습니다. 설문지를 수합하거나, 가정통신문을 각 반에 배부해야 하는 일이 있을 때, 저는 제가 직접 다녀옵니다. 그 때, 가끔 선생님들께서 여쭤보십니다. 왜 애들 시키지 않느냐고. 저는, 그건 아이들 할 일이 아니라, 제 할 일이기 때문에 제가 직접 왔습니다, 라고 말씀드리진 않습니다. 그냥 웃고 말죠.
우리는 아이들과 함께 결정된 바가 없는 것을, 교사의 가치관과 철학에 의해 아이들에게 강제하곤 합니다. 교사가 옳다고 믿는 바가, 아이들에게도 옳을까요? 따라서, 교사의 전문성이 전가의 보도처럼 휘둘리는 일을 경계해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교사의 교실살이 전문성은, 아이들과의 합의를 이루어가는 절차와 함께여야 합니다. 왜냐하면, 교실살이는 우리가 함께하는 것이며, 교사의 전문성은 이 아이들과 함께 한 것은 아닐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합의에 이른다면 모두가 옳은 것일까. 우리 교실에서 합의가 이루어지는 방식 중, 아이들이 좋아하기 때문에 이르는 합의가 있으며, 교사니까 합의해 주는 경우가 있습니다.
아이들이 담임과 래포를 어느 정도 이루어내는 시기, 7월 쯤이 되면 아이들이 1학기를 마무리하면서 꼭 하는 말이 있습니다. ‘(라면) 파티 안해요?’ 저는 되묻습니다. ‘(라면) 파티는 언제 해? 수학 시간? 도덕 시간?’
우리 교육과정에는 (라면) 파티를 위한 시간이 마련되어 있지 않습니다. 물론, 창체 시간이 있긴 하지만, 그 시간은 ‘자치 및 적응 활동’과 ‘창의 주제 활동’을 위해 사용되는 배움의 시간입니다. (라면) 파티를 아직 아이들의 배움과 연결시키지 못한 일개 교사는, 따라서 아이들에게 (라면) 파티를 할 시간은 없다고 말해주곤 합니다.
교실살이에 대한 교사의 전문성은 현재 학생과의 합의가 필요하다 생각하지만, 교육과정 운영과 관련한 교사의 전문성은 충분히 학생들을 이해시킬 수 있는 것이어야 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교육과정 운영을 교사의 전문적 영역으로 여기지 않는 경우가 많습니다. 교육과정 운영은, 1차적으로 국가 수준의 교육과정 성취기준에 학생이 도달하도록 하는 것을 목표로 해야 합니다. 진도가 빨리 끝났으니, 오늘은 파티다! 같은 방식의 교육과정 운영이 과연 교사의 교육과정 운영 전문성과 연결될까요? 진도가 빨리 끝났다면, 성취기준 분석을 통하여 혹시 학생들이 성취기준 상의 일정 성취수준에 도달할만한, 혹은 교육과정 각론 운영 상 학생들의 교과 역량을 신장시켜 정의적 목표에 도달할 수 있는 잘 구성된 배움으로 제공되어야 할 것입니다. 교사의 전문성과 함께 잘 구성된 내용이라면, 아무리 재미없을만한 것이더라도 아이들은 즐겁고 재미나게 배웁니다. 그게 아이들입니다.
그런데, 여기에서 또 다른 문제가 야기될 수 있습니다. 우리 선생님이 하자고 하는 것이니까, 아이들은 쉽게 합의해 주기도 합니다. 이러한 것 중, 가치와 덕목에 관련된 사항들이 있습니다.
무릇 학생이라면 성실해야 한다, 는 명목 하에, 교사가 아이들이 감당하기에도 어려울 만큼의 과제를 내 준다면? 물론 학교 현장에서는 일어나기 어려운 일이지만, 사교육 현장에서는 비일비재하게 이루어집니다. 안 하면 불성실, 하면 성실.
예의바르게, 같은 덕목은 어떨까요? 간혹 교사가 무례하다는 이유로 아이들을 심하게 꾸짖을 때가 있기도 한데, 이 ’예의’라는 덕목은 교사에 의해 얼마나 체화되어 아이들에게 제공되는 것일까요?
예전에는 학교에서 ‘종교 교육’을 하는 선생님들도 계셨습니다. 중학교 3학년 때 기술 선생님은, ‘예수 사랑’을 그렇게나 수업 시간마다 말씀하시곤 하셨습니다. 교사에 의한 가치나 덕목이, 교사의 신념과 결합하여 교육현장에서 뿌려질 때, 아이들은 그것을 무비판적으로 받아들이고 그 아래 종속될 가능성이 있습니다.
교사 개인이 옳다고 믿는 것이기에, 아이들에게 그저 전달되어도 좋은 것일까요? 이건 아이들에게 무조건 좋은 것이니까, 라고 교사가 생각할 때, 그것은 과연 교사의 치열한 고민 끝에 나온 결과물일까요?
요 근래에 제 고민은 이런 것이었습니다. 아이들에게 너무 쉽게 ‘옳은 바’에 대해 말하곤 했다는 것. 그것이 사회적으로도, 교사 전문성의 측면에서도, 제 스스로도 충분히, 치열하게 고민한 것이 아니라, 그저 살아온 주관적 개인의 인생을 토대로 아이들에게 전달되었다는 것. 과연, 내게 옳은 것이, 아이들에게 좋아보이는 것이, 아이들의 삶을 좋은 것으로 만들 수 있는 것인가.
마이클 센델 교수의 [정의란 무엇인가]라는 책은, 우리가 이야기하는 정의는 어디에서 비롯되어야 하는가에 대한 재미있으면서도 생각해 볼만한 화두를 던지고 있습니다. 센델 교수의 결론은, 사회 구성원이 합의할 수 있는 '미덕'을 정의로써 인정하고 이를 적극적으로 수용하자, 정도로 요약할 수 있습니다. 교실에서의 '미덕'도 그렇습니다. 저는 언젠가부터, 교실에서 아이들에게 건네어 줄 수 있는 미덕으로 '책임감' 이상을 꺼내어들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제가 버린 덕목은, '정직', '성실함', '예의', '배려' 같은 것이 있고, 또 있을 듯 합니다. 그 나머지는 뭐... 이미 버린지 오래 되었구요. 정직하지 말라, 라고 말한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정직이 무엇인가, 라고 하였을 때, 과연 아이들에게 그 정직의 의미와 가치를 일관되게 오롯이 설명할 수 있을 것인가에 대한 회의가 들었다는 말을 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해라, 저렇게 해 봐라, 이건 안 된다, 저건 하지 마라, 같은 단어들도. 어느 순간엔가 조심스럽게 사용하게 되었습니다. 이런 가치와 덕목이, 과연 내 안에서, 교사의 전문성을 기반으로, 우리 사회에서 폭넓게 인정하고 수용하는 가치인가.
예수 사랑을 말씀하시는 선생님은, 그게 옳다고 강하게 믿고 계셨을 것입니다. 이 어린 영혼들이 악의 맛을 더 보기 전에, 주님의 사랑으로 모두 착하고 선하게 살아가길 바라는 마음으로 수업 때마다 말씀하셨겠지요. 그리고 배움보다 구원이 더 중요하다는 믿음도 가지셨겠구요. 우리 교실에서, 아이들에게, 또 다른 이름의 '예수 사랑'이 치열한 고민 없이 흩뿌려지고 있습니다. 그것이 우리 착한 아이들에게 그저 이식된다면, 나중에 교사를 원망할 수도 있겠지요. 나는 싫었는데, 우리 선생님이 이러저러한 것을 우리에게 시켰어. 말했어. 강요했어.
상대주의적인 시각으로 삶과 사회와 관계를 들여다보는 것이 분명해 보이는 분들인데, 간혹 자기 자신에 대해서는 절대주의적 확신을 가지고 살아가는 분들을 종종 보게 됩니다.
물론, 우리 아이들은, 미성년이자, 어른이 보호해야 할 필요가 있는 이들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우리가 때로는 아이들에게 '무조건 받아들이게' 해야 할 가치와 덕목, 습관과 태도가 있습니다. 공교육이 사회화의 의미와 가치를 가지는 한, 그것은 학교와 교실이 마땅히 할 일 입니다.
그러나 그 '무조건' 받아들이도록 할 대상과 행동이 무엇인지를 결정하는 것이, 교사 개인에게 너무 위임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구조적인 것이라 바꾸기 쉽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교사가 더 치열해져야겠지요. 그것이 바로 우리가 아이들로 하여금 '어떻게 살아가게 할 것인가'를 함께 이야기 나누기 전에 반드시 거쳐야 할 과정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아에드 인 마이오렘 델 글로인